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o Jul 06. 2024

강제수용소 그림과 핀카스 시나고그


1.


넓은 마당에 널린 동생의 하얀 기저귀는 쌀쌀한 겨울바람에 차갑게 흔들렸다. 열한 살 유대인 소녀 엘라는 늘 하던 것처럼 두 살 어린 여동생 지나와 함께 깔깔거리며 기저귀 사이를 뛰어다녔다. 바람은 사늘했지만 겨울 햇살이 무척이나 따사로워 두 아이는 추운 줄을 몰랐다. 빨래를 널던 엄마는 두 딸의 모습이 귀여운지 환하게 웃으며 기저귀를 탈탈 털었다.


“부우웅!”


프라하 시내로 이어지는 좁은 도로에서 희뿌연 먼지를 날리며 트럭 한 대가 달려온 것은 엄마가 마지막 빨래를 긴 줄에 막 널었을 때였다. 뒷마당에서 장작을 패던 아빠는 난데없는 자동차 소리에 놀라 도끼를 든 채 앞마당으로 뛰어왔다. 


엘라의 집 앞에 멈춘 트럭에서는 총을 든 독일군 병사 10여 명이 뛰어내렸다. 얼굴이 노래진 엄마는 두 딸을 서둘러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거실에서 따뜻한 난로를 쬐며 뜨개질을 하던 외할머니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 안경을 고쳐 쓰며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하섹 카우프만 씨인가요?”


트럭 조수석에서 내린 독일군 장교가 도끼를 든 하섹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섹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장교는 이번에는 하섹의 팔을 잡고 뒤에 선 아내를 쳐다봤다.


“그럼 당신이 안나 카우프만이겠군.”


안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역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독일군 장교는 집안에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두 아이와 외할머니를 힐끔 곁눈질했다. 그는 트럭 앞에 줄지어 서 명령을 기다리던 병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들 중 두 명을 하섹 뒤에 선 안나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하섹은 깜짝 놀라며 그들을 밀치려고 했다.


“왜…왜 이러시는 겁니까?”


독일군 장교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하섹의 머리에 겨누며 싱긋 웃었다.


“카우프만 씨! 당신은 독일계이면서 하필이면 왜 유대인과 결혼한 것이지? 독일인은 독일인과 결혼해야 순수한 혈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인가?”


두 병사는 양쪽에서 안나의 팔을 붙잡아 트럭으로 끌고 갔다. 안나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버티며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섹은 머리를 겨눈 장교의 총 때문에 덜덜 떨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두 딸과 장모는 다른 독일군 병사들의 손에 붙들려 밖으로 끌려나왔다. 병사들은 네 명을 트럭에 실었다. 장교는 권총을 다시 허리춤에 넣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히틀러 총통께서는 유럽에서 더러운 피를 가진 유대인을 완전히 박멸할 결심을 하셨어. 당신도 지금까지는 더러운 피 속에 파묻혀 살았지만 앞으로는 깨끗한 세상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해.”


하섹의 아내와 두 딸, 장모를 실은 트럭은 겁에 질려 덜덜 떨기만 하는 하섹을 마당에 남겨놓고 방향을 180도 돌려 달려온 길로 되돌아갔다. 완전히 넋을 놓아버린 그는 그날 밤이 올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울기만 했다. 그는 이후 다시는 아내와 두 딸, 장모를 볼 수 없었다. 이날은 1942년 1월 12일이었다. 


엘라는 엄마, 여동생, 외할머니와 함께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50km 거리에 있는 테레친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테레친 수용소는 1941년 ‘철의 심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독일 나치 사령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 보호령 총독으로 부임한 뒤 유대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할 방법’ 중의 하나로 건설한 곳이었다.


“여성은 왼쪽으로, 남성은 오른쪽으로 움직여. 여자 아이들은 저기 빨간 건물 앞으로 가고, 남자 아이들은 파란 건물 앞으로 뛰어가서 기다리도록 해.”


