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샤트틀라른 수도원의 비극
10세기 무렵이었습니다. 훈족이 독일 바바리아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태우고 약탈했습니다. 수도원이나 성당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자르 강 인근의 하인리히 마을에 샤트틀라른이라는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많은 수도사가 농사를 지으며 종교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훈족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은 수도원에도 전해졌습니다.
“훈족은 수도원이나 성당도 약탈하고, 수도사나 목사도 인정사정없이 죽인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사할 수 있을까요?”
“우리 수도원은 제방 아래에 숨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피해를 면할 수 있을 겁니다.”
일부 수도사들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자위했지만 다른 수도사들은 불안에 떨었습니다. 수도원에 머물러 있다가는 몰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숲에 오두막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훈족이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대다수 수도사는 수도원에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매일 열심히 기도를 드리면 하느님이 구해주실 거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현실은 달랐습니다. 이자르 강까지 쳐들어온 훈족은 남아 있던 수도사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숲으로 달아난 수도사들은 끔찍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감히 수도원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숲의 오두막에 계속 숨어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병사들을 이끌고 와 훈족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수도사들은 그제야 숲에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수도원은 이미 불에 타고 부서져 폐허가 돼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해당한 수도사들을 묻어준 뒤 수도원을 새로 지었습니다.
수도사들이 오두막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은 금세 주변 마을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수도사들이 있던 곳’이라는 뜻의 ‘Vor den Mönchen(at the monks)’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름이 조금씩 바뀌더니 언젠가부터 뮌헨으로 변했습니다.
2. 하인리히가 세운 도시
샤트틀라른 수도원의 비극이 일어나고 200년 정도 지났습니다. 12세기 중엽이었습니다.
한 소년이 쾨니히슬루터의 카이저 돔 성당에 아주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옆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하인리히였습니다.
두 사람 앞에는 관에 담긴 시체 한 구가 놓여 있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이면서 여인의 남편인 하인리히 2세였습니다. 그는 작센 주와 바바리아 주를 통치하면서 ‘거만한 하인리히’로 불렸던 하인리히 2세 공작이었습니다.
벨프 가문의 수장이었던 그는 적과의 전투를 준비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숨졌습니다. 독살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병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인리히 주변에는 온통 적뿐이었습니다. 엄청난 정치권력과 재산을 가진 아버지를 잃은 열 살짜리 어린이를 동정하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스물넷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독일의 초대 국왕인 콘라드 3세는 하인리히 2세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는 정적의 죽음을 이용해서 벨프 가문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이제 겨우 열 살에 불과한 어린 아이에게 많은 백성이 살고 있는 지역을 맡길 수 없다. 작센 주는 알브레흐트에게, 바바리아 주는 루이트폴트에게 넘겨주도록 하겠다.”
하인리히는 나이에 비해 매우 영민한 아이였습니다. 아버지를 꼭 빼닮은 그는 상황 분석력과 판단력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배짱도 두둑했고 용기도 넘쳐났습니다. 그는 콘라드 3세를 찾아가 꼼꼼하게 따졌습니다.
“비록 어리지만 저는 법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하인리히 2세의 적통입니다. 나이를 빌미삼아 제가 물려받아야 할 영토를 엉뚱한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전례를 만드시면 이제 겨우 두 살에 불과한 전하의 아들에게 같은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사람들이 전하의 아들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콘라드 3세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하린히리의 말은 하나도 틀린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3년 뒤 작센 주와 바바리아 주를 겨우 열세 살에 불과한 하인리히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하인리히는 나라를 아주 잘 다스렸습니다. 두 지역을 독일에서 가장 부유하고 튼튼한 곳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먹고 먹히는 냉혹한 정치 현실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인리히는 어느 날 레히 강 너머 지역을 살펴보다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비옥한 땅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큰 관심을 끌지 못해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여기는 어떤 땅인가?”
