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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10. 2024

소년들과 강과 숲에 작별 인사를

“비행기 엔진이 고장 난 것 같다. 비상착륙 허가를 요청한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천지가 새까맣던 1968년 8월 20일 늦은 밤이었다. 프라하 상공을 날던 소련 항공기가 루지녜 국제공항 관제탑으로 긴급 무전을 보냈다.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은 관제탑 직원은 항공기에 착륙 허가를 내주었다. 그런데 활주로에 안착한 소련 항공기에서 내린 사람은 사복을 입고 품에 권총을 숨긴 소련 정보요원 100명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관제탑 등 공항 전역을 장악해 아무도 공항에서 나가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잠시 후 모스크바에서 날아온 An-12 수송기가 10분 간격으로 활주로에 착륙하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튀어나온 것은 놀랍게도 중무장한 소련군 특수부대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소련제 탱크 수십 대도 하역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지만 ‘프라하의 봄’을 좌초시키려는 소련의 체코 침공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었다. 


소련군이 루지녜 국제공항을 장악한 직후인 밤 11시 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국 중 소련,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 군대의 병력 50만 명과 탱크 2천 대, 전투기 700대가 일시에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은 것이다.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국 군대의 침공 사실은 다음날 새벽이 돼서야 라디오와 TV의 긴급방송을 통해 체코 국민에게 알려졌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에게 알립니다. 어제 20일 밤 11시 소련,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군대가 체코 국경을 넘었습니다.”


놀란 프라하 시민들은 모두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늘에서는 소련군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위협 비행을 계속했다. 구시가지 광장, 프라하 성,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 등 시내 주요 지점은 이미 탱크가 점령한 뒤였다. 중무장한 병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탱크 주변에서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다. 이곳저곳에서 끊임없이 총소리가 터지기도 했다.


프라하의 주요 거점을 장악한 소련군은 탱크를 앞세워 바츨라프 광장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국립박물관과 성 바츨라프 동상 사이였다. 동상은 체코 국기로 덮여 있었다.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군의 침공 소식을 들은 일부 시민이 성 바츨라프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면서 덮어 놓은 것이었다. 


소련군 탱크는 일제히 포신을 박물관 쪽으로 돌렸다. 탱크에 탄 병사들은 박물관을 향해 기관총을 마구 갈겼다. 아직도 국립박물관 정면에는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국립박물관 앞에 서 있는 소련군 탱크를 담은 사진은 소련의 침공을 상징하는 역사적 자료로 지금까지 전해진다. 알렉산더 두브체크 서기장이 추진했던 ‘인간의 모습을 가진 공산주의’로 표현되는 프라하의 봄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소련이 체코를 침공하고 채 반 년도 지나지 않은 1969년 1월이었다. 카렐대학교 예술학부 학생 얀 팔라흐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칼과 탱크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겨우 스물한 살, 갓 피어나는 젊은 꽃이었다. 애국심과 자유정신이 남달리 강했던 그는 프라하 시내에서 열린 ‘소련군 침공 반대’ 집회에 여러 번 참가했고 동맹휴업에도 가담해 수업을 거부했다. 하지만 어떤 활동도 소련군을 체코에서 몰아내는 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돼. 사람들을 일깨우고 세계의 관심을 끌려면 근본적으로 다르게 접근해야 돼. 방송국을 점거해서 목소리를 내는 게 가장 좋겠어.’


얀 팔라흐는 예술학부 학생회 회장인 홀로체크에게 그의 생각을 밝혔다.


“라디오방송국을 점거하는 거야. ‘모든 국민이 총파업에 나서야 한다’는 내용의 방송을 송출하자고.”


홀로체크는 겁을 내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일이야. 죽을지도 몰라.”


크게 실망한 얀 팔라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고 복잡한 준비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1월 16일 학교 기숙사 방에서 편지 4통을 썼다. ‘인간 성화 1번’이라는 서명이 붙은 편지였다.


‘저는 대중을 무기력으로부터 이끌어 내기 위해 분신을 결심한 여러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언론 자유입니다. 검열을 폐지하고 ‘뉴스’ 배포를 허용해야 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은 언론 자유를 얻기 위해 총파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친소련 정치인은 모두 사퇴해야 합니다. 1월 21일까지 언론 자유가 이뤄지지 않고 총파업이 단행되지 않을 경우 다른 ‘인간 성화’가 불을 붙일 것입니다. 인간 성화 1번.’


