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o Mar 23. 2024

루이 16세와 마들렌 성당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좁고 초라한 침대에 누웠다. 그는 쇠창살로 막힌 조그마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어두워 보였다. 해가 떠오르려면 시간이 더 흘러야 할 것 같았다. 


‘드디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로군.’


왕은 지난밤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불편한 침대에 누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날이 밝으면 파리 시내로 끌려가 참수형을 당할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해외 도피를 시도하다 붙잡혀 파리로 끌려왔다. 3년 뒤에는 ‘10월 8일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국왕 자리도 빼앗겼다. 급기야 혁명의회로부터 반역죄를 저질렀다며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와 가족은 템플 프리즌에 수감됐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후는 가족과 떨어져 콩시에르주리에 감금됐다.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한 침대를 떠올렸다. 왜 뜬금없이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침대의 환상은 그의 머리에서 좀체 떠나지 않았다. ‘거울의 방’에서 열곤 했던 아름다운 무도회 장면도 머리를 스쳐갔다. 베르사유 궁전 뒤편의 넓은 정원에서 산책을 즐기던 장면도 기억이 났다. 


‘아버지 루이 15세 국왕이 돌아가실 때 ‘앞으로 밀려올 폭풍을 누가 막을 것인가’라고 말씀하셨지.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 아버지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거야. 불과 5년 전만 해도 이런 낡은 침대에 누워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봐야 다 부질 없는 일이지만.’


독방 반대편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매일 아침이면 옷을 입혀주러 오는 시종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노크도 없이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하, 일어나셔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하는군요.”


루이 16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불편한 침대에서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시달렸지만 뜻밖에 몸은 편안했다. 그는 시종의 도움을 받아 옷을 차려 입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에지워스 신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신부는 간단하게 예배를 진행했다. 왕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신부님, 떠나기 전에 가족을 만나 작별인사를 할 수 있을까요?”

“전하, 어린 왕자, 공주께서 큰 충격을 받을 터이니 그냥 조용히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듯합니다. 그냥 가도록 하죠. 대신 왕가의 문장은 왕세자에게, 결혼반지는 왕후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종이 다시 들어와 마차가 밖에서 기다린다고 전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루이 16세는 밖으로 걸어 나가 마차에 올랐다. 에지워스 신부는 옆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군인 두 명이 총을 든 채 앉았다. 


이날은 1793년 1월 21일이었다. 마차는 오전 9시를 약간 지나 템플 프리즌을 출발했다. 목적지인 혁명 광장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혁명군 병사들이 북을 치며 마차를 선도했고, 칼을 찬 기병대가 이들을 호위하며 길을 열었다. 파리까지 가는 도로 변에는 많은 사람이 나와 왕의 마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탕! 탕!”

“으~악” 


마차가 30분 정도 달려갔을 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총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더니 비명도 이어졌다. 함성도 들려왔다. 


“국왕 전하 만세.”


루이 16세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에지워스 신부를 쳐다봤다.


“상황을 알아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부는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왕은 마차를 지키고 있는 두 병사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둘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후 신부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던가요?”

“전하를 따르던 바론 바츠 경이 왕당파 300명을 모아 전하 구출 작전을 펼치다 실패했다고 합니다. 대부분 혁명군 병사들에게 살해됐고, 바츠 경은 달아났답니다.”

“고마운 사람들이군요. 하지만 쓸데없는 짓을 해서 아까운 목숨만 날렸네요.”


루이 16세를 태운 마차는 오전 10시께 혁명 광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파리 시민 수만 명이 구름 같이 모여 있었다. 다들 손에는 죽창과 몽둥이를 든 상태였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처형대가 설치됐고, 그 위에는 사람의 목을 자르는 기요틴 즉 단두대가 놓였다.


지금까지 차분했던 루이 16세의 표정은 급변했다.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는 에지워스 신부의 팔에 몸을 기댔다. 혁명군은 왕을 처형대로 데려갔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몰려 길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지나가자 곳곳에서 욕설이 난무했다. 돌멩이가 날아들기도 했다. 


루이 16세는 가까스로 처형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왕의 표정은 다시 달라졌다. 방금 전 혁명군 사이를 헤집고 나올 때만 해도 두려움이 가득했던 얼굴에는 평온함과 차분함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는 기색이었다. 그는 신부의 팔을 놓았다.


