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급류처럼 흘러 넘쳐 온 세상을 흠뻑 적시었네
트로이 사람들과 그들을 도운 친구들은 모두 죽었으니
무거운 죽음에 짓눌려 쓰러진 이들의 시체뿐이로다’
10년을 끈 트로이 전쟁은 ‘목마’ 한 마리의 비책 때문에, 또는 덕분에 막을 내렸습니다. 대부분의 트로이 사람들은 성 안으로 쳐들어온 그리스 연합군의 칼과 창과 화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트로이는 그야말로 지옥의 학살장이었습니다.
떼죽음을 피해 달아난 이들도 있었습니다. 왕자 안카이즈와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아이네아스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로 달아났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로마의 조상이 됐습니다.
극적으로 달아난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왕자 비아노르와 그의 일행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 북부 지역으로 도망갔습니다. 춥기는 하지만 비옥한 땅에 정착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곳은 오늘날 알바니아 일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아노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티베리우스와 후처에게서 낳은 비아노르였습니다. 그는 둘째아들을 더 사랑해 이름까지 물려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변의 반대가 너무 극심해 왕 자리까지 줄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큰아들인 티베리우스는 신하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천성이 선했던 그는 이복동생을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같은 나라에서 함께 살 뜻도 없었습니다.
“비아노르, 네 목숨을 빼앗을 생각은 없다. 배가 다르기는 하지만 너는 아버지의 아들, 나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넉넉한 돈과 충분한 병사와 백성을 붙여주겠다. 너의 어머니와 함께 나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살도록 해라.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거라.”
비아노르도 형과 싸워 왕위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는 형의 요구대로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왕국을 떠나 유랑에 나섰습니다.
비아노르는 서쪽으로 가던 도중 강이 흐르고 평야가 넓은 땅을 발견해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이름을 붙여 그 도시를 ‘만투아’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만토바가 바로 그곳이라고 합니다.
비아노르는 해괴한 꿈을 자주 꾸었습니다. 신들이 나타나 앞으로 일어날 일과 할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신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나중에 모두 현실로 이뤄졌습니다.
비아노르는 자신에게 영적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에게 오츠노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꿈을 통해 미래를 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날 오츠노의 꿈에 아폴로 신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어머니와 헤어질 때가 됐다. 너는 만투아를 떠나야 한다. 이곳은 네가 머물 장소가 아니다. 여기에 만족하면 온갖 불행이 밀려올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서 더 크고 화려한 도시를 세워야 한다. 해가 지는 서쪽으로 가도록 해라.”
오츠노는 일부 백성을 데리고 계속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아폴로가 매일 꿈에 나타나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중단하고 싶었지만, 그만 믿고 따라다니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멈출 수 없었습니다.
오츠노가 만투아를 떠난 지 10년째 되던 무렵이었습니다. 저녁 늦게 평지에 도착한 그는 천막을 치고 여느 때처럼 평온한 밤을 보냈습니다. 그날 꿈에도 아폴로는 어김없이 나타났습니다. 신은 아주 넓고 평화로우면서 비옥한 땅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침내 네가 안주할 땅에 도착했구나. 이곳이 바로 너의 후손이 영원히 정착할 곳이다.”
오츠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전날 밤에는 어두워서 몰랐지만 아주 광활하고 아름다운 평야였습니다. 곳곳에 참나무와 스트로베리, 소나무가 무성한 숲이 있었고, 폭이 적당히 넓으면서 수량이 풍부한 강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침 양치기들이 무리를 지어 근처를 지나갔습니다. 오츠노는 그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이곳은 어떤 땅이요?”
양치기들은 카르페타니, 또는 카르페타노스라고 불리는 유목민들이었습니다. ‘나라가 없는 종족’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에 따라 신의 계시를 기다리면서 곳곳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동쪽에서 온 귀인을 만나 아주 넓은 평야에 정착하게 되는 게 우리들의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 귀인이 당신인 것 같군요.”
“나도 어젯밤 꿈에 아폴로 신을 만났지요. 그분은 나에게 이곳에서 정착하라고 하셨다오.”
