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레이쇼 넬슨 제독은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무렵에 눈을 잠깐 붙였는가 했는데 어느새 아침이었다.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니 밤에 잠을 제대로 자기가 쉽지 않았다.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다소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기지개를 쭉 켰다. 트라팔가 광장에는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웅성거렸다.
“라이언들아, 잘 잤니? 오늘도 또 시끄러운 하루가 시작됐구나.”
넬슨 제독은 발밑에 앉은 4마리 사자에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그가 1840년 트라팔가 광장에 온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그를 지켜온 사자들이었다.
“제독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제독님….”
분수대 쪽을 향해 앉은 사자가 넬슨 제독에게 인사말을 한 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왜 그러니? 밤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제가 아니고, 제독님께….”
“내게…? 무슨 말이지?”
사자의 답이 오기도 전에 넬슨 제독은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 한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그는 태연하게도 샌드위치를 먹으며 차를 마셨다.
“자네는 누군가?”
“하하. 제독님, 밤새 잘 주무셨나요? 몰래 제독님 동상에 올라와 죄송합니다. 저는 코미디언 게리 윌모트예요.”
“여기는 어쩐 일로, 또 어떻게 올라왔나?”
“혼자 조용히 사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여섯시의 쇼’라는 프로그램에 제가 출연하게 돼 있는데 오늘 아침에 여기서 방송을 하기로 했거든요. 저기 밑에 방송장비가 보이시죠? 저와 제독님은 지금 생방송으로 TV에 나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재미있는 젊은이로군. 하기야 자네 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지.”
제독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윌모트를 보며 다른 여러 젊은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197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한다며 올라왔던 에드 드루몬드, 1995년 캐나다 원주민 이누이트 부족 인권 보호를 외쳤던 사이먼 나딘과 노엘 크레인. 2003년에 티베트 인권 보호를 주장하며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던 코딘.
“저 말고도 여기 올라온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죠? 저처럼 정신 나간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군요.”
“정신이 나간 게 아니지. 다들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어.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들이었던 거야.”
“제독님, 저기 밑에서 경찰이 내려오랍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잘 쉬다 갑니다.”
“잘 가게. 윌모트. 시간이 되면 다음에 한 번 더 놀러오게.”
넬슨 제독은 동상에서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윌모트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요즘 젊은 세대는 과거 세대에 비해 용기가 부족한데, 윌모트는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구구~~, 구구~~.”
넬슨 제독이 윌모트를 내려다보는 사이 제독의 어깨에 비둘기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오! 도브구나.”
“제독님, 밤새 심심하셨죠?”
제독의 어깨에 앉은 비둘기는 도브였다. 덩치가 크지는 않지만 얼마나 말을 재미있게 잘하는지 과묵한 제독을 늘 웃게 만드는 비둘기였다.
“방금 여왕님이 버킹엄 궁전에서 프랑스 대사를 만났답니다. 식사는 하지 않고 차만 드시더군요. 여왕님이 프랑스 대사를 각별히 챙기시는 것 같아요.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 티타임을 가지셨잖아요.”
“여왕님이 너무 바쁘신 것 같아. 그러다 건강을 상하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시나? 쉬어가면서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참, 어제는 코벤트가든에 다녀왔거든요. 지하 1층 식당에 새로운 흑인 요리사가 왔더라고요. 독특한 볶음밥을 만드는데 얼마나 맛이 좋은지 사람들이 그걸 사먹으려고 길게 줄을 서고 난리예요.”
“정말 맛있는 모양이구나. 다음에 다시 가거든 내게도 볶음밥을 조금 가져다주렴. 맛이라도 좀 보게.”
“네, 그렇게 할게요. 제독님. 그럼 저는 먹이를 구하러 이만 갑니다.”
비둘기들은 제독에게는 친구이자 세상 이야기를 전해주는 메신저였다. 런던 시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이야기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시시콜콜 전해주곤 했다. 한 녀석이 제독의 어깨에 앉아 이야기를 늘어놓고 떠나면 다른 녀석이 다시 찾아와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갔다.
