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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제독과 트라팔가 광장

by leo



1.


호레이쇼 넬슨 제독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구름떼가 흘러갔다. 구름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게 마치 비둘기 모양처럼 보였다. 비가 올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약하게 불었다. 남남서풍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비둘기는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사인데…. 오늘은 프랑스의 빌뇌브 제독이 미끼를 물고 항구 밖으로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오려나?’


넬슨 제독이 HMS 빅토리호를 몰고 카디즈와 지브롤터 해협 사이에 있는 트라팔가 곶까지 온 것은 1805년 9월 27일이었다. 지금이 10월 19일이니 벌써 20일 이상이 지났다. 그는 지난 4월초부터 빌뇌브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를 뒤쫓는 중이었다.


스페인으로 달아난 빌뇌브 제독은 카디즈 항구에 틀어박힌 뒤 나와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계속 흐른다면 넬슨이 이끄는 영국군은 식량 문제 등 때문에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넬슨 제독은 몸을 돌렸다. 배 밑 방으로 내려가 잠시 눈이라도 붙일 생각이었다. 이때 뱃머리에서 연락병이 급하게 달려왔다.


“제독님, 프랑스에 파견된 첩자에게서 전갈이 왔습니다.”

“그래? 무슨 내용인가?”

“나폴레옹 황제가 빌뇌브 제독을 경질한다고 합니다. 카디즈항에 숨어있지 말고 나가서 전투를 하라고 수차례 독촉했지만 싸우지 않는다며 바꾸기로 했다고 합니다. 지금 새 제독이 프랑스에서 카디즈로 달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잘 됐군.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빌뇌브 제독이 며칠 내에 항구에서 빠져나와 우리와 사생결단을 내려하겠군.”

“빌뇌브 제독은 경질되면 조용히 프랑스로 돌아갈 텐데 왜 우리랑 전투를 하겠습니까?”

“자네는 뭘 모르는군. 빌뇌브 제독은 이대로 돌아가면 총살형을 당할 걸세. 비겁자라고 말이야. 그렇게 죽느니 차라리 우리와 한판 맞장을 뜨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명예를 지키며 전장에서 죽겠다는 생각이겠지. 전장에 나간 장수는 어지간해서는 바꾸는 게 아니야. 나폴레옹 황제는 급한 마음에 실수를 한 거지.”

넬슨 제독은 바다를 둘러보았다. 콜로서스호, 마르스호, 디펜스호, 아가멤논호 등 위풍이 당당한 대영제국의 배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HMS 빅토리아호 주변의 바다를 메웠다. 그때 저쪽에서 다시 다른 연락병이 급하게 달려왔다.


“제독님, 적선들이 드디어 항구를 떠났다는 전갈이 날아왔습니다.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온다고 합니다.”

“그래! 내 생각대로야. 이제 됐군. 모두 몇 척이나 된다고 하는가?”

“33척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보다 6척 정도 많습니다.”

“6척 차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 저들이 항구 밖으로 나왔다면 우리의 승리는 이제 시간문제로군. 모든 배에 알려라. 적선들이 항구에서 나왔다고. 이제 하루 이틀 뒤면 전투를 시작할 것이라는 전갈을 보내라.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이야기도 더해서 전하도록 하라.”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가 바다로 나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모든 영국군 함선에게 전파됐다. 소식이 전해진 각 배에서는 “와!” 하는 함성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바다 한가운데였지만 뜨거운 열기가 배에서 배로 전달돼 바다가 훅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였다.


“모든 배에 다시 소식을 전하라. 밤에도 잘 보이도록 배의 모든 마스트를 노란색으로 칠하도록 하라. 적들은 마스트를 검은색으로 칠했다. 밤에 자기들끼리 혼란을 겪을 것이다. 자, 이제 돛을 올려라.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적선을 향해 우리가 먼저 달려가자.”


넬슨 제독의 명령이 떨어지자, 영국 함대는 일제히 돛을 올리고 바람을 따라 바다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이미 앞선 여러 차례의 해상전에서 프랑스 함대에 연전연승을 거둔 기세가 그들보다 먼저 적선들을 향해 달리는 듯했다. 약한 바람이었지만 배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기에는 충분했다. 영국 해군 병사들의 가슴에는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높아졌다.


