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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28. 2024

성 로마누스와 가고일


5년 전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올해 연말 다시 문을 연가는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를 넘어 세계의 문화유산인 대성당이 복원됐다는 소식은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노트르담 대성당을 처음 본 것은 30년 전인 1994년 출장 때문에 파리에 갔을 때였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대성당 곳곳에 붙은 고딕 스타일 괴물 장식인 가고일(갸흐구이)이다.


가고일은 노트르담 대성당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고딕 성당에 많이 이용된다. 가고일을 설치한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 기본적으로 가고일은 천장에 떨어지는 물이 고이지 않고 아래로 흘러내리게 하는 관개 시설이다. 또 가고일은 ‘어둠의 힘’을 막는 일종의 부적이다. 대성당에 접근하려는 악마는 성당 벽에 붙은 가고일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게 중세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마지막은 성당에 오는 신도에게 마음에 품은 모든 사악한 생각을 밖에 버리고 오라는 경고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악으로 오염된 삶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가고일은 7세기에 처음 만들어졌다니 역사가 꽤 오래됐다. 가고일의 유래를 알려면 1400년 전 센강이 뱀처럼 굽이치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의 루앙이라는 큰 도시로 가야 한다. 루앙은 지금도 인구 80만 명을 자랑하는 대도시이지만, 당시에는 센강과 영국해협을 연결해 무역을 하던 북프랑스 제2의 도시로서 매우 번성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끔찍하게 생긴 괴물이 나타나 루앙 외곽의 센강 강둑 습지에서 살기 시작했다. 괴물은 외모만 보면 용처럼 생겼지만 입에서 불을 내뿜는 대신 엄청난 물을 쏟아낸다는 점에서 용과는 달랐다.


괴물은 센강 주변에 큰 재앙을 불러 일으켰다. 수시로 입에서 물을 내뿜어 강을 지나가던 배를 침몰시켰고 강에 빠져 허우적대는 선원은 모두 잡아먹었다. 괴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들판에도 홍수를 일으켰고, 농사를 짓던 농부는 물론 소와 양, 말 같은 가축까지 잡아먹었다. 두려움에 떨던 루앙의 지도자들은 할 수 없이 괴물을 찾아가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세상을 지배하는 엄청난 존재이시여! 미천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름을 ‘갸흐구이’라고 밝힌 괴물은 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을 지나가는 배를 침몰시키고 선원을 잡아먹는 것은 그만둘 생각이 없어.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와 소, 말 등 가축을 잡아먹는 것도 중단하지 않을 거야.”


갸흐구이가 잔혹한 짓을 멈추지 않겠다고 하자 루앙 지도자들은 공포에 질려 울상이 됐다.


“도시 바깥에서는 마음대로 하시되 도시 안쪽만은 살려주십시오.”


갸흐구이는 재미있다는 듯 낄낄대며 웃었다.


“좋아! 그 정도는 봐 줄 수 있어. 도시 안쪽은 공격하지 않도록 하지. 대신 해마다 결혼하지 않은 소녀를 한 명씩 제물로 바치도록 해.”


루앙 지도자들은 아무리 다급하다고 해도 소녀는 바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녀가 다 죽어버리면 수년 뒤에는 더 이상 바칠 제물이 없게 될 겁니다. 그러하니 몸집이 작은 소녀 대신 덩치가 커서 먹을 게 많은 남자를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갸흐구이는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환히 웃었다.


“네 놈들 말이 맞는 것 같군. 그 제안은 받아들이도록 하지.”


도시로 돌아간 루앙 지도자들은 논의를 거쳐 해마다 갸흐구이에게 제물로 바칠 희생자의 조건을 정했다. 그 조건이라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였다. 어차피 죽을 운명인 만큼 도시를 위해 희생시키는 게 더 낫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루앙 사람들은 이후 해마다 갸흐구이에게 사형수를 한 명씩 바쳤다. 나머지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도시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치 죄수처럼 도시 성벽 안에 갇혀 숨을 죽인 채 지내야 했다.


루앙이 괴물에게 제물을 바친 지 여러 해가 흘렀을 때였다. 로마누스라는 신부가 루앙대성당에 새로 부임했다. 그는 깊은 신앙과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힌 젊은이였다. 갸흐구이가 루앙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도시를 괴물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로마누스가 부임하고 며칠 뒤 갸흐구이에게 제물을 바치는 날이 다시 돌아왔다. 젊은 신부는 사형선고를 받는 바람에 괴물의 먹잇감이 된 사형수를 방으로 불렀다.


“자네 입장에서는 괴물에게 물어 뜯겨 고통스럽게 죽는 것보다는 단칼에 머리를 잘려 사형당하는 게 낫겠군. 그렇지 않나?”


뜻밖에 사형수는 전혀 두렵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과거에 먹잇감으로 바쳐진 다른 사형수들과는 달리 용기가 많은 젊은이였다.


“이러나 저러나 죽는 건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저에게 칼이라도 쥐어주시면 죽더라도 괴물과 한 번 싸워보기라도 할 텐데 괴물의 보복이 두려워 묶어서 보낸다니 그게 답답할 뿐입니다.”


