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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11. 2024

프라하의 봄

“우리가 함께하면 두려울 게 없습니다.”

“공산당 정부 총사퇴하라!”


엄청난 함성이 바츨라프광장을 뒤흔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함성은 벌써 두어 시간째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반체제 작가인 바츨라프 하벨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츨라프광장에는 시민, 노동자, 학생 30만 명이 모여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손에는 ‘두려워하지 말라’ ‘정부 총사퇴’ 같은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와 손 팻말이 들려 있었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어. 민중의 힘이란,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지.’


군중은 구호를 외치는 사이에는 열쇠 꾸러미를 흔들어 쨍그랑 쨍그랑 소리를 냈다. 열쇠가 없는 사람은 다른 물건으로 소리를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자명종 시계를 들고 나와 계속 따르릉 소리를 냈다. 


‘저 쨍그랑 소리는 공산당 지도자에게는 최후통첩 편지를 전달하는 우편배달부가 누르는 ‘마지막 벨’이나 마찬가지일 거야.’


1968년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외치며 ‘프라하의 봄’을 이끌다 쫓겨난 알렉산드르 둡체크 전 공산당 서기장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죽기 전에 이렇게 감격적인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군요.”


하벨은 밝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20년 전에 이곳에서 분신한 얀 팔라흐의 꿈을 이뤄 줄 수 있어 더욱 기쁩니다.”


얀 팔라흐가 분신자살한 지 20년이 되던 1989년 1월 16일 프라하에서 대규모 추모 행사가 열렸다. 행사는 곧바로 공산당 정부 반대 시위로 확대됐다. 시위는 21일까지 이어졌다. 시위대는 그 기간을 ‘팔라흐 주간’이라고 불렀다. 공산당 정부는 무장경찰을 동원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얀 팔라흐가 분신했던 바츨라프광장은 폐쇄됐고, 수많은 경찰이 광장을 돌아다녔다. 


과거와는 달리 체코 국민은 이때만큼은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반정부 시위는 사그라들지 않고 요원의 불길처럼 체코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11월 17일에는 사회주의학생연맹이 주도한 학생 시위가 시작됐다. 비셰헤라트에 모인 학생 1만여 명은 바츨라프광장으로 행진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시위대를 평화적으로 호위했지만 나로드니 거리의 국립극장 인근에서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이 장면을 목격한 국립극장 노조가 총파업에 들어갔고, 폭력 진압 소식을 들은 다른 시민들도 총파업과 시위에 동참했다. 날이 갈수록 시위대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체코인들은 공산정권의 종식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위대는 한편으로는 불안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도 일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바첵은 군대를 동원해 총을 발포해서라도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다. 프라하 외곽에서는 군인 4천여 명이 무장한 채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군부는 당의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무력 진압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하벨이 바츨라프광장의 멜란트리히 건물 3층에서 창밖을 내다본 것은 학생 시위 유혈진압 사태가 벌어지고 1주일 뒤인 11월 23일이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체코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던 때였다. 20년 전에 소련의 침공을 경험한 둡체크는 내전을 두려워했다.


“군부는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 저들은 동포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도 남을 자들이지.”


오랫동안 공산정권의 감시와 탄압을 받은 하벨은 군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정권을 몰아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할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저들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프라하 외곽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출동 대기를 지시한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권력을 내놓고 쫓겨나는 게 무서운 거지요. 하지만 저는 100%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이번에는 함부로 총칼을 휘두를 수 없을 겁니다. 소련이 저들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멜란트리히 건물은 1898년 건축된 이래 줄곧 출판 회사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공산 정권 시절에는 공산당 기관지나 각종 선전문을 인쇄하는 시설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벨이 둡체크와 이야기를 나눌 때 창밖 발코니에서 누군가 들어왔다.


“하벨 선생님. 드디어 연설하실 때가 됐습니다. 모두 선생님의 얼굴을 보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벨은 평생 민주주의를 목청껏 외친 사람이었다. 여러 차례 수감당하거나 가택연금을 당한 이력 때문에 체코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체코의 반체제 시민단체인 ‘시민포럼’의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체코에서 시위가 연일 번져갈 때 동참을 주저하던 ‘시민포럼’의 등을 떠밀어 세상 속으로 끄집어낸 것은 바로 그였다. 그는 ‘시민포럼’을 주도했지만 대중 앞에 나서 연설하는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하벨은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 많은 사람이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이날 연설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번 민주화 시위의 향방이 달라진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이나 고민하고 고심한 끝에 체코의 미래를 담은 연설문을 미리 만들었다.


하벨은 멜란트리히 건물의 발코니로 나가 바츨라프광장을 가득 메운 시위대에게 손을 흔들었다. 투쟁에서 꼭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과 미래를 잘 이끌 수 있다는 신념을 담은 손짓이었다. 그가 발코니에서 승리의 몸짓을 보여 주자 30만 시위대는 우레 같은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하벨은 천천히 연설문을 낭독했다.


