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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07. 2024

네 사촌의 의기투합 체코국립박물관

“총독님, 고종사촌인 프란티섹 요제프 클레벨스베르크 백작과 카스파 마리아 슈테른베르크 백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날씨가 무척 화창했던 1818년 봄의 어느 날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라하 총독 프란티섹 안토닌 콜로브라트 백작은 반가운 손님을 맞았다. 여러 해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큰 고모와 둘째 고모의 두 아들, 즉 두 이종사촌 형이 사무실에 찾아온 것이었다.


콜로브라트 백작은 오랜만에 만나는 두 형이 정말 반가워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나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환한 표정의 두 형은 벌써 두 팔을 벌리고 복도 끝에서 사무실을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는 밝게 웃으며 두 형을 차례로 꼭 껴안았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자네와 내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에서 함께 일하던 게 4~5년 전이었어. 내가 빈을 떠난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세월이 그만큼 흘렀군.”


마흔 살인 콜로브라트 백작보다 열일곱 살이나 많았던 카스파 마리아 백작이 흐뭇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사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게 딱 맞는 취미를 찾은 거지.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콜로브라트는 네 살 많은 형 프란티섹 요제프 클레벨스베르크 백작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형은 재혼 문제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다면서?”

“말도 마라. 가톨릭 교회에서 재혼 허가를 안 해 줘서 결혼식을 못 올리고 있어. 벌써 여러 해째 동거만 하는 중이야.”


콜로브라트 백작은 낄낄 웃으며 장난삼아 형의 등을 탁 쳤다. 그는 두 형을 접견실로 데리고 가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창밖에는 화사한 꽃이 피었고 노란 나비가 하늘거리며 꽃 주변을 날아다녔다.


체코 최고 귀족 가문의 후손인 콜로브라트 백작은 능력이 뛰어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에서 10년 이상 최고위직을 역임했다. 뇌전증에 시달린 황제 페르디난트 5세 시절에는 황제 대신 국정을 운영한 ‘비밀 국정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나중에는 오스트리아 최초의 국무총리 자리에도 올랐다.


프란티섹 요제프 백작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카스파 마리아 백작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위해 일하지만 어릴 때부터 열성적인 민족주의자였지. 그래서 체코의 문학, 언어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체코의 민요, 설화를 책으로 묶어 내는 작업에 돈을 대기도 했어.”


프란티섹 요제프 백작은 잠시 말을 멈춘 다음 콜로브라트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콜로브라트 백작은 표정에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고 밝게 웃으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보헤미아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이지만 아쉽게도 국립박물관이 없어. 그러다 보니 국가적으로 귀중한 보물이나 유물을 수집할 수도 없어. 유럽에서 국립박물관이 없는 나라는 보헤미아뿐일 거야.”


콜로브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늘 그걸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왜 국립박물관이 없을까?”


이번에는 카스파 마리아 백작이 말을 받았다.


“그런 뜻에서 프란티섹 요제프 백작과 내가 일을 하나 추진하려고 해. 프라하에 국립박물관을 만드는 거야.”


콜로브라트 백작의 눈이 반짝하며 빛났다. 그의 얼굴에 감돌던 미소는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이 깃들었다.


“국립박물관을 만든다고요?”


카스파 마리아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자연사 학자여서 각종 자연사 자료를 많이 갖고 있지. 프란티섹 요제프 백작은 그림이나 고문서를 많이 확보하고 있고. 우리 둘이 먼저 각종 자료를 기부할 걸세. 그리고 프라하 시내를 돌아다니며 여러 귀족에게 귀중한 유물이나 그림, 문서를 기증하라고 재촉할 거야. 그걸 모아서 국립박물관을 만드는 거야.”

“국립박물관을 만들려면 두 분의 힘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먼저 사람들을 모아서 협회를 결성하고 그 뒤에 역할을 나눠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협회를 결성하려면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의 허가도 받아야 하고요.”


프란티섹 요제프 백작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나랑 형님이 자네를 찾아온 이유는 바로 그거야. 자네가 앞장서서 일을 추진해 달라고 부탁하러 왔어. 자네는 총독이니 국립박물관 설립 사업에 앞장서면 많은 귀족이 앞다퉈 동참할 걸세. 황제도 우리의 활동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말이야. 자네라면 황제의 허가를 받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콜로브라트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민족주의에 관심이 많던 그도 프라하에 제대로 된 박물관이 없어 아쉬워하던 터였다.


“그럼 제가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총대를 메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앞으로 모든 일은 두 분 형님께서 도맡으셔야 합니다. 저는 총독 일도 바빠 국립박물관 업무에 손을 대기는 쉽지 않습니다.”


프란티섹 요제프 백작과 카스파 마리아 백작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들은 이미 식어 버린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론이지. 이미 계획은 다 잡아놨어. 자네는 참석해서 독려만 해 주면 돼.”


사촌 동생의 승낙을 받은 두 백작은 일단 국립박물관에 관심이 많은 일부 귀족만 모아 회의를 열었다. 첫 회의가 열린 곳은 말라 스트라나 광장의 성 미쿨라시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슈테른베르크 궁전이었다. 세 백작의 또 다른 사촌 형인 프란티섹 요제프 슈테른베르크 백작이 살던 집이었다.


