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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12. 2024

카페 슬라비아와 체 게바라

1966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나로드니 거리의 국립극장 앞 ‘카페 슬라비아’에 한 사내가 묵묵히 앉았다. 50대로 보이는 그는 창밖으로 천천히 흐르는 블타바강을 바라본다.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글을 쓴다.


머리는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한 것 같고, 뚱뚱하지는 않지만 살집도 꽤 올랐다. 면도는 깨끗하게 한 상태이고 치아는 약간 튀어나왔다. 직사각형으로 각이 잡힌 안경이 눈에 띈다. 글쓰기에 집중한 사내는 꽤 우울해 보이고 교수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가끔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는 걸 봐서는 병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사내가 체코인이 아니라 외국인이며, 외모로 볼 때 아주 내성적이라는 것 외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철없는 소녀에게는 나이와 관계없이 꽤 매력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프라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성 없는 남성은 아니다. 그가 카페 슬라비아에 간 것은 이날이 처음은 아니다. 가끔 짙은 색의 곱슬머리를 한 젊은 흑인이 동행한다. 체코 현지인이 따라가기도 한다. 


사내는 무엇을 쓰는 걸까? 종이에는 ‘el hombre nuevo’라고 적혔다. 영어로 ‘New Man’, 즉 ‘새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새 사람’은 ‘공산주의자’라는 뜻이다. 


공산화된 프라하 카페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는 이 사내는 누구일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놀랍게도 그는 중남미의 혁명운동가 체 게바라다.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다. 그는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지방의 부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책 읽기를 즐겼던 그는 어릴 때부터 직접 본 것을 공책에 적거나 사진으로 남기길 좋아할 만큼 감수성이 풍부했다.


의대에 다녔던 체 게바라는 오토바이 한 대에 몸을 싣고 중남미를 여행했다. 그는 책에서 볼 수 없던 중남미의 끔찍한 현실을 목격했다. 충격을 받은 그는 미래를 보장해주는 의사 직업을 버리고 중남미의 자유와 독립을 찾기 위해 혁명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이끌어 성공했다. 채 서른 살도 안 된 나이에 쿠바 혁명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다. 그는 1960~1965년 쿠바 정부에서 장관으로 일했다. 하지만 안주하지 않았고 제2의 쿠바 혁명을 이루기 위해 쿠바를 떠난다. 1965년 여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며 장관 자리를 내팽개치고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상의한 끝에 비밀 임무를 맡아 외국으로 몰래 출국했다. 그가 간 곳은 아프리카였다. 아프리카에서는 당시 탈식민지 운동이 한창이었고, 냉전으로 미국과 소련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피델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를 통해 아프리카에 혁명을 수출하려고 했다.


체 게바라가 처음 도착한 곳은 1965년 말 콩고였다. 그해 연말 피델 카스트로는 전당대회에서 “체 게바라는 아바나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세상 어디에선가 혁명 사업에 매달리고 있다. 억압받는 사람을 돕는 일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맡은 혁명 수출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그와 함께 갔던 쿠바인은 모두 달아났다. 그는 탄자니아의 다르 엘 살람으로 피신했다. 그는 이곳에서 1966년 피델 카스트로가 보낸 치과의사 루이스 가르시아 구티에레스를 만났다. 구티에레스는 치과용 도구와 프라하행 비행기표를 갖고 있었다. 