오츠노는 집을 짓고 성벽을 쌓아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신을 모실 신전을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데리고 온 백성들과 카르페타니는 새 신전에 어떤 신을 모실지를 놓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백성들은 아폴로를 모시려 했지만, 카르페타니는 단 한 번도 그를 신으로 숭앙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츠노는 양측을 설득하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대로 뒀다간 내홍이 깊어져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번질지도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아폴로 신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츠노의 마음을 읽은 아폴로는 그날 밤 꿈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두 가지를 실행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새로 지은 도시를 사투르누스의 따님으로서 땅을 지키는 일을 하는 메트라기르타 여신에게 바치도록 해라. 너의 결정이 공정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너를 제물로 바치도록 해라.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메트라기르타는 키벨레라고 불리는 여신이었습니다. 원래는 프리기아 지역의 여신이었지만 소아시아를 식민지로 삼은 그리스 사람들이 퍼뜨린 덕분에 여러 지역에서 추앙받게 됐습니다.
오츠노는 다음날 아침 백성들과 카르페타니를 모았습니다.
“꿈에 아폴로 신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새 도시를 메트라기르타 여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츠노는 이어 구덩이를 하나 파라고 지시했습니다.
백성들과 카르페타니는 무슨 영문인지, 어디에 쓸 것인지도 모르고 그가 시키는 대로 깊고 넓은 구덩이를 팠습니다.
오츠노는 아폴로 신에게서 받은 두 번째 신탁 내용을 밝혔습니다.
“신은 제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물은 나의 목숨이어야 한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나를 구덩이에 산 채로 묻도록 하시오.”
오츠노는 구덩이로 뛰어 들어가 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백성들과 카르페타니는 예기치 못한 일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들어간 구덩이를 흙으로 메울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오츠노는 편안한 표정으로 빙긋이 웃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이러는 것은 모두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머지않아 신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겁니다.”
백성들과 카페르타니는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흙으로 구덩이를 메웠습니다. 졸지에 무덤이 된 구덩이 위에는 큰 돌을 올려놓았습니다.
백성들은 순식간에 지도자를 잃은 슬픔에 통곡했습니다. 카르페타니는 뜻하지 않은 일에 당황하면서 여기에 머물러야 할지 떠나야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한 달이 지났습니다. 깊은 밤에 갑자기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천둥번개도 내리쳤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우리가 오츠노를 생매장한 벌을 받게 되는 겁니다. 신전 건립을 놓고 싸우는 바람에 왕을 죽게 만든 건 모두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사자 두 마리가 이끄는 수레가 내려왔습니다. 메트라기르타 여신이 수레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덤에서 오츠노를 꺼내 마차에 태우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하늘의 분노가 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새 지도자를 뽑았고, 영원히 새 고향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메트라기르타 여신을 모신 도시는 마게리트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세월이 더 흐른 뒤에는 마드리드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됐습니다. 오늘날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는 이렇게 해서 생겨나게 됐습니다.
오츠노 비아노르의 전설은 사실 16세기에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본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위의 이야기는 세월이 흐른 뒤에 약간 변형된 것입니다. 글을 쓰면서 처음에는 원본을 맨 앞에 내세울 생각도 했지만 영국과 런던을 창건한 ‘트로이의 브루투스’와 비슷한데다 황당한 측면이 많아 뒤로 돌리기로 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츠노 비아노르는 토스카나와 라틴의 왕인 티베리우스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테베 출신 예언자 만토였습니다. 티베리우스는 트로이 왕자였던 아이네아스의 후손이었고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의 6대조였습니다. 그러니 오츠노도 아이네아스의 후손인 셈입니다.
오츠노가 태어나기 전 티베리우스는 알불라 강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시체는 강물에 떠내려갔습니다. 이후부터 이 강에는 그의 이름이 붙여져 테베레 강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오츠노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불행했습니다. 그는 서자여서 아버지의 유산을 얻지 못했습니다. 왕 자리는 적자인 이복형 아그리파 실비우스가 차지해 무려 41년간 통치했습니다.
