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의 일이었습니다. 수천 년 전이었을 겁니다. 아시아에 작은 왕국이 있었습니다. 북쪽으로는 큰 산맥이 가로막혀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가 놓여 있었습니다. 북쪽의 산맥 사이로 두 개의 큰 강이 흘러 물을 공급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했던 왕국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왕국에 큰 홍수가 났습니다. 물이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국에 살던 사람들은 새 땅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국을 다스리던 님로드는 큰 건물을 지어 새 도시를 세웠습니다. 웅장한 피라미드도 건설했습니다. 앞으로 홍수가 나지 않게 해달라며 신에게 바치는 신전이었습니다. 그는 대단한 전사였습니다.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영토를 북쪽과 동쪽으로 넓혔습니다. 백성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습니다.
님로드는 왕비 에네스에게서 두 아들 훈노르, 마조르를 얻었습니다. 그는 두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냥을 갈 때는 늘 데리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두 아들과 함께 사냥을 나간 님로드는 굉장한 사냥감을 발견했습니다.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는 큰 뿔을 가진 거대한 사슴이었습니다. 그는 두 아들에게 경험을 쌓을 기회를 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놈을 쫓아가거라.”
훈노르와 마조르는 당장 사슴을 쫓아갔습니다. 사슴은 황야를 거쳐 초원을 지나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황혼이 질 무렵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두 왕자는 풀밭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다시 사슴을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사슴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두 왕자는 다시 추격전을 벌였습니다. 사슴은 낯선 땅을 지나더니 아젬 산맥을 넘었습니다. 메티오스의 거친 습지도 지나갔습니다. 나중에는 아름답고 비옥한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호수로 뛰어들더니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훈노르와 마조르가 간 곳은 세 방향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습지인 곳이었습니다. 그 너머에는 큰 땅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새와 물고기 외에 각종 사냥감이 풍부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습지가 가로막고 있어 건너가기는 힘들었습니다.
훈노르와 마조르는 사슴을 놓쳐 화가 났지만 할 수 없이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둘은 아버지에게 간청했습니다.
“사슴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면서 고민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사원을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님로드는 두 아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사원을 건설했습니다.
훈노르와 마조르는 그곳에 머물면서 5년 동안 명상을 하고 공부도 했습니다. 둘이 사원에 들어간 지 6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위대한 스승이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둘은 스승에게서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어느 날 훈노르와 마조르는 사슴이 사라진 지역 근처를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새벽 무렵 이상한 음악소리가 들렸습니다. 둘은 소리를 따라 갔습니다. 숲에서 두 여인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사슴에게 바치는 뿔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두 여인은 인근 지역을 다스리던 왕 둘라의 딸이었습니다.
훈노르와 마조르는 두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사슴이 사라진 호수 인근에 집을 지어 정착했습니다. 그들의 후손은 오랫동안 번창했습니다. 나중에는 스키타이의 108개 부족을 이루게 됐습니다. ‘108’은 불교에서 아주 신성한 숫자였습니다. 스키타이 부족은 불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다시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마곡 왕이 스키타이의 여러 부족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손자입니다. 그가 왜 훈노르와 마조르가 정착한 스키타이를 다스리게 됐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곡의 후손 중에 이기에크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하의 딸인 에메세와 결혼했습니다.
에메세는 결혼식을 치른 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서 거대한 새가 날아오더니 몸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거대한 분수가 자궁에서 솟아올라 서쪽으로 흘렀습니다. 물살은 점점 더 커졌고 나중에는 큰 강이 됐습니다. 강은 산을 덮고 있던 눈을 녹여 아름다운 저지대로 흘러갔습니다. 저지대에서 황금 가지를 가진 신기한 나무 한 그루가 자랐습니다.
에메세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처음 보는 낯선 곳의 풍경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를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수리 투룰의 정령이 왕비에게 아들을 잉태하게 해 주었다.”
에메세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아기에게 알모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헝가리어로 알모스는 ‘꿈꾸는 자’라는 뜻입니다.
알모스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사자처럼 날씬하고, 나무처럼 컸으며, 쾌활하고 친절했으며, 지혜가 흘러넘치는 젊은이가 됐습니다. 전쟁에서는 매우 용감하고 대담한 전사였습니다.