넬슨 제독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새벽 4시였다. 어제는 제법 바람이 높았지만 지금은 다시 잦아든 상태였다.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와의 거리는 불과 15㎞ 정도였다. 그는 이제 공격을 시작할 시간이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갑판 위로 올라간 뒤 HMS 빅토리호의 모든 병사들을 불러 모은 뒤 근엄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1805년 10월 21일 오늘 아침은 영국 최고의 날이 될 것이다. 여러분과 가족 모두에게는 가장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 자, 이제 우리 모두 신에게 기도를 드리자. 오, 위대한 하나님이시여. 저의 조국과 모든 유럽 국가에 엄청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허락하소서. 어떤 실수도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전투가 끝난 뒤 대영제국 함대에 인간애가 흘러넘치게 해주소서. 저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노니, 평생을 조국 수호에 바친 저에게 영광의 빛이 비치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넬슨 제독은 모든 병사에게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리고 바로 신호담당 부관 존 파스코를 불렀다.


“파스코, 이제 모든 함선에 공격 신호를 보낼 때가 됐다. ‘조국은 모든 병사가 제 임무를 다 하기를 믿는다’(England confide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는 내용의 신호를 보내도록 하라. 이 신호와 함께 총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제독님, ‘믿는다’보다는 ‘바란다’(expect)라는 표현을 쓰는 게 어떨까요? 암호를 만드는 데 그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파스코.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나. 그렇게 하도록 해라.”

“옛, 제독님, 서둘러 신호를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파스코는 신호 깃발을 만들어 마스트에 내달았다. 모든 배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전 함선 공격 개시’라는 간단한 공격 신호만 받아 왔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감동적인 공격 신호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고향에 계신 연로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딸, 보고 싶은 누나와 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벽이어서 옆 사람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순식간에 붉어진 그들의 얼굴에서는 전의가 불타올랐다.


영국 함선들은 앞 다퉈 적선을 향해 달려 나갔다. 대포 소리가 터져 나오고 총성이 연이어 울려퍼졌다. 배끼리 부딪히는 큰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수천 년 전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셌던 사나이 헤라클레스가 소떼를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지나갔다는 지브롤터 해협 앞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국운이 걸린 절체절명의 해전을 벌였던 것이었다.


HMS 빅토리호의 토마스 하디 함장은 갑판 위에 선 넬슨 제독을 돌아보았다. 적선들의 대포와 총탄은 빅토리호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다른 영국 함선들이 빅토리호를 엄호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지만, 빅토리호가 입은 타격은 적지 않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넬슨 제독은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갑판 위에 서서 전투상황을 지켜보며 작전을 구상했다. 그는 제독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제독님, 프랑스군 저격병들이 제독님의 옷을 보고 표적 사격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옷에 붙은 각종 휘장을 떼어내 제독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 좋은 생각이군. 그러나 하디 함장.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네. 내가 옷에 휘장을 달고 있으면 적들도 나를 알아보지만 우리 병사들도 나를 알아보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지 않겠나.”

“그러시다면 집중공격을 받는 빅토리호 대신 다른 배로 옮겨서 지휘를 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나는 자네와 함께 빅토리호를 지키겠네.”


하디 함장은 넬슨 제독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걱정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함장이 고집을 피우니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그는 제독에게 그렇다면 몸을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옮기라고 권유했다. 제독은 그렇게 하겠노라며 발걸음을 여러 걸음 배 안쪽으로 옮겼다.


오전 9시. 치열한 전투는 날이 밝아서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해가 떠서 세상이 환해지자 넬슨 제독이 승선한 빅토리호는 계속해서 적의 집중포격을 받았다. 포탄이 배 이곳저곳에 떨어졌다.


커다란 포탄 하나가 갑판에 적중해 넬슨 제독의 부관 존 스콧이 목숨을 잃었다. 하디 함장의 부관도 역시 숨을 거뒀다. 또 다른 포탄이 배에 명중해 병사 8명이 죽고 말았다. 적선에서 저격병들이 쏘는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중 한 발은 하디 함장의 발끝 바로 앞에 떨어져 튕겼다. 일부는 그의 옆을 핑핑 하며 지나갔다. 하디 함장은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몸을 뒤로 돌렸다. 바로 뒤에 서 있던 넬슨 제독이 보이지 않았다.


“제독님!”


하디 함장은 넬슨 제독이 서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넬슨 제독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흘렸다. 한 손은 피가 쏟아지는 오른쪽 가슴을 부여잡고, 다른 한 손은 갑판을 짚었다.


“제독님, 괜찮으십니까? 총탄을 맞으신 겁니까?”

“하디, 결국… 그놈들이 해냈군. 나를 맞히고… 말았어. 허허. 가슴을… 관통한 것 같군.”

“모두 여기로 모여라. 제독님이 다치셨다. 어서 배 밑으로 제독님을 옮겨라.”


