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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08. 2024

바츨라프광장과 성 바츨라프 기마상

1.


카렐 하블리첵 보로브스키는 아직 온몸에 따스한 온천의 열기가 남은 걸 느끼며 고색창연한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황금색 도기 잔에 담긴 진한 커피에서 올라온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어 천천히 혀로 굴려 보았다. 다른 카페에서는 맛볼 수 없는 깊은 풍미가 깊숙하게 느껴졌다.


‘성바츨라프온천의 커피숍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이런 커피를 즐길 수 있을까?’


카렐 하블리첵은 두 손으로 도기 잔을 감싸 따스한 온기를 느껴 보았다. 손바닥으로 전해진 열기는 마치 연인의 뺨을 만진 것처럼 무척 다정하고 사랑스러웠다. 그의 옆에 앉은 파블로가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젊은 사람답게 새로운 문물을 즐길 줄 아는군. 나는 커피라는 걸 아무리 마셔도 쓰기만 할 뿐 맛이라는 걸 느끼지 못하는데 말이야.”


카렐 하블리첵은 커피 잔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뒤처지는 데 그칠 뿐 아니라 도태될 수 있습니다.”


카렐 하블리첵과 파블로가 앉은 곳은 프라하 남쪽 신시가지의 성바츨라프온천 안에 있는 커피숍이었다. 성바츨라프온천은 10세기 보헤미아에 기독교를 전파시킨 성 바츨라프가 처음 발견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달리다 하얀 사슴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사슴이 멈춘 자리를 파 보니 따뜻한 온천수가 솟았다. 성 바츨라프는 그 자리에 샘을 만들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했다. 


400년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렐 4세는 성 바츨라프를 기념하는 뜻에서 샘이 있던 자리에 온천 시설을 건설했다. 다시 500년 뒤인 1843년에는 페트르 팍스터라는 사람이 온천 1층에 커피숍을 열었다. 프라하에서는 유일하게 온천에 만들어진 커피숍이라서 금세 귀족 사이에 인기를 얻어 프라하 사교계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커피숍에는 카렐 하블리첵과 파블로 외에 나이를 불문하고 5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이날은 따스한 봄 아지랑이가 서서히 피어나던 1848년 3월 16일이었다. 그들은 닷새 전 같은 장소에서 체코의 민족주의 부흥을 목표로 하는 ‘성바츨라프위원회’를 출범시킨 적이 있었다. 이날 다시 모인 것은 위원회의 방향을 더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위원회 리더인 카렐 사비나가 일어나 주도적인 회원들끼리 미리 합의한 사항을 발표했다.


“19일과 31일 두 차례에 걸쳐 오스트리아 제국 페르디난트 5세 황제에게 ‘프라하 청원’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체코어와 독일어 동시 사용, 체코 민족주의 신문 창간, 성바츨라프위원회의 국민위원회 전환이 주요 내용입니다.”


카렐 사비나의 발표가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카렐 하블리첵도 자리에서 일어나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카렐 사비나는 이번에는 카렐 하블리첵을 앞으로 불러냈다.


“카렐 하블리첵 씨가 멋진 제안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습니다. 제가 발표하는 것보다는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카렐 하블리첵은 뜨거운 박수를 들으며 카렐 사비나 옆으로 다가갔다. 


“성바츨라프위원회의 활동이 성공을 거두려면 최대한 많은 사람의 호응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민족주의에 공감하고 독립에 찬성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체코 국민이 민족주의에 눈을 뜨게 할 새로운 제안을 내놓고자 합니다. 오늘 모임에 참석하신 모든 분은 잘 아실 겁니다. ‘말 시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사이의 넓은 공터를 말입니다. 이곳은 보헤미아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었던 카렐 4세 황제께서 만드신 곳입니다. 이렇게 깊은 의미를 가진 땅을 그냥 ‘말 시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곳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카렐 광장이라고 부르면 좋겠지만 이미 카렐 광장은 존재합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찾아보는 게 더 바람직합니다. 다행히 광장에는 17세기에 만든 체코의 또 다른 영웅의 동상이 있습니다. 10세기에 보헤미아를 다스린 국왕이었으며 보헤미아의 영원한 수호성인이며 우리 위원회에도 이름을 빌려주신 성 바츨라프입니다. 저는 광장에 그분의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합니다. 바츨라프광장! 체코의 주권과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광장의 이름으로 보헤미아의 수호성인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카렐 하블리첵이 연설 같은 웅변을 마치자 커피숍에서는 다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깜짝 제안이었다. 그가 놀라운 제안을 내놓으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파블로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등을 툭 쳤다.


