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과 포르토벨로 로드

by leo


1922년 10월 열아홉 생일을 막 지난 에릭 아서 블레어는 ‘히어포드셔’ 호 난간을 잡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배가 영국 런던을 떠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블레어는 지금 버마로 가는 길이었다. 그곳에서 경찰로 일하기 위해 먼 바닷길을 항해했다.


블레어는 사실상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그해 3월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성적이 워낙 나빴던 데다 부모가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 등록금을 대줄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버마로 가기로 했다. 버마에는 외할머니가 홀로 살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이었던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만 남겨놓고 벌써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다.


배는 보름을 더 달려 마침내 랑군에 도착했다. 낯설고 지저분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도시였다. 부두에는 손을 벌리며 달려드는 어린 거지들이 득실거렸다. 블레어는 갈 곳이 없어 여기까지 온 신세가 다시 처량하게 느껴졌다. 한 달 동안의 항해로 지친 몸을 쉴 숙소에 짐을 풀면서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갈등이라는 거친 파도와 싸웠다.


블레어는 버마에서 5년간 경찰로 일했다. 그동안 수많은 일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버마에 왜 영국경찰이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그는 뜻하지 않게ㅔ 버마의 민중을 착취하고 탄압하는 방망이 역할을 하는 경찰로 일하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 깊은 죄의식이 그의 내면에서 서서히 커졌다.


블레어는 저녁이면 랑군의 작은 술집을 찾곤 했다. 프랑스에서 여기자로 일했던 엘리사 마리아와 친구가 돼 매일 저녁 이야기를 나누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친구라고는 책 밖에 없었던 블레어에게 마리아는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그들은 틈만 나면 이곳에서 만나 버마의 우울한 현실, 제국주의의 이중성, 인간의 본질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했다.


“대영제국의 실체가 뭔지 이제 이해할 것 같아요. 영국이 어떻게 외국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지 알 수 있게 됐답니다.”

“블레어 씨. 여기서 많은 것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영국은 절대 신사의 나라가 아니랍니다. 영국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알면서도 눈을 감고 있는 엄청난 악행들이 이곳 버마에서 벌어지고 있답니다.”


블레어는 동료 경찰관들이나 버마 사람들로부터 매우 독특한 영국 경찰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색적이게도 버마의 소수민족인 카렌족의 교회에 다녔다. 그는 또 양팔에 버마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 버마 사람들은 문신을 하면 악마를 물리치고 뱀에게도 물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의 상사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친구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엘리사, 버마의 아픈 현실을 영국의 양심적인 사람들이나 세계에 알릴 방법이 없을까요? 당신은 기자로 일해 봤으니 잘 알 것 아닌가요?”

“블레어, 글을 써 보는 게 어때요? 곁에서 보니 당신 글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이곳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해서 책으로 내는 게 어떨까요?”

“내가 글을 쓴다고요?” 


블레어는 글을 써보라는 마리아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과연 내가 글을 쓸 능력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글을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리아와 헤어진 그는 밤새 글을 쓰는 문제를 고민하느라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블레어는 버마에서는 책을 쓰지 않았다. 그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버마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냈다. <교수형(1931년)>, <버마의 나날들(1934년)>, <코끼리를 쏘며(1936년)> 등이 그가 쓴 책들이었다.


블레어는 1927년 뎅기열병에 걸리는 바람에 장기휴가를 얻어 고향인 사우스월드로 돌아갔다. 한 달 정도 치료를 해서 병을 고쳤지만 악몽 같았던 버마로 다시는 가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직업을 잃어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는 버마에서 마리아가 글을 써보라고 한 기억이 떠올랐다.


블레어는 부모와 평소 친분이 있던 루스 피터에게 원고를 동봉한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루스 피터의 원래 이름은 엠마 토머스 피터였는데, 당시 영국에서 매우 유명한 여류시인이었다. 기다리던 답장은 한참 뒤에 왔다.


‘런던에 오세요. 포르토벨로 로드에 집을 구해드릴 테니 그곳에서 글을 써보는 게 어때요?’


블레어는 편지를 읽으면서 정말 기뻐했다. 자신을 알아주고 도와주는 사람을 찾았다는 게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블레어는 바로 런던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구해준 포르토벨로 로드의 집에 짐을 푼 뒤 곧바로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피터 씨가 보기에는 제가 글을 써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글쓰기 소질은 충분히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시적 표현력은 아직 떨어져요. 무엇보다 당신이 알고 있는 내용부터 차근차근 정확하게 한 번 써보는 게 좋겠네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내용을 글로 쓰든지, 아니면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써도 되겠네요. 이렇게 하나하나 써 나가다보면 분명히 훌륭한 글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블레어는 다음날부터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그는 주로 이스트엔드를 돌아다녔다. 개발이 덜 된 탓에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 늦게 녹초가 돼 집에 돌아오는 가장, 남편의 적은 월급을 보충하기 위해 온갖 잡일을 하며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발버둥치는 여자, 부모가 일하러 나간 사이 집이나 동네 골목에서 흙먼지를 먹으며 뒹구는 어린아이….


블레어는 버마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이스트엔드 사람들의 모습이 묘하게도 겹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어디에나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버마 사람들이 제국주의의 탄압 아래 신음한다면, 런던의 빈민들은 자본주의의 억압에 시달렸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자유와 평등은 없었다.


블레어는 포르토벨로 로드에서 5년 동안 살았다. 비록 세상의 이목을 끄는 작품은 하나도 쓰지 못했지만, 세상에 대한 눈을 뜨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포르토벨로 로드를 떠나고도 몇 년이 지난 후였다.


블레어는 나중에 <동물농장(1945년)>, <1984년(1949년)> 등을 썼다. 그의 필명은 조지 오웰이었다. 지금도 포르토벨로 로드에 가면 그가 살았던 집 앞에 ‘여기 조지 오웰이 살았다’는 푸른색 동판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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