넬슨 제독이 관광객들에게 기념사진의 배경이 돼주며 하루 종일 광장을 지키면서도 런던 곳곳의 소식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다 비둘기 덕분이었다. 제독이 얼마나 많은 런던 정보를 갖고 있는지를 사람들이 알았다면 아마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그가 100년 이상을 트라팔가 광장 한복판에 홀로 서 있으면서도 전혀 외롭지 않았던 것도 비둘기 덕분이었다.
2.
2001년 1월이었다. 하늘은 평소와 같이 잔뜩 흐렸다. 내셔널 갤러리 지붕과 비슷한 짙은 회색의 먹구름은 마치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붕이 구름인지, 구름이 지붕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버나드 레이너 씨는 말없이 내셔널 갤러리 앞 계단에 앉았다. 그는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처럼 기분이 우울했다. 마치 세상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끊임없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벌써 여러 시간째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이 정리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어지러워지기만 했다.
레이너 씨 근처에 앉은 사람들은 다들 편안해보였다. 커피를 마시거나 팝콘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며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쪽에서는 카메라를 눈에 갖다 댄 외국인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멀리 분수대에서는 아시아에서 온 듯한 여자들이 깔깔대댔다.
‘저렇게도 좋을까?’
레이너 씨 옆에 비둘기가 몇 마리 내려앉았다. 비둘기들은 낮은 음성으로 구구대면서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는 레이너 씨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미안하구나. 이제는 너희들에게 더 이상 줄 게 없단다. 너희들처럼 나도 이제 여기를 떠나야해. 어디 가서 뭘 할지 고민해봐야 해.”
“구구~구구구~.”
비둘기들은 마치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들의 작은 얼굴에서도 아쉬움이 흘러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 레이너 씨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듯했다.
레이너 씨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관광객들에게 비둘기 먹이를 파는 사람이었다. 10대 후반부터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벌써 40년이 다 돼 갔다. 그는 비둘기 먹이를 팔아 번 돈으로 두 아들을 대학까지 보냈고, 런던 외곽에 작지만 번듯한 개인주택도 하나 마련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비둘기 먹이 장사가 제법 잘 된 덕분이었다.
트라팔가 광장은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장소였다.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 데다 화이트홀, 빅밴, 버킹엄 궁전 등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었다. 광장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른 무엇보다 관광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광장의 비둘기들이었다. 누가 모이를 주려는 자세만 잡아도 비둘기들은 어디에 있었는지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러다 관광객이 장난을 치느라 뛰어다니면 바위에 부딪혀 흩어지는 파도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비둘기 먹이를 파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런던시청에서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실제 허가증을 받은 사람은 겨우 수십 명에 불과했다. 광장의 비둘기들은 많을 때는 3만 5000마리에 이를 정도였다. 1년 내내 끊임없이 몰려드는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은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장면을 사진에 담으려고 쉴 새 없이 먹이를 구입했다.
멀리서 데이비드 존슨 씨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버나드 씨와 함께 수십 년 동안 비둘기 먹이를 팔아온 친구였다. 밥도 못 먹었는지 온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데이비드. 왜 그렇게 맥이 빠진 표정인가? 집에서 밥도 안 챙겨준 모양이지?”
“글쎄 말이야. 요즘 돈도 못 벌어온다고 집사람이 은근히 구박을 하긴 하지. 흐흐.”
“이리 와서 앉게. 물이나 좀 마시려나?”
“아니, 됐어. 방금 커피 한 잔 마셨거든.”
레이너 씨가 맥이 풀린 채 계단에 앉아 있고, 존슨 씨가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평생 비둘기 먹이를 팔아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게 됐다. 런던시청이 4월부터 장사를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는 런던에서는 항상 논쟁거리였다. 비둘기 똥이 광장의 석조 건축물을 부식시키고 위생상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인근의 내셔널 갤러리 측은 런던시청에 “비둘기를 없애지 않으면 얼마 못 가 내셔널 갤러리 건물이 크게 손상될 것”이라고 불평을 터뜨리기도 했다. 런던시청은 쥐와 비둘기들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병이 5000가지를 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런던시청은 트라팔가 광장에서 비둘기들을 쫓아내기 위해 모이 판매부터 막기로 했다. 런던시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관광객들이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다 발각되면 벌금 500파운드를 물게 하는 조례를 제정하기도 했다.