알모스는 스키타이 여러 부족의 지도자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력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중요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습니다.
알모스는 유명한 가문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아르파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아르파드가 성인이 됐을 때 스키타이에 살고 있던 여러 부족의 인구는 크게 늘어난 상태였습니다. 농사를 지을 땅이 모자라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게 힘들어질 정도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카서스 산맥 쪽에서 난민들이 밀려들었습니다.
‘스키타이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 새로운 땅을 찾아 새 나라를 열어야 해.’
아르파드는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일곱 부족 족장이 그를 따라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자르, 카리, 카시, 제노, 쿠르트 지아마트, 니에크, 타르얀 족이었습니다.
일곱 부족장은 낯선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한 명의 지도자 아래 뭉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아르파드를 지도자로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왕으로 모실 것입니다. 당신이 이끄는 길이라면 어디든 따라갈 것입니다.”
일곱 족장은 아르파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새 연맹체에 헌신을 다짐하는 서약식을 거행했습니다. 손가락을 잘라 피를 뽑아 항아리에 담았습니다.
“왕에게 피의 맹세를 바칩니다. 우리와 우리의 후손은 아르파드 왕과 왕의 후손이 이끄는 길을 따라갈 것입니다. 왕에게 불충하고 불화를 일으키는 자의 몸에서는 피가 솟구쳐 나올 것입니다. 누구라도 맹세를 어긴다면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아르파드는 여유를 갖고 오랫동안 철저하고 꼼꼼하게 긴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모든 게 만족스럽게 갖춰진 뒤에야 조심스럽게 스키타이를 떠났습니다. 나중에 헝가리 사람들은 일곱 부족이 떠난 고향을 ‘헤투마자르’라고 불렀습니다.
아르파드 일행은 여러 강 사이에 놓여 있는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옛 헝가리어로는 아틸-코즈라고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아틸은 ‘큰 강’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7년 동안 살았습니다.
아르파드는 아틸-코즈를 최종 정착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더 나은 땅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늘 주변 지역을 물색하고 다녔습니다.
드디어 오래 전부터 신이 약속한 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때는 896년이었습니다.
아틸-코즈에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오래 전 아르파드의 할머니인 에메세의 꿈에 나타났던 투룰이었습니다.
아르파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투룰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습니다. 새는 아름다운 검 한 자루를 입에 문 채 천천히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투룰은 신의 계시를 받을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아르파드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습니다. 아래로 내려와 아르파드의 얼굴 옆을 스치듯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투룰은 갑자기 큰 울음소리를 내더니 아르파드의 머리 위를 빙빙 맴돌았습니다. 그러더니 천천히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뒤를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마치 따라오라고 신호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아르파드는 말을 타고 투룰을 따라갔습니다. 한참동안 날아가던 새는 아르파드가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낯선 땅에 물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아르파드의 머리를 빙빙 돌면서 크게 울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르파드는 새가 검을 버린 땅을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가운데로 큰 강이 흐르고 있고, 한쪽에는 높은 언덕이 있었습니다. 맞은편에는 너른 평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틸-코즈로 돌아간 아르파드는 일곱 부족장에게 투룰이 인도해준 땅과 할머니 에메세가 꾸었다는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꿈에 독수리가 나타나 할머니 몸에 들어갔습니다. 오늘 나타난 독수리가 바로 그 새입니다.투룰이 그곳에 검을 떨어뜨린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땅을 영토로 삼으라는 할머니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거기로 이주해서 영원한 번영을 누리도록 합시다.”
아르파드는 투룰이 안내한 땅으로 일곱 부족을 데리고 가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는 싸움도 잘 했지만 능력 있는 외교 협상가이기도 했습니다. 주변에 있던 여러 부족과 싸우거나 동맹을 맺어 세력을 키웠습니다. 뒤늦게 서쪽에서 따라온 스키타이의 친척 부족도 흔쾌히 받아들여 인구를 늘렸습니다.
아르파드와 일곱 부족이 정착한 곳은 바로 오늘날의 부다페스트였습니다. 헝가리 사람들은 아르파드가 정착한 896년을 헝가리 건국 원년이라고 믿습니다.
