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은 7세기에 처음 만든 곳이어서 1400년 역사를 가진 성소다. 대성당은 ‘불’과 매우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불 때문에 무너졌다가 더 새로운 건물로 거듭나기를 수차례 거듭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을 무너뜨린 가장 최근의 화재는 1666년에 일어났다.
그해 9월 2일 퍼딩 거리에 있는 한 빵가게에서 불이 났다.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런던 소방당국은 주변 주택 수십 채를 미리 부숴 ‘방화선’를 설치함으로써 화재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당시 런던 시장이던 토머스 블러드워스 경에게 방화대 설치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블러드워스 시장은 서둘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부숴야 하는 주택 중에 당시 저명한 귀족, 의원 등의 저택이 다수 포함됐기 때문이었다. 시장이 주저하는 사이 화재는 인근 목조 건물을 타고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 불길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더욱 확산돼 런던 시내 쪽으로 달려갔다. 악명 높은 ‘런던 대화재’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불이 처음 시작된 지점에서 수백m 떨어진 곳이었다. 신도들은 처음에는 빵집에서 불이 난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이어진 화재는 도시를 야금야금 잡아먹더니 급기야 세인트 폴 대성당에까지 이르렀다.
작은 목조 건물만 집어 삼키느라 ‘배가 고팠던’ 것인지 불길은 당시 런던에서 가장 큰 건물이던 세인트 폴 대성당을 보자마자 침을 꼴깍 삼키며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불길은 대성당의 목조 부분을 타고 엄청나게 치솟으면서 천장과 첨탑을 모조리 녹여버렸다. 역사학자 존 에블린은 당시 끔찍한 상황을 담은 글을 남겼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석조물은 수류탄 파편처럼 날아다녔다. 녹아내린 납 물은 도랑처럼 시내로 흘렀다. 주변의 거리는 마치 은이 깔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화마는 세인트 폴 대성당을 완전히 집어 삼켜 무너뜨리고도 멈출 줄 몰랐다. 그는 바람을 타고 더 달려 마침내 화이트홀 거리에 있는 찰스 2세 국왕의 궁전 앞까지 진출했다. 국왕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다른 곳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총력전에 나선 소방당국은 인근에 방화대를 제대로 설치한 데다 때마침 강하게 분 비바람 덕분에 가까스로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다.
대화재는 런던에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주택 1만 3200가구가 전소됐고, 교회, 성당 87개가 무너졌다.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뜻밖에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세인트 폴 대성당이 화재로 전소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애덜버트 국왕 시절이던 604년 처음 설립됐다. 이후 여전히 이교도였던 애덜버트의 아들은 왕 자리에 오르자 세인트 폴 대성당을 불태워 버렸다.
7세기 말 무렵 앵글로 색슨족 출신의 국왕은 다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원래 자리에 석재로 세인트 폴 대성당을 새로 지었다. 하지만 962년 다시 런던에 화재가 나 대성당은 불타버렸다. 그 자리에 새로 지은 대성당은 100년 뒤인 1087년 화재로 전소됐다.
‘정복왕’ 윌리엄은 그해 대성당 재건 작업을 다시 시작했지만 공사 도중이던 1135년 불이 나 대성당이 소실되는 등 사건이 끊이지 않아 대성당을 완공하는 데에는 200년이나 걸렸다.
사실 1666년 런던대화재가 나기 전에 이미 세인트 폴 대성당은 황폐해진 상태였다. 첨탑은 1561년 번개에 맞아 부서졌고 대성당 안팎은 시장으로 사용됐다. 영국 내전 중에는 군인이 잠을 자고 말을 보호하는 막사 노릇을 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 무관심했던 런던 사람들은 화재로 대성당이 전소되자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그들은 대성당을 새로 지어야 한다며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너무 무관심했어. 대화재가 발생한 것은 하나님에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벌을 주신 거야!”
영국 역사상 최고의 건축 전문가가 세인트 폴 대성당을 살릴 ‘구원투수’로 나섰다. 당시 서른세 살이던 크리스토퍼 렌이었다.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던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다.
렌은 대화재 발생 10일 만에 망가진 런던을 완벽하게 재건할 계획안을 찰스 2세 국왕에게 제출했다. 마치 대화재로 런던이 풍비박산 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렌의 계획안은 방대했다. 런던의 주요 도로와 광장을 완전히 바꾸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왕은 그의 계획안을 좋아하지 않았다. 런던의 상인들과 저택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얼른 옛 집을 대충 재건하고 장사를 재개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렌이 원하는 것처럼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재건은 그들에게는 필요 없었다.
찰스 2세는 이곳저곳에서 사람을 물색했지만 런던 재건 사업을 맡을 적임자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3년이나 지난 뒤 렌을 불러 총책임자 자리를 맡겨야 했다.
렌은 대화재로 세인트 폴 대성당이 전소하기 5년 전에 대성당 재건 자문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대성당에 대한 정보가 많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게다가 1630년 이니고 존스가 설계한 대성당 개축안도 확보한 상태였다.
렌은 세인트 폴 대성당 재건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돔이 원래 서 있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측량을 실시하면서 인부들에게 위치를 알 수 있는 큰 돌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한 인부가 큰소리로 외쳤다.
“교수님, 여기 돌에 이상한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지요?”
렌은 인부에게 달려갔다. 인부는 한 묘비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비에는 라틴어가 적혀 있었다. ‘Resurgam.’
“이 단어는 ‘부활’이라는 뜻이야. 세상에 이런 기적이 있나! 하나님께서 이 성전은 부활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남기신 것이야!”
렌은 하루 종일 공사 현장에 머물며 대성당 건설 작업을 꼼꼼하게 살폈다. 돔 위로 끌어올린 바구니에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잠시 쉬러 집에 갔을 때에는 망원경으로 인부들이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했다.
렌의 노력 덕분에 세인트 폴 대성당은 1710년 완공됐다. 길이 200m, 돔 높이 111m로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런던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렌은 1723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시신을 대성당에 안치하기로 했다. 그는 대성당을 새로 지은 뒤 처음 묻히는 인물이라는 영광을 안게 됐다. 묘비에는 그의 공적을 담은 글이 새겨졌다.
‘이 무덤 아래에 이 대성당과 이 도시의 건설자가 묻혔다. 크리스토퍼 렌. 그는 90년 이상 살았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살았다. 이 묘를 보는 사람이라면 주변을 천천히 한 번 살펴보라.’
세인트 폴 대성당의 고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두 차례나 독일군 공습에 파괴되는 수난에 시달렸다. 1940년 10월 10일 첫 공습 때에는 첨탑이 부서졌고, 이듬해 4월 17일 두 번째 공습 때에는 마루에 큰 구멍이 생겼다. 당시 윈스턴 처칠 총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인트 폴 대성당을 독일의 폭격에서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지금 런던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대성당의 자일스 프레이저 신부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이 보이지 않는 런던 전경 사진은 있을 수 없다. 돔은 런던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는 영국의 주요한 행사들이 열렸다. 영국을 위기에서 구한 넬슨 제독과 웰링턴 경, 처칠 총리의 장례식이 여기서 거행됐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 및 90세 생일 축하행사,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결혼식도 대성당에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