하디 함장은 병사들을 모아 제독을 이송하라고 지시했다. 병사들은 전투를 멈추고 제독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힘을 합쳐 제독을 들어 올렸다. 넬슨 제독은 호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총탄을 맞고 실려 가는 사람이 영국 해군 지휘자라는 사실을 영국군이나 적군이 아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넬슨 제독은 침대에 누웠다. 군의관 윌리엄 비티가 달려왔다.


“비티, 자네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군. 내가 살 시간이… 얼마 안 될 것 같아. 나를 좀… 앉혀주게.”


비티는 제독의 팔을 잡아 침대 머리 쪽에 앉혔다.


“전투 중에… 미안하네만… 레모네이드 한 잔 하고 물을 섞은… 와인 한 잔만 갖다 주겠나. 목이 너무 말라서…. 아, 그리고 하디 함장을 불러…주게.”


하지만 하디 함장은 좀체 내려오지 않았다. 전투가 워낙 치열한 탓에 그에게 제독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함장은 한참 뒤에야 제독의 방으로 들어왔다. 제독은 함장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힘겹게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함장…이마에…내 이마에…작별의 입맞춤을 해주겠나?”


하디 함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넬슨 제독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고…맙네. 함장…. 신의 축…복이 자네에게 있…을 걸세.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저는 제 의무를 다… 했다.”


넬슨 제독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더 이상 그의 입에서는 어떤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 여러 시간 뒤 넬슨 제독의 방 밖에서는 영국군의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프랑스, 스페인군이 모두 달아난다.”



2.


시계는 벌써 오후 1시를 향해 달렸다. 윌리엄 마스던 영국 해군장관은 여전히 해군성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그는 트라팔가 전투가 시작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 사무실을 며칠째 떠나지 않았다. 이제 전투가 끝났을 때가 됐을 터이고, 그렇다면 이겼든 졌든 소식이 날아올 때가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가?”

“장관님. 연락장교입니다.”

“어서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연락장교는 차분한 모습이었지만 얼굴에서는 땀이 쏟아졌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마스던 장관의 마음에도 연락장교의 얼굴에서처럼 긴장의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떻게 됐나?”

“장관님. 우리가 대승을 거뒀습니다. 적함 33척 중 22척을 침몰시켰고 8천여 명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무슨 말인가?”

“넬슨 제독께서 흉탄에 맞아 전사했다고 합니다.”

“아…! 넬슨 제독이…. 그 고집쟁이가 결국….”


마스던 장관은 버햄 경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궁으로 달려갔다. 조지 3세 국왕 역시 전투 소식을 기다리느라 침대에 들지 못했다.


“마스던 장관, 버햄 경. 어서 오시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구먼. 전투 소식은 어떻게 됐소? 우리가 이겼나요, 졌나요?”

“전하, 대승을 거뒀습니다.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을 완전히 격멸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하하. 정말 잘 됐군. 이제야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겠군. 넬슨 제독이 조국을 위해 정말 큰일을 했어.”

“그런데 전하….”

“왜 그러나? 장관. 어서 말해보게.”

“넬슨 제독은 전투 도중 총탄을 맞고 전사했습니다.”

“….”


조지 3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넬슨이 세상을 떠났다고…. 조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건져놓고, 짐으로부터 치하의 말 한 마디 듣지 않고, 그 좋아하는 와인 한 잔 받지 않고 그냥 그대로 가 버렸다고….’


조지 3세는 침대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넬슨, 자네에게 빚 진 게 너무 많군.’


조지 3세는 슬픈 표정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짐이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소. 우리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얻었지만, 너무나 큰 희생을 치렀어.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은 승리야.”



3.


넬슨이 세상을 떠나고 2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1830년 화창한 어느 봄날 오후였다. 건축가 조지 레드웰 테일러는 화이트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운 한낮의 산책처럼 보였지만 그의 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울위치 강의 제방 공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이듬해까지 공사를 마무리지어야하는데 생각보다 공사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침 에드워드 크레시가 걸어왔다. 크레시는 제임스 버튼 교수 밑에서 건축학을 동문수학한 절친한 친구였다. 힘들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에게 도움을 주던 고마운 친구였다. 테일러는 크레시와 함게 근처 선술집에서 위스키나 한 잔 하면서 울위치 강 제방에 대한 자문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레시, 어디 가는 길인가?”

“오, 테일러, 얼굴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골치 아픈 일이 있지. 울위치 강 제방 공사 때문이라네. 일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야. 나랑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조언을 좀 해주게나.”

“좋아. 나도 마침 술 한 잔 하고 싶던 참이었는데 잘 됐군. 참, 그리고. 그 이야기는 들었나?”

“무슨 이야기 말인가?”