헝가리족의 기원은 우랄 산맥과 시베리아 인근에서 시작했다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들의 언어에 흔적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BC 500~AD 900년까지 거의 1천 년 이상 그곳에서 살던 여러 부족 중에서 우그리 족이 남쪽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들이 헝가리 족의 시작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그리 족은 우랄 산맥 남쪽, 카스피 해 북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전설에 나오는 훈노르와 마조르가 정착한 스키타이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우그리 족은 이곳에서 볼가-투르크 족과 합류했습니다. 볼가 족은 중앙아시아에 기원을 둔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헝가리 건국 전설의 첫머리에 나오는 ‘아시아 왕국’이라는 표현은 볼가 족을 뜻하는 흔적으로 보입니다. 초기 헝가리 족인 우그리 족과 볼가-투르크 족은 반(半)유목 기마민족이었습니다. 원시 수준의 농사도 지었고 가축도 길렀습니다.
9세기 무렵 이들 중 10개 부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스키타이를 떠나 카르파티아 평원에 정착했습니다. 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돈 강과 도나우 강 사이에 있는 서쪽의 흑해 인근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에텔코즈라고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카르파티아 평원에서는 아바르 족, 동프랑크 왕국, 불가리아, 슬라브 족의 불편한 동거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헝가리 족이 평원으로 몰려든 것은 이런 정치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헝가리 족은 튼튼한 군사조직을 바탕으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동시에 이웃 나라들과 교역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슬라브 족을 공격해 주민들을 붙잡아 비잔틴 제국에 노예로 팔기도 했습니다.
이때 터키 일대에 살던 유목민족인 페체네스 족이 동쪽에서 밀려왔습니다. 서쪽에서는 불가리아 왕국이 압박을 주었습니다. 10개 부족 연합체였던 헝가리 족은 두 지도자인 아르파드와 카자르 칸(또는 쿠르스잔)을 따라 에텔코즈를 떠나 오늘날 루마니아를 남북으로 길게 가르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갔습니다.
헝가리 족이 이주한 것은 헝가리 건국 원년이라는 896년이었습니다. 9년 뒤 쿠르스잔이 세상을 떠나자 아르파드는 혼자 나라를 다스리게 됐습니다. 이 덕분에 그는 오늘날 ‘헝가리를 건국한 영웅’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아르파드는 전설에만 나오는 인물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도 실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0개 부족을 통합한 알모스의 아들이었습니다.
역사학자 귤라 크리스토에 따르면 아르파드는 845년 무렵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보리’를 뜻하는 헝가리어 ‘아르파(árpa)’에서 나왔습니다. 이 단어의 기원은 터키어입니다.
카르파티아 산맥을 함께 넘어간 쿠르스잔은 왕이었고, 아르파드는 신성한 지도자를 뜻하는 ‘켄데’였거나 군사 지도자인 ‘귤라’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인생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분분합니다. 자료에 따라 정보가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비잔틴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재임 913~59년)가 아르파드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헝가리인은 아르파드 이전에는 군주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르파드는 훌륭한 군주였다’고 말했습니다.
헝가리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민족은 마자르 족입니다. 마자르라는 이름은 10개 부족 중에서 가장 큰 부족의 명칭에서 딴 것으로 보입니다. 헝가리라는 이름은 터키어로 ‘화살 10개’를 뜻하는 오구르(ogur)가 슬라브 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오구르는 헝가리를 세운 10개 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다라는 지명은 고대 아퀸쿰에 있던 로마 정착촌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아퀸쿰은 89년 도나우 강 서안, 지금의 오부다 지역에 있던 성채입니다. 부다는 2~4세기에는 로마 속주인 저지 판노니아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오부다 섬에 지어진 속주 총독 저택에 황제들이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부다에서 『명상록』의 상당부분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헝가리 중세 연대기』에 다르면 부다라는 지명은 훈족의 수장 아틸라의 동생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가설은 슬라브어 ‘물’을 뜻하는 보다(voda)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퀸쿰이라는 이름이 켈트어로 ‘물’과 관련된 뜻을 가지고 있는 데에서 나온 가설입니다.