얀 팔라흐는 편지 세 통의 겉봉투에 경제학부의 친구 라디슬라프 지즈카, 예술학부 학생회 회장 홀로체크,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작가연맹의 주소를 적었다. 네 번째 편지는 작은 상자에 담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얀 팔라흐는 오전 11시 기숙사를 떠났다. 바츨라프광장으로 가는 동안 엽서를 한 장 사서 친구인 후버트 비스트리칸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를 적었다. 그는 주소를 미리 적어 둔 편지 세 통과 엽서를 우체통에 넣었다.


얀 팔라흐는 플라스틱 통 두 개를 사서 석유를 가득 담아 바츨라프광장의 국립박물관 앞으로 걸어갔다. 바츨라프 광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많은 사람이 오가는 프라하의 중심지였다. 그는 오후 2시 30분 국립박물관 앞 분수대에 도착했다. 국립박물관 본관 건물은 바츨라프광장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도로로 분리돼 있지도 않았고, 여러 노선의 트램이 광장을 항상 지나다녔다.


얀 팔라흐는 분수 난간 근처에서 외투를 벗었다. 그는 플라스틱 통 뚜껑을 열고 석유를 온 몸에 뿌리고 바로 불을 붙였다. 이어 분수대 난간을 넘은 뒤 인근에 주차된 차량 사이를 지나 성 바츨라프 동상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도로에 쓰러졌다. 많은 사람이  분신해 쓰러진 얀 팔라흐의 모습을 목격했다. 몇몇이 달려가 외투를 벗어 그의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했다. 얀 팔라흐는 고통스러워하면서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분수대 근처에 상자가 하나 떨어져 있을 거예요. 상자 안에는 제가 적은 편지가 들어 있답니다. 편지를 꺼내 큰소리로 낭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얀 팔라흐의 요청대로 사람들은 편지를 꺼내 읽었다. 우연히 인근을 지나던 구급차가 분신 장면을 목격하고 달려왔다. 얀 팔라흐는 아직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 구급차 직원들은 그를 차에 싣고 카렐 광장에 있는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다. 병원 측은 얀 팔라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앰뷸런스는 방향을 바꿔 레게로바 거리의 비노흐라디 병원에 갔다. 이 병원에는 화상치료과와 성형외과가 있었다. 간호사들은 이동용 침대에 실린 얀 팔라흐를 서둘러 응급치료실로 옮겼다. 팔라흐는 그를 데리고 가던 간호사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저는 그냥 자살하는 게 아닙니다. 소련군의 침공에 항의하는 뜻에서 분신한 겁니다.”


얀 팔라흐가 분신을 시도하고 몇 시간 뒤 체코 관영통신사는 ‘젊은 대학생이 분신했다’는 짧은 소식을 내보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소련군의 침공에 항의하면서 분신을 시도했다는 소문은 금세 프라하 곳곳에 퍼져 나갔다. 저녁 무렵이 되자 많은 사람이 바츨라프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현장 목격자를 조사했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분수대 근처에서 병 조각, 플라스틱 통 조각 그리고 팔라흐가 갖고 있던 편지를 수거해 갔다. 


얀 팔라흐가 실려 간 병원으로 많은 기자가 몰렸다. 병원 측은 그의 어머니와 동생만 들어오게 한 뒤 문을 폐쇄했다. 어머니와 동생은 얀 팔라흐를 만났다. 두 사람은 끔찍한 모습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경찰도 병원에 들어가지 못했다. 경찰은 녹음기를 전달해 얀 팔라하의 분신 이유 등을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정신과 의사인 즈덴카 크무니츠코바 박사는 1월 17일 아직 의식이 있는 얀 팔라흐와 짧게 면담했다. 


“왜 분신을 하셨나요?”

“소련군을 체코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국민들이 무기력에서 벗어나도록 제 몸에 불을 질렀습니다. 제 희생으로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다른 학생이 제 뒤를 따를 겁니다.”


“그들은 누구인가요?”

“이름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병원은 얀 팔라흐가 신체의 85% 부위에 2~3도 화상을 입었고 목숨이 위태롭다고 진단했다. 얀 팔라흐는 기숙사 동료인 에바 베드나리코바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병원은 그녀를 데려와 면담을 주선했다. 


“에바, 이런 꼴로 너를 만나게 돼서 미안해. 부탁할 게 있어서 너를 불러 달라고 했어. 예술학부 학생회 회장을 병원에 데리고 오면 안 될까? 그 사람에게 할 말이 있어.”


에바는 학교에 가서 학생회 회장 홀로첵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기록에 따르면 얀 팔라흐는 홀로첵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나처럼 분신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줘.”


