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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18. 2024

브르노의 밀란 쿤데라 도서관

체코 출신의 세계적 작가 밀란 쿤데라는 지난해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장편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명성을 얻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던 인물이었다.


밀란 쿤데라는 1929년 브르노의 음악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부를 위해 프라하로 갔다. 처음에는 음악 공부를 했지만 나중에는 문학, 영화도 공부했다. 그곳에서 1969년 첫 소설 <농담>을 펴낸 덕에 작가로 유명해졌다. 그가 파리에서 망명 중이던 1988년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영화로 만들어진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이 소설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밀란 쿤데라가 눈을 감은 곳은 조국인 체코가 아니라 먼 이국인 프랑스 파리였다. 그는 마흔여섯 살이던 1975년 프랑스에 망명한 뒤 귀국하지 않고 파리에서 계속 살았다. 체코는 1989년 ‘벨벳혁명’으로 민주화됐고, 해외 망명을 떠난 많은 반체제 인사는 속속 귀국했다. 그런데 왜 유독 밀란 쿤데라는 귀국하지 않은 것일까?


체코 언론 기사에 따르면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한 뒤 조국 체코를 매우 싫어했다. 그런 사정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체코가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했지만 밀란 쿤데라는 조국을 거의 찾아가지 않았다. 거기에는 여러 사정이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공산주의였다. 밀란 쿤데라는 공산주의 신봉자였다. 그는 공산주의가 인류 역사 이래 누적돼 온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 대학생일 때 공산당에 가입했다. 공산당 학생회 간부로 활동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세상에 펼치는 공산당의 현실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그는 공산당-공산주의가 아니라 공산당-의 문제를 지적하는 글을 연거푸 잡지에 실었고 당 간부와 갈등을 빚었다, 이 때문에 당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다. 망명하기 직전에는 그는 물론 아내까지 직장을 잃어 호구지책을 걱정할 정도가 됐다.


두 번째는 인생의 경쟁자 바츨라프 하벨이었다. 밀란 쿤데라는 공산주의 신봉자였지만 하벨은 공산주의를 신뢰하지 않았다. 공산당 총서기 두브체크가 1968년 ‘인간의 모습을 한 공산주의’를 내세운 ‘프라하의 봄’을 추진하자 밀란 쿤데라는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소련을 앞세운 공산주의 동맹국들이 체코를 침공해 ‘프라하의 봄’이 좌절된 뒤에도 그는 ‘프라하의 봄’을 적극 주창했다. 


밀란 쿤데라는 ‘체스키 우델’이라는 잡지에 ‘프라하의 봄’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프라하의 봄’이 성공했더라면 민주주의, 인본주의, 사회주의가 화려하게 피어나 체코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지배 이전 중세의 전성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내용이었다. ‘프라하의 봄’은 중세에 종교 개혁, 사회 변혁을 꿈꾸다 화형을 당한 종교 지도자 얀 후스의 이상과 비슷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하벨이 이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하벨은 ‘트바시’라는 잡지에 ‘쿤데라의 주장은 허상이며 과대망상’이라고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밀란 쿤데라가 ‘프라하의 봄’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각종 제도는 이미 서구에서는 오래 전에 이뤄진 것이다. ‘프라하의 봄’이 성공하더라도 우리는 서구와는 달리 부스러기만 맛볼 수 있을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밀란 쿤데라와 하벨의 논쟁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잡지를 옮겨가며 이어졌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거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당시 체코 반체제 운동의 중심인물로 떠오르던 하벨과의 마찰 때문에 공산주의자 밀란 쿤데라는 체코에 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망명 중에도 체코 반체제 인사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벨벳혁명으로 하벨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에는 사정이 더 악화됐다. 쿤데라의 주변 인물에 따르면 쿤데라는 ‘하벨의 자리는 실제로는 내가 차지해야 했던 자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쿤데라가 망명을 떠나지 않았다면 체코에서 반체제 운동 지도자로 떠올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벨벳혁명 당시 하벨은 체코 국내에서만 유명했을 뿐 외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반면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덕분에 세계적 대문호 반열에 올랐다. 


