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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14. 2024

찌그러진 건물 댄싱 하우스



1986년 봄이었다. 프라하 블타바강에는 상류에서 녹아내린 얼음물이 거세게 흘러내렸다. 원래 물살이 거센 곳이었던 데다 봄에는 유입되는 물이 양이 많아 물살이 어느 계절보다 거칠었다. 한 사내가 블타바강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 유이라스쿠프 다리 난간을 잡고 강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0년 전 블타바강에 홍수가 난 적이 있었지. 이 다리에서도 물이 넘쳐 인근 저지대 주택이 침수돼 큰 피해를 냈는데, 올해는 홍수가 발생하지는 않겠지. 강물이 넘칠 게 아니라 건축 붐이 흘러넘쳐 낡은 도시 프라하를 아름다운 현대도시로 탈바꿈시켜야 할 텐데….’


총 길이가 300m인 유이라스쿠프 다리는 1931년에 완성된 교량이었다. 처음에는 프라하의 대표적 대중교통인 트램을 지나다니게 하려고 만들었지만, 2년 뒤에는 자동차와 사람들도 건널 수 있게 개방했다. 아주 독특한 다리 명칭은 프라하를 건설한 공주 리부세 등 체코와 프라하의 많은 전설을 발굴해 낸 작가 알로이스 유이라스쿠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유이라스쿠프 다리에 서 있던 사내는 블라도 밀루니치였다. 그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건축가였다. 그는 다리를 건너 레스슬로바 거리로 갔다. 다리 바로 끝부분에 텅 빈 땅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서진 건물 잔해가 수북이 쌓인 흉물스러운 땅이었다. 


블라도 밀루니치는 빈 땅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뒷골목도 두루두루 걸으면서 정확한 땅 모양을 살펴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바로 인근에 있는 한 저택 입구의 벨을 눌렀다. 금세 안에서 문이 열렸다. 아주 점잖아 보이고 중후한 표정의 중년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어서 들어오세요. 밀루니치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밀루니치를 반갑게 맞은 사내는 이 집의 주인인 바츨라프 하벨이었다. 부잣집 아들이었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반체제 작가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밀루니치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두 사람은 거실에 놓인 낡은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가이신 밀루니치 씨께서 오늘 저를 보자고 하셔서 그 이유가 정말 궁금했답니다. 이분이 왜 나를 만나려고 할까? 내가 집을 지을 일도 없는데….”


“이 집 바로 앞에 빈터가 있지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 공군기 폭격을 받아 건물이 부서져 잔해가 수북이 쌓인 빈터 말입니다.”


“네, 빈 땅이 하나 있답니다. 저도 지분을 조금 갖고 있는 땅이지요.”


“하벨 씨가 승낙하신다면 그 땅을 개발하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요. 자금도 부족하고, 여러 가지로 준비할 게 많으니까요. 하지만 앞으로 수 년 안에 사업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저도 그 땅을 놀리지 않고 활용할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밀루니치 씨께서 개발에 힘을 써 주신다면 오히려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밀루니치와 하벨은 그날 밤새도록 하벨의 집에서 차를 음미하고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빈터를 어떻게 개발할지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자금 확보 방안을 논의하기로 다짐한 뒤 헤어졌다.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이른바 ‘벨벳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가 물러나고 자본주의의 바람이 들어왔다. 1989년 12월 29일 첫 대통령이 취임했다. 바로 하벨이었다. 3년 전 밀루니치와 밤새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던 그 하벨이었다. 


하벨은 밀루니치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는 낙후한 체코슬로바키아 및 낡은 프라하 역사와 현재를 상징하는 그 빈터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그 땅에 블타바강을 바라보는 문화센터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에는 자금이 부족했다. 문화센터 건립에 자금을 지원하려는 곳이 없었다. 공사에 돈을 댄 곳은 네덜란드 보험회사인 내셔날레 네덜란덴, 지금은 ING뱅크였다. 


ING뱅크는 밀루니치를 수석 설계사로 임명했다. 그가 제시한 독특한 설계안이 마음에 들었던 데다 하벨 대통령이 밀루니치 설계안을 전폭 지지한 덕분이었다. ING뱅크는 그에게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을 파트너로 붙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누벨은 밀루니치의 설계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협력을 거부했다. ING뱅크는 전 세계를 뒤진 끝에 더 유명한 새 건축가를 그에게 소개했다. 바로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은 프랭크 게리였다.


공사는 1992년 시작됐다. 완공은 4년 뒤인 1996년이었다. 흉물스럽던 빈 땅에 36년 만에 새로운 생명의 숨결이 들어간 것이었다. 4년간 이어진 공사 도중이던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됐다. 하벨은 체코의 첫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찌그러진 7층짜리 건물 두 동이 나란히 서 있다. 왼쪽에 서 있는 건물이 오른쪽 건물에 기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부실공사로 건물이 기운 것 같기도 하다. 지진 때문에 쓰러진 것 같은 느낌도 준다. 밀루니치와 게리가 만든 건물의 모양이다. 이 건물은 지금 포스트 모더니즘 분위기를 풍기는 사무실 빌딩으로 사용되고 있다.


게리는 이 건물에 ‘프레드와 진저’라는 별명을 붙였다. 1986년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만든 유명한 코미디 영화의 제목이었다. 영화는 미국의 커플 댄서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포스터를 보면 왜 게리가 이 건물에 ‘프레드와 진저’라는 별명을 붙였는지 알 수 있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기대 선 모습이 건물과 흡사하다.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아주 보수적이었던 주민들은 밀루니치와 게리의 건물에 호응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건물을 ‘술 취한 집’이라고 불렀다. 건물 인근에 있는 블타바강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젊은이들이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비꼰 것이었다.


프라하 건축계는 물론 도시 전체에도 논란이 일어났다. 건물이 선 곳은 바로크와 고딕,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세워진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게리의 건물이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게리는 처음에는 ‘프레드와 진저’를 건물 이름으로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건물 모양도 못마땅하게 여긴 프라하 사람들은 건물에 미국 이름까지 붙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게리는 이름을 바꿔야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름은 ‘댄싱 하우스’였다. 정확하게는 ‘프라하의 댄싱 하우스’였다. 공식 명칭은 댄싱 빌딩이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댄싱 하우스는 국내외 관광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게 됐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 덕분이었다. 이 때문에 건물을 부정적으로 보던 프라하 사람들의 시각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은 동전이었다. 체코 국립은행은 2005년 ‘건축의 10세기’라는 주제로 기념 황금주화를 발행했는데 맨 마지막 편으로 댄싱 하우스 전경을 담은 것이다.


댄싱 하우스는 블타바강 주변인 라시노보 둑과 레스슬로바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앞에는 유이라스쿠프 다리가 강을 건넌다. 이 건물에는 사무실들이 들어차 있어 관광용으로 개방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1층 로비를 둘러보거나 7층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길 수는 있다. 이 레스토랑에서는 블타바강과 그 너머 프라하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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