로마 제국이 힘을 잃은 4세기,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이 판노니아로 밀려 왔습니다. 12세기에 쓴 것으로 알려진 중세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등에 따르면 아틸라는 부다 지역에 에텔부르크라는 성을 쌓았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헝가리에 정착한 아르파드는 ‘아틸라의 도시’였던 부다 성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주변 지역을 한눈에 다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지리적 위치가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페스트라는 이름의 기원도 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2세기 수학자 겸 천문학자, 지리학자인 프톨레미우스가 쓴 『지리』를 보면 로마의 성채였던 콘트라-아퀸쿰을 패션(Pession)이라고 표기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페스트의 시작이라고 추정합니다.
대다수 학자들은 페스트가 고대 헝가리어로 ‘화로’를 뜻하는 단어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부다 지역에는 온천으로 유명한 겔레르트 언덕이 있습니다. 이곳을 먼 옛날에는 페스트 언덕이라고 불렀습니다. 뜨거운 용암이 나오는 동굴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언덕 아래의 도나우 강 도하지점이 페스트라는 이름을 얻게 됐습니다. 세월이 더 흐르자 강 건너편 촌락에도 페스트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언덕의 이름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간 셈입니다.
부다와 페스트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부다는 왕궁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페스트는 당시 무역과 통상이 이뤄지는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의회는 현재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에 있었습니다. 브라티슬라바는 당시에는 헝가리 영토였습니다.
1848~49년 헝가리혁명 중에 부다와 페스트를 합쳐 하나의 도시로 만들어 헝가리의 수도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두 지역의 통합을 주도한 정치인은 세체니 다리를 만든 세체니 이슈트반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헝가리 정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헝가리의 첫 민주정부였던 바타니정권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부다와 페스트, 오부다를 합쳐 새로운 도시를 만듭시다. 그래야 헝가리가 치열한 유럽의 정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헝가리의 정치인, 기업인, 문화예술인, 평범한 국민 모두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부다와 페스트에 사는 주민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처음에는 양쪽 모두 반발했습니다. 두 지역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별개의 도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페스트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문화, 정치적으로 급성장하는 도시였습니다. 유럽에 퍼지고 있던 다양한 근대적 변화를 제대로 따라잡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반면 부다는 왕궁이 있다는 점만 빼고는 아주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재정 문제도 심각했고, 시민들의 생활수준은 페스트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두 도시가 통합에 반대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부다는 오랫동안 누려왔던 ‘정신적 수도’의 역할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페스트는 통합 이후 생길지 모르는 경제적 어려움을 걱정했습니다.
두 도시의 태도를 바꾼 결정적 계기가 발생했습니다. 역사에서 수없이 배웠듯이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 결국 부다와 페스트는 통합에 동의했습니다. 1849년 봄 공식 통합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관건은 통합 수도의 새 이름이었습니다. 세체니는 페스트라는 이름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페스트라는 이름은 악명 높은 역병 페스트를 연상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새 도시를 페스트라고 부른다면 외국인들이 얼마나 놀릴지 걱정됩니다.”
페스트 시민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페스트의 원래 뜻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화로’였습니다. 게다가 헝가리 발음으로는 페스트가 아니라 페슈트였습니다.
도시 이름을 어떻게 정할지를 놓고 다시 수년간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여러 개의 새 이름이 제안됐습니다. ‘매혹의 정원’이라는 뜻을 가진 바케르트, ‘다뉴브의 진주’라는 의미인 두나지욘기예 등이었습니다. 헝가리의 옛 조상인 훈족을 상징하는 ‘훈족의 성’이라는 뜻인 훈바르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논쟁 끝에 새 도시 이름을 ‘페스트-부다’로 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페스트 인구가 부다보다 많은데다 경제적으로도 더 큰 도시였기 때문에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에는 실용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도에 이름을 표시할 경우 애매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다페스트에 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부다는 왼쪽에, 페스트는 오른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도시의 이름과 지도상의 위치가 상반됐던 것입니다.
결국 헝가리는 10년 뒤 새 도시 이름을 다시 바꾸기로 했습니다. 바로 부다-페스트였습니다. 이때는 1873년 11월 17일이었습니다. 통합 당시 부다의 인구는 5만 명, 페스트의 인구는 20만 명, 오부다의 인구는 1만 6천 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