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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13. 2024

프라하 993과 브르제브노프 수도원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F1963’이라는 이색적인 복합문화공간이 있다. 원래 고려제강이라는 와이어 로프를 생산하던 공장이 있던 장소였다. 공장은 2008년에 사라지고 F1963이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1963’은 공장을 처음 지은 해를, ‘F’는 ‘Factory’ 즉 공장을 의미한다. 


인기몰이를 하던 F1963에 2016년 이색적인 맥줏집이 문을 열었다. 전통 체코 맥주를 직접 만들어 파는 ‘프라하 993’이었다. 풍부한 거품과 함께 달고 쓴맛이 균형을 이루는 체코 페일 라거를 즐길 수 있는 곳이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맥주 제조기술은 물론 양조 기계, 홉, 맥아는 모두 체코에서 가져왔다. 맥주 제조에 사용하는 재료 중에서 단 한 가지 물만 부산에서 나는 것이다.


그런데 프라하 993이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깊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과연 여기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그 사연을 알려면 체코 프라하 시내에서 트램을 타고 서쪽으로 20분 정도 달려가야 한다. 


카를 다리 건너편 말로스트라나 광장의 정류장에서 트램을 타고 프라하 외곽으로 나간다. 트램을 타고 달리는 코스는 제법 재미있다. 프라하의 서민이 사는 주거지역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껴 볼 수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가는 도중에 내려 현지인이 찾는 허름한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 음식을 먹거나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관광지가 아니니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도 않다. 당연히 맛은 전통의 맛 그대로다.


프라하성을 지나 서쪽에 브르제브노프 공원이라는 곳이 있다.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다. 이곳은 아담한 크기의 호수는 물론 잔디밭과 넓은 숲이 있어 가족끼리 나들이하기에 좋은 장소다. 추운 겨울만 빼고 봄, 여름, 가을에 프라하 사람들이 소풍을 많이 가는 곳이다. 아이들은 마음껏 공놀이를 할 수 있고, 어른들은 편안하게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다. 


브르제브노프 공원 인근에는 꽤 웅장한 수도원이 하나 있다. 프라하의 제2대 주교였던 성 보이테쉬가 보헤미아 국왕 볼레슬라프 2세(재임 972~999년)의 도움을 받아 만든 브르제브노프 수도원이다. 10세기 말에 만든 것이라고 하니 역사가 1천 년을 넘는 곳이다. 


성 보이테쉬는 수도원을 건설한 다음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 포교 활동을 벌이다 암살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의 유해는 폴란드에 묻혀 있었지만 나중에 프라하로 돌아왔다. 지금은 성 비투스(체코어로는 비타), 성 바츨라프와 함께 프라하 성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 안식했다.


브르제브노프 공원에는 보테즈카라는 연못이 있다. 프라하에 불행이 다가오면 물 색깔이 변한다는 전설이 담긴 연못이다. 먼 옛날 이 연못에는 브르제브노라는 돌다리가 있었다. 성 보이테쉬가 수도원을 건립하겠다면서 도와달라고 할 때 볼레슬라프 2세를 만난 장소가 여기였다. 브르제브노 돌다리에서 회동한 덕분에 수도원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수도원은 브르제브노프로 불리게 됐다. 그렇다면 부산의 프라하 993과 브르제브노프 수도원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성 보이테쉬가 만든 브르제브노프 수도원이 완공된 연도는 바로 993년이었다. 부산의 체코 맥줏집 이름에 붙은 ‘993’은 수도원 건립연도였던 것이다. 숫자의 뜻은 알게 됐지만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긴다. 왜 수도원 건립연도를 맥줏집 이름에 붙인 것일까?