“시민포럼은 국민과 공산정권 사이에서 대화를 중재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회계층의 능력 있는 사람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체코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자유로운 대화를 추진할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확실하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다. 먼저 조국을 정신적,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위기로 몰아넣었던 과거의 전체주의적 정권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성입니다. 두 번째는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번영하는 체코에서 살 것이라는 확실성입니다. 


우리는 유럽에 복귀해야 합니다. 이 이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폭력에 반대합니다. 복수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존엄하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는 조국의 운명에 대해 말할 권리를 갖고 싶습니다. 미래 세대에 대해 걱정하고 싶습니다.”


약간 웅얼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냉정하고 단호한 하벨의 연설은 이날 시위에 나선 체코 국민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체코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과 공산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회복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신뢰감을 심어 주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연설 이전보다 더 큰 함성과 박수가 광장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산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희망과 새 지도자를 찾았다는 기쁨과 밝은 미래로 달려갈 수 있다는 벅찬 즐거움이 가득했다.


하벨이 멜란트리히 건물에서 연설하고 이틀 뒤 레트나에는 무려 8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그로부터 다시 닷새 뒤인 28일에는 구스타프 후삭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40년간 이어진 공산당 일당독재가 막을 내리던 순간이었다. 


후삭이 사퇴를 선언하고 한 달 뒤인 1989년 12월 29일에는 프라하성 구왕궁의 블라디슬라프 홀에서 벨벳혁명 이후 첫 체코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당선자는 혁명을 주도했던 하벨이었다. 공산정권 붕괴 직후라서 의회에는 여전히 공산당 출신 의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당선자 발표는 ‘프라하의 봄’의 영웅이었으며 이날 체코 의회 의장을 맡았던 둡체크가 담당했다. 그는 감정을 추스르려고 노력하면서 손에 든 쪽지를 천천히 읽었다.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사회주의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됐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엄숙한 표정의 하벨은 회의장 앞으로 나가 연단에 섰다. 많은 외교관 등 초대 손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취임 선서를 했다. 


“저는 체코에 충성하겠습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간단한 선서로 취임식을 대신한 하벨은 회의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의장대를 사열한 뒤 2층의 발코니로 올라갔다. 전국에서 모인 국민 수만 명이 구왕궁 앞의 제3정원은 물론 프라하 성 안팎에 운집해 새 대통령이 된 ‘혁명의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 만세!”

군중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으며 만세를 연호했다. 박수가 잦아들자 하벨은 침착하게 연설을 시작했다.


“저는 방금 체코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지지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드립니다. 이 나라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입니다.”


하벨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1989년 12월 29일은 체코의 역사를 열었던 프라하 성에서 민주주의의 새 역사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전체주의와 압제가 무너지고 민주와 자유, 창의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해마다 가을이나 겨울에 프라하 여행을 떠나면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시작해 1989년 벨벳혁명으로 완성된 체코 민주화의 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먼저 체코의 국경일인 11월 17일에는 벨벳혁명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프라하뿐 아니라 체코의 36개 도시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전국적인 축제다. 프라하의 경우 매년 수만 명이 바츨라프 광장에 모여 혁명의 기억을 되새긴다. 혁명 초창기에 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나로드니 거리의 ‘벨벳혁명 기념물’ 앞에서는 기념식이 거행된다. 2016년부터는 해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자유 축제’가 열린다. 다양한 문화 축제와 음악 콘서트가 펼쳐지는 행사다. 


바츨라프 광장에는 소련의 침공에 항의하면서 분신자살한 얀 팔라흐의 흔적도 있다. 그가 몸에 불을 붙였던 국립박물관 앞의 바닥에 십자가 모양의 기념물이 설치됐다. 매년 팔라흐의 분신 기념일은 물론 벨벳혁명 기념행사 때에는 많은 꽃과 촛불이 헌정돼 그의 아름다운 죽음을 애도한다.


벨벳혁명 기념행사가 끝나고 한 달 뒤에는 바츨라프 하벨 추모행사가 열린다. 그는 두 차례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조국에 민주화를 기틀을 다진 뒤 2011년 1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바츨라프 광장을 비롯해 프라하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이어진다. 사람들은 하벨과 관련된 장소라면 어디든지 꽃, 심장 모양 장식을 가져다 놓고 촛불을 밝힌다. 가장 눈길을 끄는 행사는 하벨이 생전에 남긴 책에서 철학적 의미를 가진 문구를 뽑아내 읽는 낭송 이벤트다. 많은 사람이 바츨라프 광장에 모여 전문 낭송가가 들려주는 하벨의 명문을 들으면서 그를 추모한다. 


하벨 추모행사가 끝나면 이제 어둡고 슬펐던 과거의 시간은 지나가고 행복하고 따뜻한 시간이 다가온다. 바츨라프 광장과 구시가지 광장에는 크리스마스 시장이 차려진다. 자원봉사자와 정치인이 두 광장에서 나눠 주는 따뜻한 소고기 죽 한 그릇과 함께 프라하의 아름다운 겨울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죽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곧 다가올 프라하의 새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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