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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27. 2024

스위스근위대와 튈르리 궁전


“이곳은 프랑스 국왕 전하께서 가족과 함께 평온을 누리시는 곳이다. 폭도들은 즉각 물러나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도록 해주겠다.”


1792년 8월 10일 오전 9시. 튈르리 궁전 입구로 통하는 계단에서 두 무리가 정면으로 대치했다. 계단 위쪽에는 빨간색 상의를 입은 군인들이, 아래쪽에는 파란색 상의를 착용한 병사들과 평범한 시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총을 겨눴다. 언제 화약이 터질지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주변을 뒤덮었다.


위쪽 군인들은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호위하는 근위대였다. 이들은 프랑스 사람들이 아니라 스위스에서 고용된 용병 이른바 ‘100인 근위대’였다. 아래쪽 사람들은 국왕의 하야를 요구하며 튈르리 궁전으로 쳐들어온 혁명군이었다. 그들은 최근 여러 달 동안 루이 16세가 혁명의회의 여러 가지 진보적인 법안을 거부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긴장감 넘치는 양측의 대치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어느 쪽에서도 먼저 총을 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혁명군 측에서 한 명이 먼저 고함을 질렀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그것이 목숨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다.”


스위스근위대 쪽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대꾸했다. 가장 위쪽에 있던 근위대장 베스터만이었다. 용병 생활만 20년이 넘는 베테랑이었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우리는 스위스근위대다. 무기를 버리는 것보다 목숨을 버리는 게 우리에게는 더 쉬운 일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몰살당하더라도 현재의 위치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무기를 손에서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튈르리 궁전으로 들어가서 국왕을 붙잡아가고 싶다면 우리의 시체를 밟고 가라.”


베스터만이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사실 스위스근위대는 난처한 처지에 몰렸다. 원래 튈르리 궁전을 지키는 병사는 이들 외에 프랑스 병사들로 구성된 궁전 경호대까지 합쳐 모두 5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 정도 병력만 유지된다면 혁명군이 아무리 많더라도 튈르리 궁전의 안전을 위협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궁전 경호대 병사들 가운데 대부분은 혁명군의 선전술에 현혹되거나 동포를 상대로 총질을 할 수 없다며 도망쳐 버렸다. 남은 병사는 스위스근위대와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 군인 200여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튈르리 궁전으로 끌려오다시피 한 루이 16세는 혁명군과 충돌하지 않겠다며 튈르리 궁전에서 혁명의회로 도망쳐버린 상태였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궁을 지켜야한다며 도주에 반대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탕~탕.” 


그때였다. 갑자기 계단에서 총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양측 병사들은 서로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으악!” 


전투가 벌어지면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스위스근위대보다는 주로 혁명군 병사들이 쓰러졌다. 오랜 훈련 덕에 스위스근위대의 총알은 정확하게 혁명군 병사들을 맞힌 반면, 혁명군 병사들의 총알은 허공을 가르기 일쑤였다.


시간이 흐르자 혁명군은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겁을 먹거나 당황한 일부 사람들은 총을 내던지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총을 쏘았지만 두려움에 떠는 표정이 역력했다. 결국 30분 정도의 짧은 전투는 스위스근위대의 압승으로 끝났다.


혁명군은 튈르리 궁전 입구로 통하는 계단에서 밀려나 튈르리 정원 밖까지 쫓겨났다. 혁명군의 퇴주에 사기가 오른 스위스근위대 병사들은 쓰러진 적의 시체를 밟으며 계단 아래로 밀고 내려갔다. 그들은 혁명군이 버리고 간 무기와 대포를 압수했다.


혁명군은 한 번 전투에서 패했다고 그대로 물러설 사람들이 아니었다. 튈르리 정원 밖으로 쫓겨 간 혁명군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응원군이 합류했다. 그 숫자는 수천 명을 넘었다. 맨주먹이거나 아니면 몽둥이, 쟁기 등을 든 사람도 적지 않았다. 프랑스 정규군에서 이탈한 군인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튈르리 정원은 온통 혁명군으로 둘러싸인 형국이 되고 말았다.


스위스근위대 병사들은 혁명군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가 꺾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너무 무표정한 얼굴이어서 혁명군은 ‘저들이 사람인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혁명군이 인원과 무기를 정비해 재공격을 준비할 때, 스위스근위대 병사 한 명이 다급하게 베스터만에게 달려갔다. 큰 충격을 받은 듯 그의 얼굴은 노랗게 질린 상태였다.


“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철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뭐라고,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병사는 베스터만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거기에는 국왕의 친필이 분명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베스터만은 종이를 얼른 넘겨받아 내용을 서둘러 읽었다. 


‘국왕이 명하노니, 스위스근위대는 무기를 버리고 숙소로 철수하라. 더 이상 나의 국민에게 총을 쏘지 말라.’