카렐 하블리첵은 프라하 서쪽의 작은 마을 보로바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물여섯 살이던 1848년 귀족 보이테쉬 보임의 도움을 받아 ‘나로드니 노브니’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체코 역사상 최초의 체코어 신문이었다. 그가 쓴 글과 그가 만든 신문은 체코 여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그가 신문에 싣는 풍자시와 냉소적인 평론을 매우 좋아해 곳곳에 인용했다. 하지만 그를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오스트리아 황실은 1850년 1월 ‘나로드니 노브니’ 발간을 금지시켰다.



2.


“바츨라프광장에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원래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있던 걸 치워 버리고 10년 가까이 나 몰라라 하는 게 옳은 일입니까?”


1890년대 들어 프라하 시청에는 연일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국정과 시정에 관심이 많은 민족주의 성향의 귀족은 물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평민도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프라하 사람들은 어디에든 모이기만 하며 시청을 비난하면서 욕설을 퍼붓기 바빴다.


“바츨라프광장 맨 위쪽에 국립박물관이 들어선 게 벌써 7년 전이야. 나로드니 거리에 국립극장이 생긴 지도 10년이 넘었어. 성 바츨라프 기마상을 비셰헤라트 언덕으로 옮긴 것도 10년이 다 돼 가. 도대체 시청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프라하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기마상 때문이었다. 원래 바츨라프광장에는 16세기에 만든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 있었다. 그런데 기마상은 1879년에 철거돼 비셰헤라트 언덕으로 옮겨졌다. 광장 재정비 사업을 벌이던 도중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 옮긴 것이었다. 


빗발같이 쏟아지는 시민 항의에 견디다 못한 프라하 시청은 결국 새 기마상을 만들기로 했다. 이에 따라 1894년 1월 새 기마상 설계 공모전이 열렸다. 참가 자격은 체코에서 태어났거나 살고 있는 사람으로 한정됐다. 모두 8명이 공모전에 참가했는데 1등 수상자는 나오지 않고 당대 최고의 건축가 자리를 놓고 다투던 요제프 바츨라프 미슐벡과 보후슬라프 슈니르흐가 공동 2등으로 당선됐다. 


심사위원단은 두 사람에게 출품작을 고쳐서 다시 내라고 요청했다. 슈니르흐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담긴 깃발을 들고 군중에게 축복을 내리는 기마상을 고안했다. 미슐벡은 성 바츨라프를 전사로 묘사한 수정 작품을 제출했다. 예술계, 정치계는 물론 체코 전역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어느 것이 체코를 상징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성 바츨라프이냐는 것이었다. 치열한 논쟁 끝에 결국 최종 당선의 영광은 미슐벡에게 돌아갔다.  


미슐벡은 성 바츨라프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두고 고민하다 성비투스(체코어로는 비타 대성당의 성바츨라프예배당 ‘비밀의 방’에 보관된 보헤미아의 보물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 그가 남긴 모자와 칼, 그리고 옷을 보고 옛 모습을 상상력으로 떠올린 것이었다. 


미슐벡이 30여 년에 걸쳐 만든 성 바츨라프 기마상은 공식적으로는 1913년 제막했다. 기념물의 높이는 성 바츨라프가 든 창의 끝부분까지 7.2m였고, 무게는 총 5.5t이었다. 기마상의 중심에는 말을 탄 성 바츨라프가 섰다. 기마상 기단에는 ‘성 바츨라프, 체코의 왕이시여! 훗날 우리가 죽게 내버려두지 마소서’라는 글이 새겨졌다. 기마상 주변은 성 바츨라프의 할머니인 성 루드밀라, 13세기 자선사업에 헌신한 성 아네슈카, 동유럽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보이테쉬, 10세기의 은둔자 성 프로코프가 둘러싸고 있다. 네 성인은 모두 체코의 수호성인이다. 


성 바츨라프 기념물은 원래 국립박물관의 경사로에 설치할 예정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슐벡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위치가 너무 초라하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국민들도 미슐벡의 견해에 동조하고 나섰다. 오랜 갑론을박 끝에 기마상 설치 위치는 광장의 끝부분이자 국립박물관 앞으로 바뀌게 됐다. 체코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건물인 국립박물관 앞에 기마상을 세워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보게 함으로써 체코를 지키는 수호성인이라는 상징성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만들어진 성 바츨라프 기마상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보헤미아가 ‘최악의 어두운 시간’을 맞으면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 부활한다는 것이다. 깨어난 성 바츨라프는 말을 타고 카렐 다리로 달려간다. 카렐 다리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숨겨져 있던 마법의 칼이 강 위로 떠오른다. 이때 블란비크 산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블란비크 기사단이 깨어나 프라하로 달려온다. 성 바츨라프는 마법의 칼을 휘두르며 블란비크 기사단을 이끌어 보헤미아를 위기에서 구해 낸다. 


안타까운 사실은 1968년 소련군이 체코를 침공했을 때 성 바츨라프는 되살아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블란비크 기사단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당시는 체코에게 최악의 어두운 시간이 아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시간은 언제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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