로마누스는 당돌한 사형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게 도시를 살리고 자네도 살릴 좋은 생각이 있는데…. 어떤가? 한 번 들어볼 텐가?”


사형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마누스는 사형수의 귀에 대고 괴물을 잡을 비법을 조용히 속삭였다. 사형수는 밝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도움으로 갸흐구이를 물리친다면 사형선고를 취소해 주겠네. 반드시 약속하지.”


로마누스는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 직전 사형수를 데리고 갸흐구이가 사는 동쪽의 습지로 나갔다. 사형수가 앞장서 걷고 그는 서쪽의 강둑 너머에 숨어 있었다.


두 사람이 걸어가자 갸흐구이가 습지에서 어슬렁거리며 기어 나왔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끔찍한 모습의 갸흐구이를 보고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괴물은 엄청나게 거대하고 추하게 생긴 데다 피부는 아주 짙은 녹색이었다. 박쥐처럼 등에 날개가 달렸고 몸은 긴 뱀처럼 구불했으며 배에 물갈퀴가 있는 다리 두 개가 붙었다. 긴 목은 비늘 투성이였고 눈빛은 이글거리는 불길처럼 타올랐다.


사형수는 괴물 앞에 서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형수는 신부가 숨은 강둑까지 순식간에 내달렸다. 깜짝 놀란 괴물은 사형수를 잡으려고 앞으로 뛰어나왔다.


로마누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등에 숨겼던 초대형 황금색 십자가였다. 때마침 태양이 습지 너머에서 솟아올라 강둑 쪽으로 환한 햇빛을 쏟아냈다. 신부는 햇빛을 십자가에 반사시켜 괴물을 향해 쏘았다. 온몸에 십자가의 빛을 받게 된 갸흐구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쓰러져 한입에 잡아먹으려던 사형수 발 앞에 드러눕고 말았다.


신부와 사형수는 갸흐구이의 긴 꼬리에 끈을 묶어 함께 붙잡고 찬송가를 크게 부르며 도시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도시 한가운데 광장으로 들어가 괴물을 내려놓았다. 끈에 매달려 끌려온 괴물을 본 도시 사람들은 너무 놀라 모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로마누스는 괴물을 대성당 앞으로 끌고 가 즉석재판을 열어 다양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그는 모든 사람의 견해를 다 들은 뒤 최종 판결을 내렸다.


“갸흐구이를 성당 앞에서 화형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로마누스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성당 앞에 나무를 쌓고 괴물을 얹어 불을 붙였다. 불길은 뜨겁게 치솟아 올라 괴물의 몸통을 재로 만들었다. 그런데 몸통과 달리 머리와 목은 불에 타기는커녕 그을음 하나 생기지 않았다.


로마누스는 불에 다 타 재가 된 괴물의 몸통은 센강에 버리고 머리와 목은 최근 새로 지은 성당 벽에 걸어놓았다. 도시 사람들은 괴물이 다시 살아날지 모른다며 두려워했지만 신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괴물의 머리와 목은 절대 살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이 벽에 영원히 걸려 하느님의 권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남을 것입니다.”


로마누스가 괴물의 머리와 목을 성당 벽에 걸어놓고 며칠이 지난 뒤 루앙에 큰 비가 내렸다. 성당 지붕으로 쏟아진 빗물은 괴물의 입을 통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루앙의 한 건축가가 이를 곰곰이 살피더니 무릎을 탁 쳤다.


‘그동안 성당은 빗물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해 부식해서 무너지기 일쑤였지. 성당 벽에 갸흐구이의 머리 모양 장식을 달아 홈통으로 활용하면 빗물 때문에 벽면이 손상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겠어.’


건축가는 로마누스의 승낙을 얻어 갸흐구이의 머리와 비슷한 조각을 만들어 루앙의 모든 성당에 골고루 설치했다. 그가 기대했던 대로 빗물은 갸흐구이 조각을 통해 빠져나갔고, 성당은 빗물 피해에 대한 우려를 완벽하게 해소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루앙 사람들은 이 조각을 갸흐구이, 즉 가고일이라고 불렀다.


루앙의 괴물 이야기는 루앙에 머물지 않고 프랑스 전역에 퍼져나갔다. 프랑스의 모든 성당은 지붕과 벽에 괴물 머리와 목을 조각해 홈통으로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제 갸흐구이 전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로마누스는 괴물을 잡은 것 외에도 각종 기적을 많이 일으켜 나중에 가톨릭의 성인이 됐다. 그렇다면 로마누스와 함께 괴물을 잡으러 갔던 젊은 사형수는 어떻게 됐을까?


로마누스가 약속했던 대로 그는 사면돼 사형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루앙 사람들은 비록 죄수였지만 도시를 살린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뜻에서 해마다 10월 23일 성 로마누스 축일이 되면 프랑스 왕에게 사형수 한 명을 사면해 주도록 했다. 이를 ‘성 로마누스의 특권’이라고 부른다. 이 특권은 프랑스대혁명 때까지 존속했지만 이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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