베스터만은 화가 나서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도대체 국왕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중대한 순간에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멍청한 녀석! 하지만 고용주인 국왕이 명령을 내렸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몰살인데. 아! 하늘이시여, 이렇게 우리를 버리시는 것입니까?’


잠시 고민에 빠졌던 베스터만은 어쩔 수 없이 일단 부하들을 궁전 쪽으로 철수시키기로 했다. 그는 계단에 모여 있던 부하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국왕의 명령이다. 모든 스위스근위대는 궁궐 안으로 철수한다. 혁명군에게 약세를 보이지 않도록 한꺼번에 철수하지 말고 분대 별로 천천히 차례차례 철수한다.”


스위스근위대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철수 명령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대장의 명령에 따라 절도 있게 한걸음씩 물러났다. 그들은 궁 안으로 후퇴한 뒤 출입구와 주요 창문 등에 배치돼 혁명군의 기습에 대비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국왕이 무기를 버리라고 명령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군수물자 보급도 끊어져 곧 탄약이 고갈되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마침내 긴장감과 공포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터만이 지시한 위치에서 이탈하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베스터만은 평생 용병으로 외국에서 살면서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부하 병사들의 불안감을 잘 알았다. 그는 복도에 나가 부하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단호하면서도 비장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스위스는 가난한 나라다. 논도 부족하고 밭도 부족하다. 먹고 살 게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프랑스에 온 것이다. 스위스 남자들은 수백 년 전부터 목숨을 걸고 외국 군대에서 용병으로 일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조상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고용주를 배신하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가 오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거나 여기에서 도망간다면, 앞으로 후손들은 영원히 용병으로 일할 수 없게 된다.”


베스터만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스위스근위대 병사들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눈앞에는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 친척,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부 어린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죽음이 두렵다면 지금 당장 여기를 떠나도 된다. 아무도 여러분의 이탈을 말리지 않는다. 다만 이 한 마디만 하겠다. 우리가 이 자리를 떠나면 목숨은 건지겠지만, 고향에 살고 계신 부모, 형제는 굶어 죽는다. 결정은 여러분 개개인에게 맡기겠다.”


베스터만은 말을 끝낸 뒤 튈르리 궁전 입구로 갔다. 그는 문을 지키는 부하 병사들 바로 뒤에 서서 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바깥을 향해 총을 겨누는 부하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부하는 베스터만의 얼굴을 돌아보더니,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튈르리 궁전에서 도망간 스위스근위대는 한 명도 없었다.


수천 명의 혁명군은 마침내 튈르리 궁에 대대적 공격을 재개했다. 스위스근위대는 위치에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혁명군은 수적으로는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스위스근위대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튈르리 궁전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궁전 입구 밖이나 창문 밖에서 총만 쏘아댈 뿐이었다.


스위스근위대로서는 불행하게도 한 명 두 명 총알이 떨어진 병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튈르리 궁전 안에는 단 한 발의 총알도 남지 않게 됐다. 스위스근위대 쪽에서 총알이 날아오지 않자, 혁명군 병사들은 금세 사정을 눈치 챘다. 그들은 “와~” 함성을 지르며 튈르리 궁전 안으로 진입했다.


스위스근위대 병사들은 하나 둘 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떤 병사들은 제자리를 지키다 혁명군의 총에 맞아 즉석에서 숨졌고, 다른 병사들은 혁명군과 맨주먹으로 싸우다 몰매를 맞아 죽었다. 혁명의회로 쫓겨 갔다가 붙잡혀 칼에 찔려 죽은 병사도 부지기수였다.


역사에 ‘8월 10일 사건’으로 기록된 그날, 튈르리 궁전을 지키다 숨진 현장에서 스위스근위대 병사는 모두 700여 명에 이르렀다. 대장 베스터만도 현장에서 즉사했다. 포로로 잡힌 100여 명은 나중에 혁명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살아남은 병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스위스 루체른에는 ‘빈사의 사자상’이라는 조각상이 있다. 힘이 빠져 죽어가는 사자의 모습을 새긴 조각이다. 튈르리 궁전의 스위스근위대 병사들이 몰살당하고 30년 뒤인 1821년 스위스 국민들이 ‘의리’를 지킨 병사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사자상 위에는 라틴어로 ‘헬베티오럼 피데이 아크 비르투티’(HELVETIORUM FIDEI AC VIRTUTI)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스위스근위대의 충성심과 용맹성에 바친다’라는 뜻이다.


튈르리 궁전은 1871년 파리 시민, 노동자들이 봉기를 통해 세운 혁명적 자치정부인 ‘파리 코뮌’ 시기 때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방화 때문에 소실돼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튈르리 정원만 남아 파리 시민들의 공원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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