1989년 벨벳혁명으로 체코에 민주주의가 도입됐지만 밀란 쿤데라는 귀국하지 않았다. 다만 고향인 브르노에 사는 옛 친구들과만 연락했다. 그가 귀국한 것은 2010년 등 극소수였다.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하고 수년 뒤부터는 모든 작품을 프랑스어로 썼다. 그는 프랑스어로 쓴 작품을 체코어로 번역해 출간하지 못하게 했다. 많은 체코 출판사에서 각종 제안을 내놓았지만 번번이 거절했다. 나중에 직접 체코어로 번역하겠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의 프랑스어 작품이 체코어로 번역된 것은 세상을 떠나기 불과 수년 전이었다. 그 이전에 체코에서 번역 작품이 나돌았는데 모두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적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하벨은 대통령이 된 뒤 밀란 쿤데라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쿤데라는 마지못해 받기는 했지만 시상식에 아내 베라를 대신 보냈다. 베라는 기자회견에서 ‘쿤데라가 왜 귀국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우리가 망명하고 1년 뒤 (또 다른 망명 작가) 파벨 티그리드와 점심을 같이했다. 그는 ‘쿤데라 씨, 정치에 관여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라고 주장했다. 티그리드는 하벨과 가까운 작가였으며 하벨이 대통령이 된 뒤에는 문화부장관을 맡았다. 베라는 “우리는 왜 티그리드가 그런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야 속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이 하벨을 반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었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밀란 쿤데라가 조국을 더 싫어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2008년 ‘리스펙트’라는 잡지가 그의 과거를 드러낸 기사를 보도한 것이었다. 쿤데라가 공산주의자 대학생이던 1950년대에 반체제 인사를 비밀경찰에 밀고해 징역 22년형을 받게 했다는 것이었다. 비밀경찰이 보관했던 반체제 인사 체포 문서에 ‘밀고자는 밀란 쿤데라, 1929년 4월 1일생’이라는 기록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밀란 쿤데라는 이 보도를 부인했지만 체코 국내에서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기사 때문에 쿤데라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됐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같은 노벨상 수상 작가 4명을 포함해 여러 명이 ‘그의 무죄를 확신한다’는 지지 성명서를 냈지만 국제적으로 그의 명성에는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밀란 쿤데라는 이 사건 때문에 “조국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조국을 향해 꽁꽁 얼어붙었던 밀란 쿤데라의 마음이 조금 녹은 것은 바츨라프 하벨이 죽고 8년 뒤인 2019년이었다. 체코 정부가 40년 만에 쿤데라의 체코 국적을 회복시킨 것이었다. 프랑스 주재 체코 대사 페트르 드룰락이 그해 11월 28일 그의 집을 찾아가 이미 아흔 살이던 그에게 국적 인증서를 전달했다.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 망명 1년 뒤인 1976년 체코 정부의 국적 박탈 조치 때문에 국적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죽음이 다가온 걸 느낀 밀란 쿤데라는 2020년 고향인 브르노에 일생 동안 모든 각종 서적과 문서를 기증했다. 그가 평생 수집한 책 4천여 권과 각종 수기 25상자 분량이었다. 체코 언론은 ‘밀란 쿤데라와 조국이 이전보다 더 가까워졌다는 걸 보여주는 선물’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가 체코 정부가 아니라 브르노 시청에 자료를 기증한 것은 여전히 체코에 대해서는 불편한 감정이 남아 있으며, 다만 고향인 브르노만은 평생 사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체코 정부는 밀란 쿤데라에게 2019년이 돼서야 국적을 회복시켜 줬지만 브르노는 이미 그 이전부터 밀란 쿤데라를 ‘고향 사람’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브르노시청은 2004년 그에게 브르노상을 주었고, 5년 뒤에는 명예시민증을 선물했다.


브르노시청은 밀란 쿤데라가 기증한 자료를 한데 모아 도서관을 만들었다. 새로 건물을 짓지는 않았고 브르노에 있는 모라비아시립도서관 1층을 리모델링해 ‘밀란 쿤데라 도서관’으로 바꾼 것이었다. 


밀란 쿤데라 도서관 개장식은 2023년 4월 1일에 열렸다. 브르노시청이 행사를 이날 연 것은 밀란 쿤데라의 아흔네 번째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개장식에는 체코 문화부장관 등 수백 명이 참석했지만 죽음을 앞둬 몸이 불편했던 쿤데라와 아내 베라는 참석하지 못했다. 


모라비아시립 도서관에는 회원증을 갖고 있어야 들어갈 수 있지만 1층 밀란 쿤데라 도서관에는 누구나 입장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 도서관은 그의 각종 작품과 인생을 조망하기 위한 자료, 시설로 꾸며졌다.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관련된 각종 자료 3천여 점이 전시됐다. 쿤데라와 지인의 편지 같은 개인적 자료도 전시됐다. 모라비아도서관은 앞으로 쿤데라의 기증 자료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독자들이 온라인으로 볼 수 있게 할 방침이다. 밀란 쿤데라 도서관에서는 각종 강의, 토론회, 기타 독서모임도 열린다. 


밀란 쿤데라는 조국 체코에는 평생 증오심을 가졌지만 고향 브르노에 대한 감정은 달랐다. 그는 고향을 정말 사랑했다. 그래서 죽기 직전 아내에게 수구초심을 담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고향 브르노에 묻어 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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