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와 런던의 코들

by leo



“아니, 저게 뭐야? 코잖아!”


1997년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킹엄 궁전으로 이어지는 관문 역할을 하는 애드머럴티 아치를 구경하던 한 관광객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의 일행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벽에 이상한 게 붙어 있었다. 바로 ‘코’ 모양 장식이었다.


“누가 저걸 저기에 붙여 놓았지?”


애드머럴티 아치 벽에 이상한 ‘코’가 붙었다는 소문은 금세 런던 시내에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 ‘코’를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코’는 애드머럴티 아치 북쪽 벽의 2m 정도 높이에 붙어 있었다.


애드머럴티 아치는 에드워드 7세 국왕이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을 기리기 위해 짓기 시작해 1912년 완공됐다. 이곳에는 라틴어로 크게 글씨가 적혀 있다. ‘에드워드 7세 재임 10년에,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가장 감사하는 국민들로부터, 1910’이라는 뜻이다. 이 건물은 영국정부가 선정한 ‘리스티드 빌딩(보호 건물)’이다. 함부로 부수거나 고칠 수 없다. 영국에는 이런 건물이 37만여 채나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누가 왜 ‘코’를 그곳에 붙여 놓았는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또 그 ‘코’가 누구의 것을 상징하는지도 궁금하게 여겼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웰링턴 공작의 ‘코’일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워털루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를 대파해 영국을 구한 장군이었다. 그의 ‘코’가 원래부터 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코’는 그곳에만 붙어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코’가 발견됐다. 내셔널 갤러리 벽에도 ‘코’가 붙어있다는 게 확인됐다. 또 테이트 브리튼 박물관, 사우스뱅크 센터 등 런던의 35곳에서 코가 발견됐다. 사람들은 여기에 ‘런던의 코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부분 건물 주인이나 관리인은 ‘코’를 발견하자마자 떼어냈다. 하지만 애드머럴티 아치를 포함해 소호의 레스토랑인 쿼바디스, 세인트 팬크라스 철도역 등 10곳에서는 굳이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10개 중에서 소호에 붙어 있는 ‘코’만 7개에 이른다고 한다. 런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소호에 붙은 코 7개를 모두 발견하면 행운을 얻는다.’


‘코’를 둘러싼 진실은 15년 뒤에 밝혀졌다. 영국의 ‘이브닝 스탠다드’ 신문이 ‘코’를 만든 ‘범인’을 찾아내 인터뷰를 한 것이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얼굴을 처음 드러냈다. ‘코’를 조각한 사람은 해크니 출신의 건축가 릭 버클리였다.


버클리가 ‘코’를 만들어 붙인 이유는 CCTV 때문이었다. CCTV가 조지 오웰이 쓴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처럼 세상을 감시하면서 지배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버클리는 이에 대한 항의로 코를 만들어 여러 벽에 붙였던 것이다. 그는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CCTV가 점점 늘어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증가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CCTV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클리는 CCTV에 적발당하지 않고 ‘코’를 붙이는 게 가능한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1997년 어느 날 밤 몰래 애드머럴티 아치에 가서 ‘코’를 붙였다고 한다. 그가 신문 인터뷰를 통해 신분을 드러낼 때까지 아무도 누가 작가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가 CCTV를 속여 이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애드머럴티 아치 관리인 측이 굳이 CCTV를 확인해서까지 범인을 찾아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버클리는 처음에는 치약을 들고 가서 ‘코’를 애드머럴티 아치에 붙였다. 그는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나중에 다시 가서 강력접착제로 코를 고착시켰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 여러 곳에 배포했다.


버클리는 인터뷰에서 “코를 100개 만들어 붙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35개뿐이었다. 나머지는 런던 어디엔가 숨어 있는 것이다. 세월이 너무 흘러 버클리도 어디에‘코’를 붙였는지 기억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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