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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의 버킹엄 궁전

by leo



‘아침 6시 어머니가 나를 깨웠다. 캔터베리 대주교와 코닝엄 공이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침실에서 나와 응접실로 갔다. 코닝엄 공은 불쌍한 삼촌이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늘 새벽 2시 12분에 세상을 떠났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내가 여왕이 됐다고 전했다.’ (1837년 6월 20일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원래 왕위 계승권 순위에서 멀리 뒤로 밀려났던 인물이었다. 출생 당시만 해도 왕위 계승권 5위였지만 상위 계승권자들이 연이어 숨지는 등 행운이 겹쳐 삼촌인 윌리엄 4세에 이어 왕관을 머리에 쓰게 됐다. 그녀는 1838년 6월 2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빅토리아 여왕은 즉위 직후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할 왕위 계승권이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원인이었다. 빅토리아 여왕도 일기에서 ‘어린 시절은 다소 우울했다’고 적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불행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됐다. 그녀는 딸이 두 살 때 남편을 잃었다. 혼자 딸을 키우게 된 어머니는 이른바 ‘켄싱턴 시스템’이라는 양육방침을 만들었다. 켄싱턴 시스템이라는 말은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기 전 어릴 때 런던 켄싱턴 궁전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지금은 영국여행이나 런던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당시 켄싱턴 궁전은 어린 왕위계승권자 등이 살던 곳이었다. 먼 훗날 찰스왕세자와 결혼한 다이애나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이 시스템을 만든 것은 딸을 훌륭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의지박약한 인물로 만들어 자신에게 절대 의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 시스템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는 물론 정치적 후견인인 콘로이 경과 항상 붙어 다녀야 했다. 콘로이 경은 어머니와 내연 관계를 맺은 것으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다른 어린이들을 전혀 만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불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과도 접견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침대를 같이 써야 했고 매일 가정교사와 공부해야 했다. 빅토리아의 유일한 즐거움은 인형과 애완견 대시였다.


어머니와 콘로이 경은 빅토리아 여왕의 왕위 계승이 확실해지자 딸로 하여금 콘로이 경을 개인 비서 겸 재무관으로 임명하라고 독촉하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왕좌에 오른 뒤 콘로이 경은 물론 어머니와도 냉랭한 관계를 평생 유지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즉위한 지 3주 뒤인 1837년 6월 버킹엄 궁전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곳을 왕궁으로 사용한 첫 왕이 된 것이었다. 그녀가 이주한 덕분에 버킹엄 궁전은 마침내 왕궁으로서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버킹엄 궁전이 영국여행이나 런던여행을 가는 관광객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결국 그녀 덕분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는 버킹엄 궁전 인근 저택으로 이사했다. 영국에서 미혼 여성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어머니와 한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전통 때문이었다. 이사한 뒤에도 어머니의 간섭은 끊이지 않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당시 총리였던 멜버른 경에게 답답한 심정을 호소했다.


“멜버른 경. 이대로 계속 지내다가는 미칠 것 같군요. 어머니가 궁에는 안 계시지만 수시로 들어와 잔소리를 해대니 견딜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어머니를 내 곁에서 떼어놓을 수 있을까요?”

“전하, 유일한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그것이 무엇인가요?”

“앨버트 공과 결혼을 하시면 됩니다.”

“꽤 충격적인 대안이군요.”


빅토리아 여왕에게는 이미 두 살 때부터 결혼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람이 있었다. 독일의 귀족인 에른스트 3세 백작의 둘째 아들인 앨버트 왕자였다. 사실 두 사람은 외사촌 사이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는 앨버트 왕자의 아버지, 그리고 왕자의 삼촌인 레오폴드 국왕과 남매였다.


두 사람은 1836년 처음 만났다. 레오폴드 국왕과 빅토리아의 어머니가 둘을 만나게 해주려고 일부러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국왕이던 윌리엄 4세가 반대하는 바람에 둘의 결혼 이야기는 없던 일이 돼 버렸다.


빅토리아는 앨버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상당히 호감을 가졌다. 그녀의 일기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앨버트는 매우 잘 생겼다. 머리카락은 내 것과 같은 색이다. 눈은 크고 푸르다. 코도 정말 아름답고 단정한 치아를 가진 입은 달콤해 보인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그의 밝은 표정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외삼촌인 레오폴드 국왕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외삼촌, 제게 엄청난 행복의 기회를 제공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앨버트는 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점을 다 갖춘 사람이에요.’


빅토리아 여왕은 즉위한 다음해인 1839년 10월 앨버트 왕자를 영국으로 초대했다. 둘의 결혼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결혼 프러포즈는 남자인 앨버트 왕자가 아니라 여자인 빅토리아 여왕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앨버트 왕자도 빅토리아 여왕에게 호감을 가졌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한 사실은 한 달 뒤 발표됐다. 그리고 둘은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왕립 예배당에서 이듬해 2월 10일 결혼식을 올렸다. 앨버트와 결혼해 버킹엄 궁전에서 신혼살림을 차림으로써 마침내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아이 낳기를 싫어한 것으로 알려졌다. 갓난아기가 괴물처럼 생겼다고 생각한 데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이 너무 보기 싫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앨버트를 너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는 아기를 무려 9명이나 낳았다. 그녀가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는 결혼 첫날에 대해 쓴 일기에 잘 담겼다.


‘나는 절대로, 절대로 그저 그런 첫날밤을 보내지 않았다. 나의 사랑스럽고,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앨버트. 그의 지극한 사랑과 애정은 내가 과거에 전혀 맛보지 못했던 지극한 사랑과 행복의 감정을 느끼게 해줬다. 그는 내 손을 꼭 잡았고, 거듭해서 키스했다. 그는 너무 아름답고 달콤하고 부드럽다. 내가 그런 남편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신께 감사의 말을 다 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버킹엄 궁전에서 행복하게 살던 빅토리아 여왕은 1861년 평생 사랑한 남편을 잃었다. 앨버트가 장티푸스에 걸려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추도하며 켄싱턴 가든 한쪽에 ‘앨버트 미모리얼’이라는 기념물을 만들었다. 또 1867년 공사 중이던 콘서트홀에는 ‘로열 앨버트 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을 잃은 슬픔에 잠겨 버킹엄 궁전을 떠나 윈저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발모랄 성, 오스번 하우스 등을 오가며 살았다. 이후 수년 동안 버킹엄 궁전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심지어 방치되기도 했다.


여왕이 수도를 버린 사실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는 바람에 그녀는 런던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은 버킹엄 궁전에 들어가지 않고 런던 시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왕궁의 기능은 버킹엄 궁전보다는 윈저성이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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