엘라의 가족을 실은 트럭이 수용소에 도착하자 마당에서 기다리던 독일군 장교는 성별, 나이에 따라 유대인을 이리저리 나눴다. 졸지에 수용소 마당은 헤어지게 된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 유대인의 비명으로 소란스러웠다.


엄마, 할머니와 헤어진 엘라는 여동생과 함께 수용소 한쪽 구석에 만들어진 ‘소녀동 L410’의 28번방에 갇혔다. 각 방에는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 아이 30~40명이 수용됐다. 다들 엄마, 아빠와 헤어진 슬픔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 공포감에 사로잡혀 눈물만 펑펑 쏟고 있었다. 엘라도 여동생을 껴안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뿐이었다.



2.


이른 아침 경쾌한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28번방의 문이 덜컥 열렸다.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젊은 유대인 여성과 그녀를 감시하는 독일군 병사 두 명이었다. 그녀는 아주 밝은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얘들아! 안녕! 좋은 아침이야.”


밤새 두려움에 사로잡혀 덜덜 떨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던 아이들은 난데없는 소란에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만 빼꼼 내밀었다. 입구에는 머리를 빡빡 깎은 채 죄수복 같은 줄무늬 옷을 입은 여성이 싱글벙글하며 서 있었다.


“나는 프리들 디커-브랜다이스라고 해. 너희와 같은 유대인이야. 자, 이제 그만 자고 다들 침대에서 내려오렴. 나를 따라가도록 하자.”


엘라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디커-브랜다이스는 엘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란다. 오늘부터 너희들에게 그림을 가르쳐 줄 거야. 오페라를 가르쳐 주실 다른 선생님도 너희를 기다리신단다.”

“그림이라고요?”


엘라뿐 아니라 28번방에서 놀라움이 가득한 함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럼! 이곳에서 하루 종일 침대에 틀어박혀 지내는 것보다는 나랑 가서 그림을 그리는 게 좋지 않을까? 어서 내려오렴. 잠시라도 일찍 가면 그림을 잠시라도 더 많이 그릴 수 있을 거야.”


엘라는 그림이라는 디커-브랜다이스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녀는 옆에 숨은 동생과 함께 침대에서 내려가 문 앞으로 걸어갔다. 다른 아이들은 잠시 주저하다 엘라를 보고 뒤를 따라 침대에서 나갔다. 28번방 아이들이 간 곳은 강당처럼 너른 곳이었다. 그곳에는 여자 아이들은 물론 남자 아이들까지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디커-브랜다이스 외에 다른 유대인 여자 선생님도 여러 명이었다.


엘라는 그날부터 디커-브랜다이스에게 그림을 배웠다. 나중에는 다른 선생님에게서 노래와 어린이용 오페라를 배워 불렀다. 그녀는 이때만큼은 엄마와 가족을 보고 싶은 그리움을 잊고 모든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깥에서는 많은 어른이 죽어갔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었다. 


어린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친 사람은 여성화가 프리들 디커-브랜다이스였다. 남편과 함께 테레친 수용소에 끌려간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이었다. 그녀가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것은 공포에 질린 아이들이 맞닥뜨린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써 두려움을 덜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디커-브랜다이스는 어린이들의 그림을 버리지 않고 모아 숨겨 두었다. 이렇게 몰래 감춰 두었던 그림은 무려 4천500여 점에 이르렀다. 그녀는 1944년 10월 남편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됐다. 모아둔 그림은 소녀동 L410의 유대인 담당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된 직후 가스실에 들어가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고통스럽게 숨을 거뒀다.


엘라처럼 테레친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 어린이는 1만 5천여 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는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디커-브랜다이스처럼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아이는 겨우 100여 명이었다. 엘라는 다행히도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아이 중 한 명이었다. 


테레친 수용소에 갇힌 어린이들이 그렸던 그림은 목숨을 잃은 아이들과는 달리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소녀동 L410의 유대인 담당자가 그림을 버리지 않고 보관했던 덕분이었다. 



