바티칸(1)

라테라노 조약과 바티칸시티의 탄생

by leo



19세기 중엽 이탈리아에 통일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통일에 참가했지만 ‘교황청 국가’는 새로운 통일국가 탄생에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발표하려던 통일 영웅 카부르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당시 교황청 국가는 북쪽으로는 포 강에서 남쪽으로는 테베레 강까지 이르는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전체 면적은 416억㎡여서 오늘날 이탈리아 국토의 9분의 1 정도를 차지했다. 여기에 포함된 주요 도시는 로마는 물론 팔레르모, 코르시카, 볼로냐, 파르마와 아드리아 해의 주요 항구였다. 총 인구는 300만 명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와 남부를 통합했지만 교황청 국가 때문에 허리가 잘린 꼴이 되고 말았다. 참다못한 이탈리아 왕국은 1860년 교황청 국가의 동쪽 부분인 로마냐를 점령했다. 10년 뒤인 1870년에는 로마마저 점령해 병합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476년 고대 로마 멸망 이래 1400년 만에 다시 통일의 염원을 이룰 수 있었다.

중세시대만 해도 교황은 ‘파문’이라는 무기로 속세의 권력을 제한할 수 있었다. 10세기 프랑스의 경건왕 로베르가 결혼 문제로 교황청과 맞섰을 때 교황은 그를 파문한 뒤 프랑스의 모든 성당에 각종 종교 의식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이 때문에 국왕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해 고립돼 버렸다. 궁전에서 그를 모시던 시종들까지 모두 달아나버렸다.


하지만 19세기 이탈리아는 중세시대 프랑스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왕국 군대가 교황청을 무시하고 로마를 병합했지만 군대에 저항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중세시대에 교황이 국왕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사용하던 파문이라는 무기는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후 60년 동안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역대 교황은 교황청에 틀어박혀 일부러 ‘셀프 연금’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이탈리아 정부의 조치에 항의했다. 역사가들은 이 기간 동안의 교황들을 ‘바티칸의 죄수들’이라고 빗대어 불렀다. 교황과 교황청의 지위가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 하는 과제는 ‘로마의 문제’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로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은 1926년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사이에서 진행되기 시작됐다. 이탈리아 왕국을 대표하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 국왕과 베니토 무솔리니, 교황청을 대표하는 교황 비오 11세와 추기경 피에트로 가스파리가 협상을 주도했다. 협상은 3년 만에 결말을 보았다. 조약에 서명한 사람은 무솔리니와 가스파리였다.


라테라노 조약의 핵심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교황청은 모든 정치적, 세속적 권력을 이탈리아 왕국에 넘겨준다. 대신 교황청 국가인 바티칸 시국을 새로 만들고, 모든 권력을 넘겨둔 대가로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


라테라노 조약의 주요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자.


1. 이탈리아 정부는 1848년 이탈리아 왕국 헌법에 규정된 대로 ‘가톨릭은 이탈리아 왕국의 유일한 종교’라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2. 이탈리아 왕국 영토에 있는 모든 교회 시설은 국유화한다. 이탈리아의 모든 성직자들은 국가에 충성 맹세를 하고,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이탈리아 국민이 된다.


3. 바티칸시국을 만들어 교황청에 독립적이고 완전한 주권을 인정한다.


4. 이탈리아 정부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재정 보상을 해주고 성직자들에게 매달 일정액의 월급을 준다. 교황청의 각종 사업에는 면세 혜택을 준다. 바티칸시국에 기차역을 만들고, 우체국과 전신전화국, 라디오방송국도 세운다.


5. 4대 메이저 대성당 중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제외하고 세 곳은 바티칸시국 밖의 이탈리아 왕국 영토에 위치하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이곳에 외교적 기관의 지위를 허용하고 교황청에 소유권을 인정한다.

교황청은 라테라노 조약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교황의 세속적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일부 이탈리아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 조약은 교황청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하는 효력을 얻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이 조약을 통해 무솔리니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켜줌으로써 결국 이탈리아를 전체주의의 악몽으로 몰아넣는 데 협조한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교황이 무솔리니 정부를 인정함으로써 가톨릭 신도가 90%를 넘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무솔리니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했지만 비오 11세로서는 두고두고 역사로부터 비난을 받는 조항이 들어갔다.


‘교황은 국제 문제에 영원히 중립을 지키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양측이 합의에 따라 요청하지 않을 경우 절대 중재에 나서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무솔리니는 교황이 반 파시스트 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떠오르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그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교황청이 방해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었다.


라테라노 조약 체결 이후에도 교황과 무솔리니의 갈등은 이어졌다. 두 사람이 가장 큰 차이를 보인 분야는 교육이었다. 교황은 종전대로 교회가 학교 교육 커리큘럼은 물론 일상생활 교육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체주의 국가에 걸맞은 신민 육성을 꿈꾼 무솔리니는 국가가 교육을 관리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모든 것은 무솔리니 뜻대로 정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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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라노 조약 체결을 축하하기 위해 무솔리니는 바티칸시국과 로마 중심부를 연결하는 비아 델라 콘칠리아지오네(화해의 길)를 건설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서 산탄젤로 성까지 이어지는 총길이 500m 도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등지고 섰을 때 앞으로 시원하게 뚫린 4차로 도로가 바로 ‘화해의 길’이다. 도로 공사는 1936년 시작됐지만, 무솔리니가 쫓겨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50년에야 겨우 완공됐다.


이 조약은 라테라노 대성당에 붙어 있는 라테라노 궁전에서 조인됐다고 해서 라테라노 조약으로 불린다. 바티칸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한 것은 라테라노 조약 때부터이다. 바티칸은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생겼으니 올해로 탄생 91주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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