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관 선거 시기가 다가왔을 때 아이밀리우스는 진지에 남아 있었다. 그는 치욕적인 참패를 당한 채 로마로 돌아가는 걸 부끄러워했다. 전투에서 많은 병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동료는 진지에 정예병을 남겨두고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민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전직 집정관 중에서 새 집정관을 뽑자고 제안하는 걸 꺼렸다. 자발적으로 입후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민중은 그들을 선출하기를 원했다. 그는 백인대 민회를 소집해 공직을 원하던 사람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했다.
원로원이 골라 공직 출마를 지시한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다. 민중에게는 인기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듬해에 선출된 사람은 선거를 실시한 집정관의 동생인 카이소의 아들 마르쿠스 파비우스와 카시우스를 기소해 사형당하게 한 마르쿠스의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였다.
이들은 취임하자마자 새 병력을 동원해 볼스키와의 전쟁에서 지친 병사들을 대체하기로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 백인대의 구멍을 메우자는 것이었다. 원로원의 허가를 얻은 그들은 평민에게 정해진 날에 입대 등록을 지시했다.
로마 전역에서 큰 혼란이 일어났다. 평민들은 선동적인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원로원의 칙령에 따르지 않겠다고 거부했고, 집정관의 권한에도 복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두 집정관이 토지 분배와 관련해서 그들과 맺은 약속을 어겼다는 게 이유였다. 많은 사람이 호민관들에게 몰려가 배신자라고 몰아붙였다. 그리고 호민관들의 지지를 요구했다.
호민관 대부분은 전쟁이 일어난 지금은 내부의 증오를 불태우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인 가이우스 마에니우스는 뜻이 달랐다.
“나는 평민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두 집정관이 공공토지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원로원이 토지 분배 법령을 만들어 평민회에 제출하지 않는 한 군대 소집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두 집정관은 가이우스의 반대에 법으로 맞섰다. 그들은 마르스 평원에 나가 장군 의자를 설치했다. 그곳에서 병사 등록을 받을 뿐만 아니라 법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매겼다. 인신을 구속하는 건 그들의 권한 밖이었다. 불복종하는 평민이 땅을 갖고 있으면 그 땅을 황폐화시키고 시골집을 부수기로 했다. 그들이 남의 땅을 소작하는 농부라면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는 소의 멍에는 물론 짐을 부리는 가축도 빼앗기로 했다. 땅을 경작하고 곡식을 수확할 때 쓰는 모든 도구도 마찬가지였다.
징병에 반대한 가이우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호민관의 관할권은 성벽 안으로 한정돼 있어 도시 밖에서는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로마에서 나가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불법이었다. 딱 한 가지 경우에만 예외였다. 로마의 모든 행정관이 알바 산에 올라 라틴족을 대신에 유피테르 신에게 공통의 제물을 바칠 때였다. 호민관이 도시 밖에서는 아무런 권한도 누릴 수 없다는 관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호민관에게서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됐기 때문에 평민은 무모한 행동을 자제하게 됐다. 그들은 징병관에게 가서 신성한 맹세를 하고 등록했다. 여러 백인대의 빈틈이 메워졌을 때 두 집정관은 추첨으로 군단 지휘권을 나누었다. 파비우스는 동맹도시를 지원하러 가기로 했고, 발레리우스는 볼스키 영토에 진주한 로마군과 새로 선발한 병사들을 맡기로 했다.
발레리우스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볼스키는 다른 부대를 보내 더 유리한 장소에 진지를 차리기로 했다. 더 이상 로마군을 무시하느라 무책임한 위험에 노출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로마군과 볼스키군 장군은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공격받으면 참호를 보호하지만 적군을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양측 군대가 식량이나 그밖에 필요한 물자를 구하러 파견대를 보낼 때마다 충돌이 빚어졌고 작은 싸움이 일어났다. 승리는 항상 같은 쪽에 돌아가지 않았다. 적지 않은 병사가 죽거나 다쳤다.
로마군은 더 이상 병력을 보강할 수 없어 손실을 메울 수 없었지만 볼스키군은 수시로 병사는 물론 장군이 도착함으로써 병력을 더 키웠다. 볼스키는 여기에 고무돼 진지에서 출정하기에 이르렀다.
로마군도 나와 진열을 정비했다. 곧바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기병뿐만 아니라 보병과 경무장 보병까지 다 싸웠다. 모두 똑같은 열정, 경험을 발휘했다. 양측은 서로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양측의 사망자는 엄청난 수에 이르렀다. 겨우 살아남은 병사는 죽은 사람보다 많았다. 계속 싸우는 병사는 몇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조차 전투를 이어갈 수 없었다. 창이 연이어 박히는 바람에 방패를 들고 있을 수도 없었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검은 날이 무디어져 거의 부서지다시피 했다.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하루 종일 싸우느라 힘줄이 풀리고 주먹도 약해졌다.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서 싸우느라 땀을 많이 흘려 기진맥진한데다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팠다.
치열했던 전투는 끝이 났다. 양측 장군은 철수를 명령했다. 그리고 진지로 돌아갔다. 어느 측도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드러 누워 상대방의 동태만 주시할 뿐이었다. 어느 쪽 보급품이 언제 떨어지는지만 살폈다.
당시를 다룬 여러 기록에 따르면 로마 병사들은 상대를 제압할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용감하게 싸우기를 꺼렸다고 한다. 이유는 토지 배분 문제에 있어 속임수를 펼친 귀족에 대한 반감과 집정관에 대한 증오였다. 군인들이 동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집정관이 전투 지휘 능력이 부족하다고 돼 있다.