“저기 위에 차링크로스 부근에 국왕의 마구간 부지 있지 않나? 지금 재개발해서 광장으로 만들려는….”

“응, 나도 알지. 그 부근에 내 땅도 좀 있거든.”

“그 광장 이름을 벌써 지었다더군.”

“그래. 나는 처음 들어보는군. 뭐라고 이름을 붙이기로 했지. 국민의 광장, 아니면 조국의 광장?”

“허허. 이 사람, 왜 이러나. 순진하게. 윌리엄 4세 국왕 광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네.”

“뭐라고? 국왕 전하의 이름을 붙인다고.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올해 갓 즉위하신 국왕의 이름을 어떻게 광장에 붙인단 말인가?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글쎄 말이야. 올해 국왕 전하 연세가 65세이신데 벌써 노망이 나셨나?”

“크레시. 안 되겠네. 우리 술은 내일 하도록 하세. 나는 국왕 전하를 뵈러 가야겠네.”

“국왕 전하는 왜?”

“광장 이름을 바꾸라고 권유해야겠네. 그럼 나는 먼저 가겠네.”

“이봐. 테일러. 이 사람아, 자네가 어떻게….”


테일러는 윌리엄 4세 국왕과 즉위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40대 중반의 젊은 건축가인 그의 건축 스타일은 국왕의 눈길을 끌었다. 테일러는 가끔 국왕의 초대를 받기도 했고, 어떤 때는 불쑥 국왕을 찾아뵙기도 했다. 게다가 윌리엄 4세 국왕은 원래 역대 다른 국왕들과는 달리 형식적인 것을 싫어했다. 누구든지 언제나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환영하던 사람이었다.


테일러는 윈저궁으로 마차를 달렸다. 내리자마자 시종장에게 국왕 알현을 요청했다. 시종장은 국왕에게 테일러가 뵈러왔다고 전했다.


“테일러. 이 시간에 갑자기 웬 일인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전하. 예의도 없이 불쑥 찾아온 저를 책망하지 않으셔서 황송하옵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이 시간에 그냥 오지는 않았을 테고….”


테일러는 잠시 뜸을 들였다. 국왕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국왕을 바로 질책하기보다는 국민을 들먹이자는 것이었다.


“전하께 한 가지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전하께서는 지금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는데,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있다고 보시옵니까?”

“그렇게 썩 나쁘다고 보지는 않네. 하지만 인기라는 게 물거품 같아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지.”

“전하께서는 최근 프랑스 요리사와 독일 악단을 해고하셨습니다. 또 조지 3세 전 국왕 전하께서 추진하던 버킹엄궁 보수 공사도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축소시키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거야 국민들 때문이지. 아무리 국왕이라도 돈을 물 쓰듯 하면 국민들이 좋아하겠나. 국왕이란 모름지기 국민들이 좋아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전하께 여쭤보겠습니다. 최근 차링크로스 인근을 광장으로 개발하면서 이름을 윌리엄 4세 광장으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야, 뭐…. 새롭게 국왕이 됐으니 국민들에게 내 이름도 알릴 겸….”

“전하께서는 방금 국왕이란 국민들이 좋아할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국왕이 새로 짓는 광장 이름을 국왕 이름으로 붙이면 좋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그것은 생각해보지 않아서….”


아무리 국왕과 친하다고는 해도 테일러의 말은 사실 목숨의 한계선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발언이었다. 국왕의 성품이 조금이라도 고약한 사람이었다면 그는 벌써 병사들에게 팔을 붙들린 채 끌려 나가 바로 목을 도부수들에게 맡겼을지도 모를 처지였다. 그러나 윌리엄 국왕은 원래 차분하고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전하. 저를 무례하다고 책망해 주십시오. 이제 갓 권좌에 오른 국왕이 광장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다면, 국민들이 ‘새 국왕은 국민들보다는 자신을 과시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는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저는 심히 우려됩니다.”

“음….”

“감히 제가 생각할 때는 광장 이름을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국민들이 전하를 존경하게끔 만들고, 국민들을 하나로 묶을 그런 이름을 붙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뭔가?”

“25년 전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과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조국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들을 기념하는 장소가 하나도 없습니다. 런던의 중심지가 될 새 광장을 트라팔가 광장이라고 붙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국민들은 전하를 ‘욕심 없는 분’으로 우러러보게 될 것이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더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음, 총리인 버로엄 경의 충고에 따라 짐의 이름을 붙였는데…. 자네의 말을 들어보니 백 번 옳은 말이군. 자네의 충고를 따르도록 하겠네. 내일 당장 총리를 불러 새 광장을 트라팔가 광장으로 부르도록 지시하겠네. 고맙네.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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