에바와 홀로첵이 병원을 나가자 얀 팔라흐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는 결국 분신 사흘 뒤인 1월 19일 오후 3시 30분 눈을 감았다. 그날 저녁 그의 시신은 부검을 위해 경찰서로 보내졌다. 조각가 올브람 주베크가 그곳에서 그의 데스마스크를 떴다. 


얀 팔라흐가 분신해서 죽었다는 소식은 체코슬로바키아 국내는 물론 외국 언론을 타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부 청년은 얀 팔라흐의 분신 장소인 국립박물관 앞에 천막을 치고 나흘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보헤미아대학생연합’은 바츨라프광장에서 얀 팔라흐 추모 집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수만 명이 모여 카렐대학교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얀 팔라흐의 장례식은 1월 25일 보헤미아대학생연합 주최로 열렸다. 대학생연합은 얀 팔라흐를 체코의 영웅이 묻히는 슬라빈 묘지에 묻으려고 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올사니 공동묘지를 얀 팔라흐의 매장지로 선택했다.


얀 팔라흐의 유해를 담은 관은 장례식 전날인 1월 24일 카렐대학교 건물인 카롤리눔에 임시로 안치됐다. 프라하 시민 수만 명이 카롤리눔으로 찾아가 눈물을 뿌리며 얀 팔라흐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튿날 추도행사는 카롤리눔 정원에서 거행됐다. 카렐대학교 학장과 동료 학생들이 추도 연설을 했다. 또 교육부 장관도 정부 관리로서는 유일하게 추도연설을 했다. 


추도행사가 끝난 뒤 얀 팔라흐의 관은 마차에 실렸다. 장례 행렬은 오보츠느 트르히 광장, 첼레트카 거리, 구시가지 광장을 거쳐 카렐대학교 예술학부 건물 앞에 멈췄다. 공동묘지에서 열린 장례식 행사에는 얀 팔라흐의 가족, 일부 초청인사, 기자만 참석했다. 


얀 팔라흐가 묻힌 올사니 공동묘지는 체코 국민에게 성지로 떠올랐다. 이에 불안을 느낀 비밀경찰은 1973년 10월 25일 그의 시신을 파내 화장한 뒤 얀 팔라흐의 고향인 브세타티에 살던 어머니에게 보냈다. 비밀경찰은 유해 항아리를 공동묘지에 묻지 말고 집안에 보관하라고 강요했다. 얀 팔라흐의 유해는 벨벳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인 1990년 10월 15일 다시 올사니 공동묘지로 돌아갔다.


얀 팔라흐가 죽고 한 달 뒤인 2월 25일 그의 친구였던 얀 자지치가 똑같은 장소에서 분신자살했다. 4월에는 마흔 살이던 에브젠 플레첵이 지르라바에서 분신자살했다.


얀 팔라흐와 얀 자지치가 분신한 장소인 바츨라프광장에는 두 사람을 추모하는 청동 동판과 목제 십자가가 설치됐다. 얀 팔라흐가 다녔던 학교 건물 벽에는 그의 얼굴을 새긴 작은 동판이 설치됐다. 


얀 팔라흐가 분신자살한 다음해에 체코를 탈출했던 천문학자 루보스 코후텍은 1969년 8월 22일 발견한 유성에 ‘1834 팔라흐’라는 이름을 붙였다. 체코뿐만이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의 많은 도시가 얀 팔라흐의 이름을 거리나 광장에 붙이기도 했다. 룩셈부르크의 수도 룩셈브루크는 물론 프랑스의 앙제와 파르트네, 폴란드의 크라쿠프, 네덜란드의 덴하그, 할렘, 아센 등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 로마 시내의 한 광장도 얀 팔라흐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 베니스 지우데카 섬에 있는 학생 홀에도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얀 팔라흐가 목숨을 던지기 전에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가 있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조국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의 마음에 슬픔을 남길 수밖에 없는 아픈 마음을 담은 편지다.


‘어머니, 아버지, 형, 그리고 여동생에게! 다들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저는 이미 죽었거나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일 거예요. 저의 행동이 우리 가족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 분노하지는 마세요. 인생에 지쳤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저는 인생을 무척 소중히 여긴답니다. 바라건대 저의 행동이 인생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인생의 가치를 잘 알아요. 인생은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알지요. 저는 우리 가족을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원한답니다. 그러려면 많은 것을 지불해야 하지요. 그러니 저의 희생 때문에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형, 공부 열심히 하도록 해. 마르타도 마찬가지고. 두 사람 모두 정의롭지 못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돼.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슬퍼요. 다들 아시겠지만 저는 가족을 정말 사랑한답니다. 제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래요. 그들이 저를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년들과 강과 숲에 작별 인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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