“옛날에 수도사들이 숨어 살았다고 해서 뮌헨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하인리히는 언덕에 올라가서 주변을 쭉 둘러보았습니다. 이자르 강 양쪽에 넓은 숲과 평원, 그리고 적당한 산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여기에 도시를 만들고 이자르 당에 다리를 만들면 굉장한 이득을 챙길 수 있겠구나!’
하인리히는 다음날부터 공사를 시작해 며칠 만에 강에 나무다리를 놓았습니다. 강 건너편에는 충분한 공간을 두고 도랑을 파고 성벽을 쌓았습니다. 성 안에는 그가 지낼 수 있는 별장을 만들었습니다. 또 시장도 조성했습니다.
다리와 시장이 새로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매일 시장에서 팔 물건을 손에 하나씩 들고 다리를 건넜습니다. 하인리히는 그들로부터 다리를 지날 때마다 통과세를 받고, 물건을 사고 팔 때마다 세금을 걷어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하인리히가 영지에 다리를 놓아 큰돈을 벌자 심술을 부리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 지역 신도들을 포괄하던 프라이징 교구의 오토 주교였습니다. 그는 시종들에게 다리를 부숴버리라고 했습니다. 시종들은 주저했습니다.
“주교님, 지역 영주이신 하인리히께서 세운 다리입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내가 책임질 터이니 상관없다. 너희들은 부수기만 하면 된다.”
오토 주교는 끝내 다리를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프라이싱 인근에 새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다리를 이용하면서 통행료를 내라고 했습니다.
하인리히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사람들은 오토 주교의 다리 대신 하인리히의 다리를 계속 건너다녔습니다. 그곳이 훨씬 가깝고 편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화가 난 오토 주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레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를 찾아갔습니다.
“하인리히 공은 교회의 정당한 수입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황제는 뜻밖에도 하인리히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인리히 공작은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네.”
오토 주교뿐만 아니라 프라이징 교구에 취임한 여러 신부들도 바르바로사에게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황제는 그들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인리히에게 조금이나마 양보하라고 권했습니다.
“어차피 교회와 같이 가야 할 처지 아닌가. 자네가 조금 손해를 보게나. 프라이징 주교에게 자네가 버는 돈의 3분의 1만 주도록 하게나.”
하인리히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벌 돈은 무한정이니 그 정도쯤은 떼어줘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인리히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다리를 오가는 사람은 해마다 늘어났습니다. 게다가 다리 건너편에 마을까지 생겼습니다. 처음에 작던 마을은 점점 커져 인근 지역은 물론 바바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당연히 하인리히가 챙길 수익도 그만큼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을 ‘독일의 로마’라고 불렀습니다.
프라이징의 주교들은 새로 생긴 도시의 번성에 배가 아팠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없애버리기 위해 갖은 수작을 다 동원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새 마을에는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 여러 곳 만들어졌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프라이징의 주교들도 이 도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뮌헨의 문장을 보면 도시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수도사가 성문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그 위로 성탑이 두 개 보이고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수도사는 도시의 이름을 선사한 수도사들을 상징하고, 사자는 하인리히의 별명이 ‘사자공’이었던 데에서 따온 것입니다.
3. 4천 년 역사 가진 뮌헨
뮌헨 창건과 관련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두 가지 이야기가 엮여 있습니다. 둘 중에서 수도사 부분은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전설입니다. 사자공 하인리히 부분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전설과 과장이 덧붙여진 것입니다.
뮌헨이라는 이름이 수도원에서 나온 것이라면 도시가 창건되기 전에 이곳에 수도사 거주지가 존재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곳이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뮌헨은 도시가 생기기 전에, 승려 주거지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사용하던 이름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수도사 주거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중세부터 뮌헨의 이름은 라틴어로 모나쿰(Monacum)이었습니다. 모나키아(Monachia), 모나키움(Monachium)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발음은 영 다르게 들리지만 철자를 잘 살펴보면 뮌헨과 비슷합니다.
