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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24. 2024

마리 앙투아네트와 콩시에르주리


1793년 1월 21일 밤. 마리 앙투아네트 왕후는 프랑스 파리 인근 ‘템플 프리즌’의 조그마한 독방에서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앉았다. 감방에 갇힌 이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이날따라 특히 음식을 전혀 입에 댈 수 없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루 종일 가슴이 뛰면서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러지? 루이 16세 전하와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마리 앙투아네트의 남편 루이 16세가 1792년 ‘10월 8일 사건’으로 국왕 자리를 뺏기고 혁명의회로부터 반역죄를 저질렀다며 사형 선고를 받은 이후, 그녀의 가족은 템플 프리즌에 수감됐다. 다들 한 방에 모인 게 아니라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는 물론 어린 아들 루이 샤를, 딸 마리 앙투아네트 테레사 모두 독방에 갇혔다.


“왕후마마.”


마리 앙투아네트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누군가 감방 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문에 달린 조그마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이곳에 온 이후 일요일마다 그녀의 가족을 위해 미사를 열어주던 에지워스 신부였다. 그가 이렇게 늦은 밤에 감방으로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마마, 슬픈 소식을 전해드려야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전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남편이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치 온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에지워스는 창살 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사이에 반지가 있었다. 결혼할 때 그녀가 남편에게 선물로 줬던 것이었다.


“전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마께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전하의 유품입니다.”


반지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전한 에지워스 신부는 더 이상 말을 남기지 않고 돌아섰다. 점점 작아지는 발자국 소리 하나하나가 그녀의 귀에는 마치 아내를 부르는 남편의 애절한 목소리처럼 들렸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반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스트리아의 어머니가 먼 이국땅으로 시집가는 딸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준 반지였다.


‘이걸 남편의 손가락에 끼워줄 때만 해도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지. 이제는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상념이야.’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음날부터 식사를 거부했다. 건강은 날로 악화됐다. 폐렴에 시달렸고, 요도암에도 걸렸다. 수시로 피를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혁명의회의 어느 누구도 옛 국모의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루이 16세처럼 사형시킵시다.”

“오스트리아에 잡힌 전쟁포로들과 왕비를 바꿉시다.”

“미국으로 망명을 보내면 어때요?” 


1793년 8월 마리 앙투아네트는 콩시에르주리로 이감됐다. 죄수번호는 280번이었다. 겨우 여덟 살이었던 아들 샤를은 신기료장수 손에 맡겨졌다. 이감에 앞서 옛 왕당파 신하들에게서 탈출시켜주겠다는 제안을 여러 번 받았지만 그녀는 모두 거부했다. 곁을 지키는 사람은 마지막 시녀 로잘리 라몰리에뿐이었다.


콩시에르주리는 원래 중세 시대에는 왕궁이었다. 1358년 샤를 5세가 궁전을 폐쇄하고 센 강 건너 루브르 궁전으로 거처를 옮긴 뒤부터 행정 기관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 1391년 감옥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이곳에는 잡범과 정치범이 섞여 있었다. 프랑스의 다른 감옥과 마찬가지로 콩시에르주리에서도 신분, 재산, 연줄에 따라 죄수의 대우가 달랐다. 부자 죄수는 침대, 책상 등을 갖춘 독방에서 책도 읽으면서 그다지 힘들지 않게 지냈다. 반면 돈 없는 죄수들은 습기가 많고 벌레가 우글거리는 ‘오블리트’에 갇혀 살았다. 오블리트는 ‘잊혀진 공간’이라는 뜻이다.


콩시에르주리는 프랑스대혁명 때에는 단두대에 끌려갈 사람들을 가둬두는 곳으로 바뀌었다. 한때는 남녀 죄수 1천200여 명이 한꺼번에 갇혔다. 이곳에 감금됐다 단두대로 향한 사람은 모두 2천6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루이 16세를 처형한 혁명의회는 10월 14일 마리 앙투아네트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죄명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초호화판 파티를 열었고, 오스트리아로 엄청난 양의 보물을 빼돌렸다는 것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들 샤를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아들 샤를이 고백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강요한 사람들은 혁명의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재판부는 왕후에게 마지막으로 해명할 시간을 주었다. 그녀는 재판정을 가득 메운 나이 든 여성들을 바라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여기 오신 많은 어머니, 할머니. 저보고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하는군요. 제가 아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말하는군요. 어머니, 할머니께 여쭤봅니다. 여러분은 제가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프랑스의 모든 어머니를 모독하는 저 말을 믿으시는가요?”


눈물 섞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설이 이어지자, 재판정에 있던 여성들 사이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를 옹호하는 발언도 터져 나왔다. 


“아무리 왕비가 미워도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해서는 안 돼요!”

“해도 해도 너무 심하다.”


재판부는 뜻하지 않은 사람들의 거부 반응에 당황했다. 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을 도중에 끊고 재판을 중단시켜버렸다. 


재판은 이틀 뒤 오전에 다시 열렸다. 재판부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반역죄와 근친상간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번에는 마지막 진술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도 굳이 미주알고주알 변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판을 마치고 콩시에르주리에 돌아온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른 감옥에 갇혔던 시누이 엘리자베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그녀의 순수한 양심, 진실한 종교적 신념,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담긴 편지였다. 편지는 엘리자베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마지막 편지를 보내요. 당신에게 전달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는 사형선고를 받았답니다. 그래도 마음은 차분하네요. 남편처럼 저도 마지막 순간에 단호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요. 다만 가여운 아이들을 두고 떠난다는 게 너무 슬퍼요. 딸에게 항상 동생을 잘 보살피라고 전해주세요. 재판 도중에 들었는데, 아들 샤를과 딸 엘리자베스가 당신에게서 떼어졌다더군요. 아들에게는 언제나 누나에게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해주세요.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말씀을 절대 잊지 말라고 이야기해주세요. 우리의 죽음에 대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저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사랑을 느꼈던 성령의 품 안에서 세상을 떠날 거예요. 살면서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모든 잘못을 신께서 용서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해요. 마찬가지로 우리 가족에게 저질렀던 저들의 모든 악행도 용서한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를 다 쓴 뒤 라몰리에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시녀의 어깨를 도닥이면서 가볍게 껴안아주었다.


그날 오후 간수 두 명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감방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다른 방으로 옛 왕후를 끌고 가 머리를 모두 깎아버렸다. 그녀는 삭발하는 동안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꼭 감고 있을 뿐이었다.


간수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마차에 태워 콩코르드 광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남편 루이 16세가 그랬던 것처럼 단두대에 올라가 샤를 앙리 상송에 의해 목이 잘렸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누이 엘리자베스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한 채 1794년 처형됐다. 아들 샤를은 이듬해 감옥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딸 마리 앙투아네트 테레사는 전쟁포로와 교환돼 외가인 오스트리아로 갔다. 


프랑스대혁명이 끝나고 부르봉 왕조가 부활한 뒤에도 콩시에르주리는 여전히 감옥으로 활용됐다. 이때는 고위급 죄수들만 갇혔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감됐던 방은 기도실로 바뀌었다.  1914년이 돼서야 콩시에르주리는 감옥으로서의 역할을 중단했다. 그리고 대중에게 개방됐다. 지금은 파리에서 유명한 관광지로 변모해 해마다 수백만 명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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