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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발상전환의 걸작 런던 아이

by leo


1993년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와 ‘영국건축가협회’는 새 천년, 뉴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한 상징물 디자인 공모전을 열었다. 어디에 건설해야 하는지 장소를 지정하지도 않았고,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지 구체적 내용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새 천년을 기념할 만한 랜드마크’라는 주제만 있었다.


선데이 타임스에 실린 공모전 기사는 부부 건축가 데이비드 막스와 줄리아 바필드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작품을 내기로 했다.


“대형 타워는 어떨까?”

“이미 프랑스 파리에 에펠탑이 있잖아. 아무리 훌륭한 타워라도 에펠탑을 능가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부부는 처음에는 대형 타워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타워를 짓더라도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과 경쟁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부부는 그러다 페리 휠을 생각하게 됐고 배에 달린 풍차모양 바퀴, 즉 페리 휠 모양의 대형 회전 관람차를 설계했다. 이름은 ‘밀레니엄 휠’이라고 정했다.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했다.


선데이 타임스는 수개월 뒤 공모전 결과를 발표했다. 당선작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작품의 창의성이 부족해서 실망했다는 평도 붙였다. 부부는 공모전에서 당선작이 없다는 발표를 보고 짜증을 냈다.


“우리는 위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데 아무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군.”

“그럼 할 수 없지. 우리가 직접 하지!”


부부의 마음은 초대형 휠에 완전히 꽂혀 있었다. 밀레니엄 휠을 건설하면 건축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물론 상업적으로 빅히트를 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부부는 밀레니엄 휠을 직접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일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런던 한가운데에 대형 관람차를 건설한다는 생각을 다들 비웃던 때였다. 누구도 밀레니엄 휠이 건설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래도 부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투자자는 우연한 기회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타났다. 부부의 집 근처에 봄 에일링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마침 영국항공 회장이었다. 부부는 크리스마스카드를 전달하려고 에일링 회장 집에 갔다가 차를 한 잔 마시게 됐다. 거기서 뜻하지 않게 런던 아이 이야기가 나왔다. 영국 관광 증진에 관심이 많던 에일링 회장은 밀레니엄 휠에 흥미를 보였다. 그는 돈을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서 힘을 얻은 부부는 밀레니엄 휠 건축 허가를 얻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데이비드는 런던 대박람회가 열린 하이드파크에 짓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줄리아는 이에 반대했다. 그녀는 1951년 전국 박람회를 연 템즈강 변의 사우스뱅크가 더 좋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관공서 및 지역 단체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다. 33개 구청, 사우스뱅크 센터, 예술위원회, 항만공사 외에 지역 커뮤니티 그룹, 거주자 단체 등이었다.


부부는 밀레니엄 휠을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 행사를 수십 번 열었다. 총리 사무실, 지역 커뮤니티 사무실, 관공서 등등 곳곳에서 밀레니엄 휠을 설명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일일이 나눠줬다. 프레젠테이션 행사를 할 때마다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단체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가장 반대가 심했던 사람은 왕립미술위원회(RFAC)의 세인트 존 의장이었다. RFAC는 전국적 중요도를 가진 주요 프로젝트를 심사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부부가 RFAC 사무실에 갔을 때 존 의장은 노골적으로 비난을 쏟아냈다.


“두 분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밀레니엄 휠이라는 엉터리 작품을 만들어 런던을 망치려고 하는가요?”


처음부터 밀레니엄 휠 아이디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존 의장은 부부의 프레젠테이션을 수시로 중단시켰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한 행동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 따위는 카디프에나 보내는 게 좋겠군요.”


존 의장은 21세기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19세기에나 어울리는 대형관람차를 세운다는 게 시대 흐름에 맞느냐고 따졌다.


부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수년 간 설득작업을 계속했다. 드디어 그들의 노력은 조금씩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그들의 설명을 들은 단체 가운데 80% 이상이 동의서를 써 준 것이었다. 당시 재무상이던 존 구머도 부하 직원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청문회를 열지 않기로 했다.


부부는 건설 공사를 담당할 업체를 고르기 위해 입찰을 진행했다. 가장 낮은 가격을 써낸 일본의 미쓰비시가 선정됐다. 미쓰비시는 수지를 맞추기 위해 부부에게 설계 변경을 요청했다. 재료도 값싼 것으로 교체하자고 했다. 부부는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미쓰비시를 바로 퇴출시켰다.


새 업체를 고르는 데에는 2년이 걸렸다. 특정 회사가 아니라 팀이었다.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의 전문가들이 모인 연합이었다.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공사를 서둘러야 했다. 이 탓에 대형 관람차를 다 만든 뒤 안전시스템에 미세한 문제가 생겨 완공 후 개장하기까지 몇 달이 더 걸려야 했다. 런던 아이 건설 공사는 1998년 시작됐다. 휠을 가로로 눕혀 조립한 다음 끌어올려 세로로 바로 세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런던 아이 개장식은 1999년 12월 31일 진행됐다. 당시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도 참석했다. 관광객들을 입장시키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3월 9일부터였다. 처음에 ‘밀레니엄 휠’이었던 이름은 ‘런던 아이’로 바꿨다. 부부는 런던 아이 지분 3분의 1을 차지한 대주주가 됐다. 나머지 3분의 2는 런던 아이에 투자한 영국항공과 투소 그룹이 차지했다. 부부는 나중에는 거액을 받고 지분을 팔았다.


런던 아이는 이제 런던 여행의 핵심이 됐다. 런던에 간 국내외 관광객 사이에 어느 유적, 유물보다 더 인기 있는 시설물이 됐다. 그 증거는 매년 런던 아이 탑승객이 무려 350만 명에 이른다는 기록이다.


이를 보면-논란의 여지가 있지만-런던 아이는 21세기 런던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라고 평가하기에 충분한다. 이를 반영하듯 런던 아이 측이 사용기간 연장 신청을 냈을 때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런던 시민 중 85%가 연장에 찬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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