“버나드. 어제 신문을 보니 자네 시청하고 합의를 했다며?”
“음, 그랬지. 이제 나도 지쳤어.”
“다른 비둘기 먹이 장사꾼들은 모두 떠났고, 마지막 남은 자네가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들을 지키는 수호자라며 인기가 대단했는데…. 아쉬워.”
“….”
레이너 씨는 어제까지만 해도 트라팔가 광장에서 비둘기 먹이를 팔았다. 여러 달 전 런던시청이 먹이 판매를 금지하자, 그는 곧바로 법원에 판매금지 중단 가처분신청을 내서 이겼다. 다른 먹이 판매상들이 트라팔가 광장을 떠난 뒤에도 혼자 먹이통을 들고 광장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런던시청을 상대로 싸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러 달째 장사도 하고 법원에도 들락거리느라 그의 체력은 바닥이 났다. 정신적 피로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의 부인은 “이제 돈도 충분히 벌었으니 장사를 그만두라”고 남편을 달래기도 했다.
레이너 씨는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 먹이를 파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 해온 일인 데다 그가 떠나면 누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나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광장에서 먹이를 파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도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비둘기들은 광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장사를 그만두는 대가로 합의금은 얼마나 받기로 했나?”
“허허. 그게 뭐 중요하겠나?”
“그래도 이 사람아. 기왕에 버티다가 합의했는데, 돈은 제대로 받아야지.”
“돈을 받기로 했지. 하지만 그 돈은 내 것이 아니야. 동물보호단체에 모두 기증하기로 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자네가 평생 지켜온 일자리를 내주는 대가로 받는 돈이잖아. 그걸 자네가 써야지 왜 엉뚱한 데다 주나?”
“자네도 알다시피 일자무식에 무일푼이었던 내가 가족을 먹여 살리고 집까지 사게 된 게 누구 덕인가?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들 아닌가? 비둘기들은 나의 인생 그 자체였다네. 트라팔가 광장에 와서 비둘기가 먹이를 먹고 하늘을 힘차게 나는 모습을 보면 늘 힘이 나곤 했지. 이제 나는 여기를 떠나면 집사람과 편안하게 다른 장사를 하면 되지만, 비둘기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나? 그 생각을 하면 요즘 잠이 안 온다네. 우리 식구를 먹여 살려준 비둘기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적은 돈이라도 기부하는 게 비둘기들한테 주는 나의 마지막 먹이라네.”
“이제 저 비둘기들은 어디로 가려나?”
“글쎄 말일세. 갈 데가 없을 텐데…. 여기뿐만 아니라 BBC방송국, 패딩턴역, 대영박물관, 리버풀 우체국 같은 곳에서도 비둘기를 쫓아내려고 한다던데 말이야.”
“비둘기들이 건물이나 기둥 같은 곳에 앉지 못하게 하려고 쇠로 만든 꼬챙이를 달아놓기로 했다더군. 비둘기들이 걱정이야. 높은 곳에 앉지 못하면 고양이들한테 금방 잡아먹히고 말 텐데….”
“데이비드. 이제 그만 가세. 우리 동네 펍에 가서 맥주나 한 잔 하세. 오늘은 내가 사지. 앞으로 트라팔가 광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생각이라네. 여기 다시 오면 비둘기들이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비둘기들이 다 떠나면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넬슨 제독 동상과 사자상은 외로워서 어떡하려나. 그래도 전에는 비둘기들이 제독 동상이나 사자상 어깨에 떡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야.”
런던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제 트라팔가 광장에 가도 비둘기들을 볼 수 없다. 가끔 갈 곳이 없는 녀석들이 한두 마리씩 날아오곤 하지만, 그것도 그야말로 아주 가끔일 뿐이다. 물론 비둘기들이 무더기로 하늘을 나는 경우도 있다. 각종 경축 행사를 하거나 영화를 촬영할 때다. 하지만 행사나 촬영이 끝나면 비둘기들은 다시 차량에 실려 다른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