수도사 전설 이전부터 뮌헨 일대에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것도 4천 년 전부터였습니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 신석기 말기이던 BC 2천 년 무렵 뮌헨 일대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다른 조사에서는 청동기 시대 무렵 이자르 강변에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확인됐습니다. 소규모로 여러 농장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2014년 조사에서는 3천 년 전, 그러니까 BC 1천년 무렵의 무덤이 유명 관광지인 레지덴츠 지하에서 발굴됐습니다. 무덤에서는 여자 유해가 나왔습니다.
BC 3~4세기에는 켈트족이 성채를 갖춘 도시 형태의 마을을 이뤄 살았습니다. 뮌헨 북쪽 만싱 에서는 성채형 도시인 오피디움을 이뤄 살았습니다. 인구는 5천~1만여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뮌헨의 외곽인 아우빙거 로에, 랑비드, 펠트모힝, 펠락에도 켈트족이 거주했습니다.
그러다 BC 50년 무렵 뮌헨 일대의 거주지 대부분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만싱은 폐허가 됐습니다. 켈트족이 왜,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가설이 난무하지만 아직 아무도 이유를 정확히 모릅니다.
로마 제정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바바리아 지역에 켈트족이 다시 살게 됐습니다. 라이티아라는 로마 제국의 속주였습니다. 속주 수도는 빈델리노쿰, 오늘날 아우크스부르크였습니다.
이 시절 로마인의 무덤 유적이 아우빙, 엥글샬킹, 데닝 등에 남아 있습니다. 데닝에는 로마 시대 빌라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프라이햄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했더니 로마 시대에 사용하던 큰 오븐 두 개가 온전한 상태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도로 두 개가 이자르 강을 지나 뮌헨 주변을 지나갔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와 잘츠부르크를 연결하는 도로였습니다. 하나는 남쪽 그룬트발트를 지나는 비아 율리아였고, 다른 하나는 북쪽 운터푀링을 지나는 도로였습니다. 북쪽 도로는 나중에 근대도시 뮌헨 창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제 사자공 하인리히와 프라이싱 주교의 갈등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700년 무렵 아길롤핑겐 공작이 프리싱가 근처 산에 궁전을 지었습니다. 바바리아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인 프라이징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긴 역사 덕분에 프라이징 교구의 주교는 역대 바바리아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서 우대를 받았습니다.
903년 프라이징 주교 발도는 오늘날 뮌헨 북서쪽 푀링에 있던 시장을 차지했습니다. 인근에 있던 이자르 다리도 장악했습니다.
프라이징 주교는 잘츠부르크에서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어지는 북쪽 도로를 통해 펼쳐지던 소금 무역상에게서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세금 수입은 엄청났습니다. 903년 프라이징 대성당이 소실된 적이 있는데, 온전히 소금 세금으로 재건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바비라아 주를 키우는 데 여념이 없었던 하인리히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재산이 많아야 대신들과 병사들에게 월급을 제대로 줄 수 있고, 권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설에는 하인리히가 다리를 먼저 만들었고 프라이징 주교가 심술을 부리면서 부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프라이징 주교가 다리를 만들어 세금을 걷고 있을 때 하인리히가 그 다리를 부수고 인근에 새 다리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꾼인 주교가 만든 다리를 부수고 세금을 빼앗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아무리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라도 매우 곤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반대되는 내용의 전설이 만들어졌을 겁니다.
프리드히리 1세는 프라이징 주교와 하인리히를 중재해 1158년 6월 14일 ‘아우크스부르크 협약’을 맺었습니다. 뮌헨이라는 이름이 공식 문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 협약 문서였습니다. 문서에 분쟁을 빚은 지역 이름이 나옵니다. 바로 ‘포룸 아푸드 무니첸(forum apud Munichen)’였습니다.
뮌헨의 도시 창건 기념일은 1158년 6월 14일입니다. 공식 문서에 뮌헨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온 날을 기념일로 정한 것입니다. 결국 뮌헨은 하인리히와 프라이징 주교 사이의 권력 투쟁이 낳은 산물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