3.


어린이들의 홀로코스트 악몽을 담은 그림은 지금 프라하의 유대인 지구의 유대인 박물관과 핀카스 시나고그에 전시돼 있다. 어린이들의 그림에는 나치 때문에 부모와 헤어진 충격, 테레친 수용소로 끌려가는 과정, 수용소에서의 일상,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 부모와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핀카스 시나고그에는 유대인 어린이들의 그림 외에 테레친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체코 유대인 7만 7천297명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벽에 새긴 희생자 이름은 전쟁이 끝난 직후 테레친 수용소에서 발견한 카드 목록에서 발췌한 것이다. 카드에는 등록 명부, 생존자 현황 등이 적혀 있었다. 


희생자들의 이름은 먼저 출생지별로, 그리고 이름 알파벳 순서로 정리돼 있다. 프라하 출신의 이름은 주 신도석 벽에, 다른 지역 출신의 이름은 다른 벽에 새겨져 있다. 새겨진 내용은 희생자의 이름, 성, 출생지, 생일, 그리고 사망일이다. 언제 죽었는지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테레친 수용소로 끌려간 날을 사망일로 간주해서 표기해 놓았다. 시나고그 내부의 스피커에서는 하루 종일 끊임없이 희생자들의 이름이 낭독된다. 


2021년은 유대인을 실은 첫 열차가 프라하에서 테레친 수용소로 떠난 지 80주년이 되는 해였다. 첫 열차는 1941년 11월 24일 유대인 청년 342명을 태우고 테레친으로 달려갔다. 나치는 다른 유대인을 감금할 시설을 만들기 위해 젊은 사람을 먼저 보냈던 것이다. 


테레친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체코 유대인 7만 7천297명 중 누구도 무덤에 묻히지 못했다. 핀카스 시나고그의 벽에 적힌 이름이 그들을 기념하는 유일한 흔적이다. 이곳에는 홀로코스트 때문에 가족과 친척을 잃은 유대인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가족, 친척의 이름을 어루만지면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역사의 비극 앞에서 눈물을 뿌린다. 


테레친 수용소 희생자 중에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막내여동생 오틀라는 물론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삼촌 가족도 있었다. 


핀카스 시나고그는 1535년에 건설된 유대인 성소였다. 독일의 레겐스부르크에 있던 시나고그가 파괴되고 많은 유대인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프라하 유대인의 지도자인 호로비츠 가문이 건설한 시나고그였다. 


호로비츠 가문은 만행에 항의하는 뜻으로 레겐스부르크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한 새 시나고그를 만들었다. 모양은 일부러 레겐부르크의 시나고그와 비슷하게 건설했다. 게다가 독일에서 화형 당한 랍비 몰초의 옷과 숄을 새 시나고그에 전시하기도 했다.


핀카스 시나고그의 역사를 알고 있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체코를 점령한 뒤 핀카스 시나고그와 인근의 유대인 공동묘지를 ‘멸종한 민족 박물관’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다. 유대인과 그들의 역사를 조롱하는 시설물로 이용하려는 게 독일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들의 계획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핀카스 시나고그가 홀로코스트 기념 시설로 바뀐 것은 1955~60년이었다. 이때에야 테레친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어린이들의 그림이 걸리고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질 수 있었다. 하지만 8년 뒤인 1968년 이른바 ‘프라하의 봄’을 깔아뭉개기 위해 체코를 침공한 소련군은 핀카스 시나고그의 문을 강제로 닫아버렸다. 이후 27년 동안 시나고그에는 사람의 발길이 뚝 끊어져 버렸다. 


이곳이 다시 개장한 것은 벨벳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6년 뒤인 1995년이었다. 지금은 유대인의 인기 관광지로 변한 덕분에 매일 외국에서 찾아온 유대인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것이면서 헌것’ 스타로노바 시나고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