슈테른베르크 궁전은 프라하에서 예술, 과학의 중심지로 인정받던 곳이었다. 1770년에 설립된 ‘체코과학협회’ 본부였고, 1796년에 창립된 ‘애국적인 예술의 친구 협회’도 이곳에 본부를 두었다. 궁전에는 ‘애국적인 예술의 친구 협회’가 수집한 각종 미술품을 전시해 두는 갤러리도 있었다. 이 갤러리는 발전을 거듭해 나중에는 국립미술관이 됐다.


국립박물관 설립을 위한 첫 회의에는 네 사촌인 프란티섹 요제프 백작, 카스파 마리아 백작, 콜로브라트 백작, 슈테른베르크 백작 외에 문화, 예술 활동에 관심이 많던 귀족 여러 명이 참여했다. 협회 창립 회원의 자격이자 공통점은 두 가지였다. 민족주의자와 예술 애호가였다.


회의 참가자들은 국립박물관을 만들기 위한 전 단계로 ‘보헤미아 애국박물관 설립협회’를 창립하기로 합의했다. 협회 공식 설립일은 창립에 합의한 날로부터 2년 뒤인 1820년 6월 11일이었다. 오스트리아 황제 겸 보헤미아 국왕인 프란츠 1세로부터 승인을 받은 날짜는 1822년 6월 14일이었다.


‘보헤미아 애국박물관 설립협회’의 목표는 ‘체코의 번성을 위해 자연사적 유적과 각종 기념물을 수집해 적절히 이용하고 보존’하는 것이었다. 초대 회장으로는 카스파 마리아 백작이 뽑혔다. 그는 20년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각종 전시품 수집과 협회 발전에 열정을 불태웠다.


창립 회원의 역할은 여러 귀족에게서 전시품을 기증받고 전시품을 관리하기 위한 기부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전시품은 궁전에 보관하면서 수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라도 누구든지 관람할 수 있게 했다.


협회는 1827년부터는 협회 활동을 널리 알리는 ‘보헤미아 애국박물관 협회저널’을 발간했다. 이 저널은 이후에도 계속 발간되다 오늘날의 ‘체코 국립박물관 저널’로 바뀌었다. 첫 편집장은 역사학자 겸 작가이자 ‘체코 현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린 프란티섹 팔라츠키와 언어학자이면서 작가인 파벨 요제프 샤퍄지크였다.


협회 창립 회장인 카스파 마리아 백작은 공언한 대로 고생물학적 수집품과 식물 표본 등 2만여 점을 기증했다. 콜로브라트 백작은 각종 서적 3만 5천 권과 광물 수집품을 기증했다. 이밖에도 많은 귀족이 중세 도서, 박제 동물, 그림 같은 작품을 차례로 기증했다.


기증품은 처음에는 구시가지의 운겔트 뒷문 쪽에 있는 미노리테 수도원에 전시됐다. 전시품이 많아지자 헤라드차니에 있는 또 다른 슈테른베르그 궁전으로 옮겨졌다. 이곳마저 좁아지자 나중에는 신시가지 나 프르지코프예 거리의 노스틱 궁전으로 이전됐다. 결국에는 노스틱 궁전의 공간마저 부족하게 됐다. 그래서 새 국립박물관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국립박물관 건설 계획에 돌파구가 마련된 것은 신시가지 의회가 부지를 기부하겠다고 나선 덕분이었다. 의회는 1876년 바츨라프 광장 남쪽 끝부분의 부지를 내겠다고 발표했다. 당시만 해도 바츨라프 광장은 말 시장 그리고 들판과 목초지가 펼쳐져 시골 같은 곳이었다.


1885년 6월 27일 건설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공사가 시작됐다. 건설 주제는 ‘과학과 예술을 모시는 신전으로서의 박물관’이었다. 건축물 공사는 3년 만인 1888년에 끝났다. 총공사비는 건축가 급여와 가구 구입비 등을 빼고 금화 174만 개였다. 다른 부대비용까지 합칠 경우 200만 개였다.


실내외 장식 작업을 거쳐 정식 개장식이 열린 것은 1891년 5월 18일이었다. 장식 작업이 완벽하게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1901년이었다. 실내외 장식은 ‘국립극장 세대’라고 불리는 19~20세기 민족주의 예술가인 조각가 보후슬라프 슈니르흐, 안토닌 바그너, 안토닌 포프와 화가 보이테쉬 하이나스, 바츨라프 브로지크, 율리우스 마락 같은 사람이 맡았다.


국립박물관은 최대한 웅장하게, 크게 만들어졌다. 폭은 100m, 높이는 70m로 프라하에서 가장 큰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크게 만든 이유는 단순했다. 바츨라프 광장을 훌륭하게 보이도록 할 수 있는 배경으로 삼자는 게 당시 체코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사실 각종 유물을 보관할 방이 그렇게 많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물관을 얼마나 크게 만들었던지 처음에는 공간을 다 활용하지 못해 텅 빈 방이 넘쳐날 지경이었다.


국립박물관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간은 판테온이다. 판테온의 네 아치에는 민족주의 화가 프란티섹 제니섹과 바츨라프 브로직이 만든 걸작이 그려져 있다. 모두 체코 학문의 발전사를 담은 그림이다. 카렐 대학교 창립, 알프스 북쪽의 첫 대학교, 슬라브 성경을 완성하는 성 메토디우스, 세상에 그의 저작을 보여 주는 17세기 철학자 얀 아모스 코메니우스다.


과거에는 국립박물관에 체코인이 아닌 인물의 대리석 동상 두 개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와 그의 부인인 엘리자베트 황후였다. 하지만 1918년 체코가 독립을 선포한 이후 두 조각상은 국립박물관에서 퇴출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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