체 게바라는 구티에레스와 함께 1966년 3월 프라하로 갔다. 치과용 도구 덕분에 의사로 행세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게다가 머리가 약간 벗겨진 외모, 살짝 통통한 몸집은 그를 의사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1961년과 1965년 외교적 임무를 갖고 프라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안토닌 노보트니 체코 대통령을 두 번이나 만났다. 당시 쿠바와 체코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체 게바라가 프라하 국제공항을 지나갈 때 갖고 있던 여권에 찍힌 국적은 우루과이였다. 여권에 적힌 이름은 라몬 베니테스였다. 방문 목적은 당 간부 대동이었다. 당시 체코는 공산 국가였고 체 게바라가 출발한 탄자니아도 공산권 국가였다. 그래서 그가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게다가 체 게바라가 체코로 갈 때 쿠바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요원이 프라하에 잠시 숨어 지내게 하고 싶다”는 뜻을 체코 정부에 밝혔다. 그래서 체코 비밀경찰 StB는 공항에서 라몬 베니테스라는 사내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체 게바라는 한 곳에서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 이유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966년 3~5월에는 정확한 주소를 알 수 없는 헤르주마노바 거리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프라하성 서북쪽의 프라하 7지구 홀레쇼비츠에 있는 거리였다. 나중에는 인근인 레트나 지역에서 살다 6~8월에는 더 북쪽인 8지구 노베 댜블리츠의 라드비거리의 빌라에서 거주했다. 체 게바라가 카페 슬라비아에서 커피를 자주 마신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체 게바라가 맨 나중에 묵은 8지구 노베 댜블리츠의 라드비거리의 빌라는 StB의 안가였다. 당시에는 체 게바라 말고도 프라하를 거쳐 외국으로 오가는 혁명가가 더러 있었다. 그들은 라드비거리의 빌라에 며칠씩 묵곤 했다. 1940년 멕시코에서 혁명가 트로츠키를 암살한 라몬 메르카데르도 20년 형기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갈 때 이 빌라에서 며칠 묵었다. 이런 사정 탓에 StB는 체 게바라의 정확한 정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런 여러 혁명가 중 하나라고만 생각하고 그냥 방치했다. 


일부에서는 StB가 체 게바라의 정치를 일찌감치 알았다고 주장한다. 비밀경찰이 그의 신분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다는 것이다. 1989년 해제된 StB 비밀서류에 그런 사실이 담겨 있었다. StB가 정부의 요청에도 비밀을 숨긴 것은 안가의 존재가 밝혀질 경우 이후 안가를 이용할 다른 혁명가의 안전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었다.


체 게바라가 프라하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지냈는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의 실패 때문에 우울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앞으로 벌어질 혁명을 위해 여러 가지 생각을 준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프라하 체류를 연구해온 체코 역사학자들은 “그는 새로운 혁명의 길을 찾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어떻게 혁명을 수출할지 방법을 찾기 위해 잠시 휴식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체 게바라가 프라하에 머물 때 일부 쿠바인도 신분을 위장한 채 따라갔고, 프라하에서 현지인 일부가 합류해 그를 수행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체 게바라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기 위해 변장했다. 구티에레스의 도움을 받아 치아를 뻐드렁이인 것처럼 꾸몄다. 게릴라 활동 시절을 연상케 하는 긴 머리카락은 잘랐다. 수염은 단정하게 잘랐다. 외출할 때는 매일 분장했다. 


아내 알레이다도 당시 프라하에 따라갔다. 그녀는 비망록에 ‘프라하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곳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온천인 카를로비 바리에도 가지 못했다. 우리는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했다’고 적었다.


프라하에서 편하게 휴식한 체 게바라는 1967년 체코를 떠나 쿠바를 거쳐 남미 볼리비아에 밀입국한다. 볼리비아에서 어떤 방식으로 혁명을 일으킬지 계획을 프라하에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기대했던 농민의 지원은 부족했고, 지역 공산당의 세력도 기대에 못 미쳤다. 결국 그는 산악지대로 쫓겨났다 부상당한 채 붙잡혔다. 그리고 체포 다음 날인 1967년 10월 9일 처형당했다. 당시 나이는 서른아홉 살이었다.  


체 게바라가 죽고 4년 뒤인 1971년 피델 카스트로는 체코 공산당에 편지를 보냈다. ‘체 게바라가 1966년 여름 체코 프라하에 머물 때 살았던 주소를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체 게바라를 기념하는 동판을 하나 붙이고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편지를 받은 체코 공산당 하급직원은 깜짝 놀라 트럭 헤드라이트를 온몸으로 받은 고양이처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체 게바라가 프라하에 왔었다고? 언제, 어디에? 아무것도 모르던 하급직원은 당 상부에 보고했다. 그런데 상부의 누구도 아는 게 없었다. 상급 간부는 비밀경찰인 StB에 연락해 물어보았지만 그들에게도 정보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곤혹스러워진 체코 공산당은 피델 카스트로의 요청에 답변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체코 공산당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 챈 피델 카스트로는 시가를 입에 물고 씩 웃었다고 전해진다. 체 게바라는 과연 프라하에서 무엇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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