오츠노는 선량한 형의 배려로 토스카나를 다스리게 됐지만 형이 살아 있는 한 이탈리아에서는 뜻을 펼칠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만토는 처지가 딱한 아들에게 토스카나를 떠나 다른 도시를 개척하는 게 신의 뜻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오츠노는 이베리아 반도로 갔습니다. 인구가 많지 않은 카르페타니 부족이 사는 그곳은 풍요롭고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기후도 좋고 하늘은 맑았습니다. 많은 인구가 살기에도 부족한 게 없는 훌륭한 곳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어머니 만토의 예언 덕분에 얻은 아름다운 땅에 새로 도시를 세웠습니다. 어머니와 현지 부족의 이름을 나란히 붙여 이곳을 만투아 카르페타노룸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때는 BC 879년이었습니다. 로마 창건 126년 전이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다음 오츠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독재자 메켄키우스를 몰아낸 토스카나 사람들이 그에게 왕 자리에 앉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간 그는 스페인에 남겨둔 만투아처럼 이탈리아에도 새 도시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곳의 이름도 만투아였습니다.’
오츠노의 전설을 맨 처음 기록한 사람은 16세기 펠리페 2세 국왕 시절 바르셀로나 대성당에서 참사회 회원이자 사료학자로 일하던 프란체스코 타라파였습니다. 그가 죽은 다음에 출간된 『히스파니아의 기원』이라는 책에 ‘마드리드를 창건한 인물은 오츠노 비아노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라틴의 왕 티베리우스의 아들인 오츠노는 다른 도시를 창건했다. 만투아라고 불리는 훌륭한 마을이었다. 지금의 마드리드다. 그는 이탈리아에 있는 다른 도시 만투아도 창건했다.’
타파라는 사료학자였기 때문에 대성당은 물론 마드리드의 여러 도서관에 보관된 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오츠노의 전설을 주장한 데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습니다. 상상력만으로 무작정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유명한 학자 두 명이 쓴 책이 그 기반이었습니다. 1세기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드』와 2세기 그리스의 과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였던 프톨레미우스가 쓴 『지리』였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에는 이탈리아 만투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책에는 ‘오츠노가 만투아의 창시자’라고 적혀 있습니다. 프톨레미우스는 『지리』에서 유럽의 여러 도시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많은 도시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여기에 카르페타니아의 만투아가 나옵니다. 만투아는 이베리아 반도 한가운데 있는 곳으로 설명돼 있습니다. 오늘날 마드리드 자리였습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전설의 원본은 ‘오츠노가 이탈리아로 돌아갔다’고 전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로마 신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도 오츠노 또는 오크노르라는 영웅이 나옵니다. 그는 볼로냐 창건 신화와 관련이 있는 인물입니다. 이 이야기 속의 오츠노는 티베리우스 또는 파우누스의 아들입니다. 어머니는 티레시우스 또는 헤라클레스의 딸인 만투아입니다. 페루지아에서 태어난 그는 오늘날 볼로냐인 펠시나를 창건했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포 평원 인근에 만투아 등 여러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이제 오츠노의 전설이 어떻게 해서 스페인에서 자리를 잡게 됐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신화와 전설은 때로는 권력의 밑받침이 되기도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밑받침으로 삼기 위해 신화와 전설을 이용하거나 조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츠노의 전설도 그런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펠리페 2세 시절 마드리드는 스페인 수도 자리를 놓고 바야돌리드, 톨레도와 다투고 있었습니다. 국왕은 마드리드를 선호했습니다. 이곳은 고대에 로마군과 아랍군이 주둔할 정도로 지정학적 위치가 좋은 군사도시였습니다. 16세기에는 전쟁 경험이 많고 국왕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기사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왕으로서는 입만 살아 번번이 대드는 귀족이 많은 바야돌리드나 톨레도보다는 왕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리기를 아까워하지 않는 기사들이 많은 도시에 가는 게 더 유리했을 겁니다.
하지만 왕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수도를 정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마드리드의 역사성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마드리드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아랍이 만든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기독교 국가의 수도를 아랍이 만든 곳으로 정한다는 것은 귀족뿐만 아니라 평범한 백성에게도 설득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펠리페 3세는 마드리드의 역사성이 바야돌리드나 톨레도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로마, 파리, 런던 못지않게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라는 걸 귀족과 백성에게 보여줘야 했습니다.