성 보이테쉬는 브르제브노프 수도원을 차릴 때 맥주 양조장도 같이 만들었다. 기록으로 볼 경우 보헤미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이었다. 이곳에 양조시설이 만들어진 것은 수도원을 건립한 해와 똑같은 993년이었다. 성 보이테쉬는 수도사들이 음료수로 이용할 수 있도록 수도원에 양조장을 차린 것이었다. 수도원 인근에 있는 보테즈카에서 가져온 물로 맥주를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브르제브노프 수도원이 보헤미아에서 맥주를 처음 만든 곳은 아니었다. 체코에서 맥주에 대한 기록은 이 수도원 이전인 859년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이미 다른 곳에서 맥주를 만들어 마셨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브르제브노프 수도원 양조장은 후스전쟁(1419~34년) 때 파괴돼 버렸다. 이후 수도원이 재건될 때마다 양조장도 다시 생겼지만 19세기 말에는 완전히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이곳의 양조장이 되살아난 것은 21세기 들어서였다. ‘브르제브노프 수도원 양조장’이라는 회사가 생겨 맥주를 다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는 다양한 제품의 맥주를 판매한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면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알코올 농도로 보면 11도에서 20도에, 종류로는 스타우트와 라거, IPA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이 소개돼 있다. 부산에 프라하 993을 차린 곳은 이 회사였다.


중세에 유럽의 맥주는 주로 수도원에서 만들었다. 그 시작은 4세기 시토 수도회였다. 수도회의 맥주 제조는 널리 퍼져나가 나중에는 유럽 전역에서 무려 600여 개의 수도회가 맥주를 만들었다. 수도원이 맥주 제조에 열정을 쏟은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먼저 수도사와 수녀는 민간인에게서 기부금이나 기부 식량을 받지 못하는 게 일반적 규칙이었다. 직접 일해서 먹고 살아야 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에서 곡식과 채소 재배, 가축 사육은 물론 요리까지 직접 했다. 중세에 맥주는 유럽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던 음료수였다. 당시에는 맥주를 마시는 게 물보다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성인 남성은 물론 여성과 어린이, 노인까지 맥주를 즐겨 마셨다. 수도원에서는 맥주도 직접 만들어 먹어야했다. 


다행히 수도원에는 일손과 시간이 많았다. 수도사들은 기도하고 공부하는 시간 외에 일하는 시간에 맥주를 만들었다. 게다가 수도사들은 함께 일할 수 있었다. 매일 맥주 품질을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맥주를 만들 수 있는지 토론했다. 이 덕분에 수도사들은 맥주 양조에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종류와 빼어난 품질의 맥주를 양조할 수 있었다.


수도사들은 아주 정확하게 맥주를 만들었다. 기술을 늘려갈 때마다 항상 기록을 남겼다. 덕분에 많은 조리법과 양조법이 잘 보존될 수 있었고 맥주는 점점 더 발전할 수 있었다. 반면 일반 가정에서는 맥주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제조법이 사라져버리기 일쑤였다. 수도원 맥주 제조의 전통이 민간보다 오래 보존돼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수도사들은 맥주를 잘 만드는 것이 신이 내려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균 이하의 맥주를 만들면 신을 모독한 것이라고 믿었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맥주를 만들까 고민하다 나온 게 홉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당도를 조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제 역할도 했다. 


수도사들은 직접 만든 맥주를 매우 즐겼다. 기록에 따르면 어떤 수도원에서는 수도사 1인당 하루에 맥주를 4L씩이나 마셨다. 단식하는 동안에도 맥주로 영양분을 보충했다고 한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맥주로 빈속을 채우면 취할 것 같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알코올 도수가 낮아 음료수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 수도원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식당이나 숙소 역할을 했다. 순례자에게는 돈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두에게 공짜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에게는 돈을 받았다. 이때 맥주를 빚어 팔면 단순히 음식만 내놓는 것보다 더 수익이 많았다. 물론 순례자나 여행객 외에 주변 주민들에게도 팔았다.


브르제브노프 수도원에 이어 프라하의 다른 곳에서도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1088년에는 보헤미아 국왕 브라티슬라프 2세(재임 1061~92년)가 비셰헤라드 대성당에 맥주 생산용 홉을 십일조로 받을 수 있게 허가권을 내주었다. 맥주 판매는 큰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었다. 그래서 맥주 제조, 판매를 규제하는 법이 생겼다.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세금을 매긴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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