로마에서는 신의 분노를 상징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거나 이상한 장면이 나타났다. 조점관들과 다른 종교 해설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로마인들이 전통적인 의례를 아주 순수하고 신성한 방식으로 제대로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신들이 분노했다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이 엄밀하게 조사를 실시했다. 폰티프 신관들에게 주어진 최종 결론은 ‘신성한 불을 지키는 신녀 중 하나인 오피미아가 순결을 잃어 신성한 의식을 더럽혔다’는 것이었다.
폰티프 신관들은 고문과 다른 증거를 통해 이 정보가 사실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들은 그녀의 머리에서 모자를 벗겼다. 그녀를 끌고 가 성벽 안에 산 채로 묻었다. 그녀를 건드린 사람은 두 명이었다. 그들은 공공장소에서 매질당한 뒤 사형 당했다. 이렇게 하자 희생제례와 조점은 다시 우호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신이 로마에 대한 분노를 푼 것 같았다.
선거철이 되자 두 집정관은 로마로 돌아왔다. 누가 행정관을 맡을 것인가를 두고 평민과 귀족 사이에 심각한 갈등과 마찰이 일었다. 귀족은 열정이 넘치고 평민에 덜 우호적인 젊은이를 집정관 자리에 앉히려 했다. 그들의 지시에 따라 평민의 가장 큰 적으로 알려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아들이 출마했다. 그는 거만하고 무모한 사람이었다. 친구와 클리엔테스가 많아 그의 나이 또래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평민들은 과거에 합리적인 면모를 보여준 나이든 사람 중에서 인물을 지명했다. 행정관(집정관과 호민관)은 분열돼 있었고 상대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에만 몰두했다.
두 집정관이 집정관 후보를 발표하기 위해 민회를 소집했다. 호민관은 개입권을 이용해 민회를 해산시켰다. 호민관이 집정관을 선출하기 위해 평민회를 열면 백인대 민회를 열 권한을 가진 두 집정관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집정관들과 호민관들 사이에 상호 비방전이 벌어졌고 끊임없이 충돌이 발생했다. 양측 모두 당파를 결집시켰고, 결국 분노의 주먹을 주고받았다. 혼란은 무장 충돌 일보직전에서 겨우 멈추곤 했다.
원로원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오랫동안 숙고했다. 평민에게 양보하라거나 굴복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원로원에서 가장 강력한 주장은 선거를 위해 독재관을 옹립하자는 것이었다. 이 권력을 가지는 사람은 로마에서 말썽꾸러기를 추방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전직 집정관들에게서 실수가 발견되면 바로잡고, 원하는 대로 정부 형태를 갖춘 뒤 최고의 인물에게 집정관 자리를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좀 온건한 견해는 나이가 많고 존경받은 의원을 인테르렉스로 임명해 선거를 책임지게 하자는 것이었다. 과거에 왕이 서거하면 선거를 실시하던 방식이었다. 이 견해가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아울루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가 인테르렉스로 지명됐다. 다른 모든 행정관의 권한은 정지됐다.
셈프로니우스는 아무런 마찰 없이 며칠 동안 로마를 다스린 뒤 관례에 따라 다른 인테르렉스를 지명했다. 스푸리우스 라르키우스였다. 그는 백인대 민회를 열어 재산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 집정관을 뽑았다. 양측의 동의를 얻어 평민에게 우호적인 가이우스 율리우스가 두 번째로 집정관에 당선됐다. 또 귀족파에 속하는 퀸투스 파비우스도 뽑혔다.
평민은 퀸투스가 전직 집정관일 때 고통을 겪었지만 아피우스를 더 싫어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에게 집정관 권한을 넘겨주었다. 그들은 아피우스가 명예를 빼앗긴 걸 보고 매우 즐거워했다.
두 사람이 집정관일 때 아이퀴가 도적떼처럼 꾸며 라틴 도시들의 국경을 침범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을 노예로 붙잡았고 많은 가축을 끌고 갔다. 베이이는 로마 영토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원로원은 아이퀴를 상대로 하는 전쟁은 다음에 치르기로 결정했다. 베이이에게는 보상을 요구하기로 했다.
첫 출격에서 재미를 본 아이퀴는 침범을 막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더 대담해졌다. 그들은 단순히 약탈을 위한 출정은 멈추기로 했다. 대신 대군을 이끌고 오르토나로 진군해 도시를 점령했다. 도시와 농촌에서 약탈 행위를 저지른 그들은 많은 전리품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갔다.
베이이는 ‘로마를 약탈한 사람들은 베이이와는 관련이 없고 다른 에트루리아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답을 보냈다. 그리고 로마에 어떤 보상도 하지 않겠다고 답변했다.
베이이에 다녀오던 로마 사절은 로마 영토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베이이 사람들과 마주쳤다. 원로원은 사절로부터 이런 사실을 보고받은 뒤 베이이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두 집정관은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물론 전쟁 선포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전쟁에 반대하면서 평민에게 토지 분배를 상기시켰다. 원로원이 4년 전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평민은 헛된 희망만 품었을 뿐 속았다고 말했다. 또 그들은 ‘에트루리아 모든 부족이 동포를 도울 경우 대대적인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평민은 스푸리우스 라르키우스의 조언에 따라 원로원의 전쟁 결의를 받아들였다. 두 집정관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 베이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진지를 꾸렸다. 여러 날이 지났지만 베이이는 군대를 이끌고 나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로마군은 베이이 영토를 약탈한 뒤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