대개 권력자가 이럴 경우에 기대는 것은 신화였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필요한 대로 만들어 내거나, 기존에 있던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각색하는 것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당시 조금씩 퍼져나가던 오츠노의 전설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서서히 퍼뜨렸습니다. 계획은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갔습니다. 그 덕분에 궁정은 마드리드에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타파라가 처음 기록한 오츠노의 전설은 펠리페 2세 시대 작가 로페스 데 호요스와 후안 로페스 데 멘도사, 17세기 작가 길 곤잘레스 다비야에 의해 더 퍼져나갔습니다. 종국적으로는 다비야와 같은 시대 성직자이자 역사학자인 제로니모 델 라 콴타나에 의해 확실하게 굳혀졌습니다.
펠리페 2세와 가까웠던 호요스가 오츠노의 전설에 눈을 돌린 것은 궁정을 마드리드로 옮긴 뒤인 1569년 왕비인 발루아의 이사벨이 세상을 떠난 게 계기였습니다. 그녀의 장례식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 푸에르타 세라다(세라다 문)라는 게 있었습니다. 너무 낮았던 이 문을 철거해야 장례식 행렬을 따르는 마차나 수레가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국왕의 지시로 푸에르타 세라다 철거 작업을 하던 도중 문의 벽에 용의 그림이 새겨진 게 발견됐습니다. 신기한 소식을 들은 호요스는 현장에 가서 용을 직접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그림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용은 과거 그리스인들이 문장에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BC 4세기 테베의 장군 에파미논다스는 군대 깃발에 용을 새겼습니다. 그가 건설한 모든 건물에도 용을 새겼습니다. 푸에르타 세라다에서 용이 발견됐다는 것은 마드리드가 그리스인에 의해 창건됐다는 대표적 증거라는 의미입니다.”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펠리페 2세는 호요스의 이야기를 더 확대 해석했습니다.
“용은 오츠노 비아노르가 사용한 방패에 새겨진 장식이었습니다.”
오츠노의 전설은 마드리드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덕분에 마드리드는 로마나 런던, 파리에 앞서 그리스 영웅이 세운 도시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17세기 중반까지 ‘마드리드를 창건한 사람은 오츠노’라는 전설은 기정사실처럼 굳어졌습니다.
여러 문서에는 오츠노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656년 페드로 테세이라가 제작한 지도에도 만투아 카르페아노룸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건축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라도 미술관과 마드리드 국립고고학박물관 사이에 푸에르테 데 알칼라라는 교차로가 있습니다. 이곳에 1559~1615년에 만들어진 개선문이 있습니다. 여기에 과거에는 오츠노의 흉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오츠노의 마드리드 창건 전설은 18세기부터는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사게 됐습니다. 각종 발굴조사에서 나온 자료를 살펴보고 지리학적으로 이것저것을 따져보니 앞뒤가 안 맞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만투아 카르페타노룸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마드리드만 남게 됐습니다.
마드리드 일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BC 2세기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히스파니아로 진격한 로마군이 마드리드 북쪽에도 몰려온 게 계기였습니다.
로마군이 간 곳은 카르페타니아였습니다. 로마에 앞서 이전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갔던 카르페타니 족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켈트족과 이베리아인의 혼혈인 켈티베리안의 일족이었습니다.
카르페타니아는 서쪽의 루시타니아나 켈티베리아 등으로 이동하는 로마군이 잠시 머무는 환승지점 역할을 했습니다. 히스파니아의 동서쪽을 연결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많은 병력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로마군 군단이 주둔하는 성채가 생겼습니다. 인근에는 로마식 빌라도 만들어졌습니다. 성채에서 거주하지 않는 병사들이 사는 집이었습니다. 이런 곳을 비쿠스라고 불렀습니다. 자급자족 능력을 가진 농촌형 저택이었습니다.
비쿠스는 대개 숲이 있는 강이나 도로 근처에 만들었습니다. 평지가 아니라 약간 높은 언덕이었습니다. 홍수가 발생하더라도 손쉽게 피할 수 있도록 그런 장소를 고른 것이었습니다.