병사 두 명이 왕의 두 팔을 양쪽에서 붙잡고 단두대로 끌고 갔다. 사형 집행인인 샤를 앙리 상송이 기다렸다. 그는 루이 16세 즉위 초기부터 프랑스 혁명 때까지 3천 명의 목을 자른 유명한 도부수였다. 그의 가문은 증조부 때부터 사형 집행인으로 일해 온 집안이었다. 옆에는 사형 집행을 도와주는 조수 3명이 서 있었다. 루이 16세는 단두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2년 전 기요틴이 만든 단두대의 사용을 허락할 때까지만 해도 내가 단두대 앞에 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


기요틴이 등장하기 전에는 귀족과 평민의 사형 방법이 달랐다. 귀족은 칼이나 도끼로 목을 잘라 비교적 고통이 적었던 반면, 평민은 목을 매달았기 때문에 2~3분씩 고통에 시달리다 죽어야 했다. 기요틴은 ‘사형을 집행하더라도 평등하게, 그리고 인간적으로 거행해야 한다’면서 단두대를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루이 16세와 혁명의회는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 루이 16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상송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가 그 유명한 도부수 상송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내가 목을 자르라고 자네에게 많은 사람을 보냈지.”

“그렇습니다. 전하.”

“이제는 내 차례가 됐군. 그런데, 왜 그 시끄럽던 함성과 북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 것이지?”

“다들 전하의 목이 잘리는 순간을 보려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렇군, 여기에 내 편은 하나도 없을 테지?”

“….”


상송은 루이 16세의 목을 단두대로 밀어 넣었다. 에지워스 신부는 단두대의 칼날이 왕의 목을 내리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귀에 왕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에게 뒤집어씌워진 모든 죄에 나는 무죄다. 나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이들을 용서하노라. 그들이 뿌리는 피가 다시는 프랑스에 돌아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노라.”


루이 16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두대의 칼날이 그의 목을 향해 떨어졌다. 오전 10시 22분이었다. 상송 옆에 섰던 조수 중 하나가 무덤덤하게 왕의 머리를 들어 올려 광장을 가득 메운 혁명군과 시민들을 향해 흔들었다. 광장에서는 지축을 울리는 엄청난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허공을 향해 쏘아대는 총성도 연거푸 울려 퍼졌다. 


“프랑스 만세, 혁명 만세!”


루이 16세가 목을 잘린 혁명 광장에서는 이후 1만 6천~4만 명이 단두대에 목을 내밀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후는 물론 혁명지도자 마라트를 암살한 샬럿 코르데이, 또 다른 혁명지도자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도 그 중 일부였다.


루이 16세의 시체는 처형대에서 끌어내려져 대기하던 다른 마차의 관에 실렸다. 마차는 콩코르드 광장 인근에 있는 마들렌 교회로 향했다. 한때 왕을 모셨던 기병들이 마차를 따랐다. 혁명법에 따르면 루이 16세의 시체는 상스 생 에티엔 교회에 있는 그의 아버지 옆에 묻힐 수 없었다.


혁명 지지파인 마들렌 교회의 다모로 신부가 교회 입구에서 그들을 맞았다. 기병들은 루이 16세의 시체를 교회 내 공동묘지에 내려놓았다. 다모로 신부는 다른 동료의 도움을 받아 간단하게 왕의 장례 미사를 치렀다.


기병들은 루이 16세의 시체를 미리 만들어져 있던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구덩이 안에는 석회가 가득 차 있었다. 잘린 왕의 머리는 발 옆에 놓였다. 기병들은 시체 위에 석회와 흙을 덮었다. 그는 모든 프랑스 국민의 무관심 속에 마들렌 교회 공동묘지에 2년 동안 묻혀 있었다.


왕정 복귀 이후인 1815년 왕이 된 그의 동생 루이 18세는 형은 물론 나중에 묻힌 형수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를 파내 생드니 성당에 다시 매장했다. 이 성당은 10세기 이후 거의 모든 프랑스 국왕과 그 가족들이 묻힌 왕가의 공동묘지였다.

 

루이 16세의 시체가 잠시 묻혔던 마들렌 교회는 부서져 없어졌고, 지금 그 자리에는 새로 마들렌 성당이 세워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 주느비에브와 팡테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