숲 근처를 선택한 것은 땔감이나 사냥감을 쉽게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강 주변에 정착한 것은 농사에 필요한 농업용수와 로마인들이 좋아했던 목욕에 필수적인 물을 확보하는 동시에 식량으로 쓸 물고기를 잡으려는 게 이유였습니다.
비쿠스는 처음에는 일시적인 거주지에 불과했습니다. 병사들은 언제 전쟁터로 떠날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가 히스파니아를 완전히 제패한 뒤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장기 주둔하는 병사가 늘어났고, 제대한 뒤 현지여성과 결혼해서 아예 눌러앉는 병사도 생겼습니다. 나중에는 인근 마을에 살던 현지 주민들도 비쿠스에 들어와 살게 됐습니다. 여기에 사는 게 훨씬 안전하고 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쿠스는 서서히 마을로 변해갔습니다.
로마제국이 빛을 잃어가던 5세기 초 피레네 산맥을 넘어 여러 게르마니아 부족이 쳐들어왔습니다. 5세기 중엽에는 서고트족이 쳐들어왔습니다. 서고트족은 마드리드 북서쪽 세고비아 인근의 중앙고원지대인 메세타 센트럴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곳에는 사는 사람이 적어 영토를 두고 쓸 데 없이 싸울 필요가 없는데다 풀밭이 많아 가축을 키우기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는 없지만 7세기 무렵에는 오늘날의 알무데나 대성당 인근 칼레 데 세고비아(세고비아 거리)를 지나는 곳에도 마을이 존재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곳을 흐르던 산 페드로 개울 양쪽이었습니다. 그 마을은 마트리츠(Matríce)라고 불렸습니다.
주변에는 천연자원이 풍부했고 개울도 여러 곳 흘렀습니다. 접근하기도 좋았습니다. 서쪽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원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좋은 장소였습니다. 마을 남쪽에는 작은 예배당 또는 은둔지가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비잔틴제국에서 건너온 성모 마리아 조각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무데나 대성당이 자리 잡은 곳은 바로 이 예배당 자리였습니다.
8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온 이슬람은 9세기 중엽에는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코르도바의 에미르인 무함마드 1세는 톨레도 인근의 여러 마을에 연이어 성채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기독교가 겨우 버티고 있는 북쪽의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을 향해 공세를 펼칠 때 거점으로 활용할 생각이었습니다.
무함마드 1세가 873~886년 사이에 만든 여러 성채 도시 중 하나가 마드리드였습니다. 이곳은 고대 로마 시대에 로마군이 메리다~톨레도~사라고사 사이를 오가는 도로를 건설한 덕분에 지정학적 중요성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에미르가 카스티야나 레온으로 출정할 때 병력을 모으는 장소가 됐습니다.
이슬람 군대가 마드리드에 쌓은 성채는 만자나레스 강의 왼쪽 제방 일대에 있었습니다. 성채의 내부 면적은 8ha(약 2만 4천 평) 정도였습니다. 궁전으로 사용되는 알카사르와 알-무다이나라고 불렸던 외부 성채, 그리고 성 주변의 집들로 이뤄진 곳이었습니다. 객관적인 역사로 볼 때 오늘날의 마드리드는 이렇게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문서에 최초로 기록된 마드리드의 이름은 마즈리트(Maǧrīţ)였습니다.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을 때였습니다. 옛 카스티야어로는 마제리트(Magerit)였습니다.
1959년 아랍역사학자 겸 언어학자 아임 올리버 아신은 마즈리트는 ‘물길, 강바닥’을 의미하는 마즈라(maǧra)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maǧra에 ‘풍요’를 의미하는 라틴어 접미사 it가 붙은 게 ‘Maǧrīţ’라는 것입니다. ‘물이 풍부한 도시’라는 뜻입니다.
1960년 언어학자 조안 코로미네스는 다른 가설을 주장했습니다. 마즈리트는 마트리츠를 아랍어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아랍 점령기에 기독교와 무슬림은 알무데나와 라스 비스틸라스에 나뉘어 살았는데, 두 지역을 가르던 개울이 마트리츠였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