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권에 기독교를 전파해 ‘독일의 사도’로 불린 8세기 사제 성 보니파티우스는 파사우, 프레이싱, 라티스본, 잘츠부르크의 4대 교구를 설립했다. 그는 파사우의 주교로 일하며 종교를 곳곳에 퍼뜨렸다. 성 보니파티우스처럼 중요한 성인이 재임했던 곳이어서 파사우 교구의 자존심은 매우 높았다.
그런데 12세기 초 파사우 교구를 관할하던 레긴마르 주교는 빈 사람들이 가장 자주 찾는 성소가 잘츠부르크의 수호성인인 성 루프레흐트와 성 베드로에게 봉헌한 루프레흐트스키어셔, 페터스키어셔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파사우의 수호성인인 성 슈테판에게 헌정한 성당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자존심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됐다.
레긴마르 주교는 빈을 파사우 교구의 관할권에 집어넣기로 작정했다. 이미 존재하는 루프레흐트스키어셔와 페터스키어셔를 없일 수는 없으니 대신 성 슈테판에게 봉헌하는 성당을 건설해 빈 사람들이 루프레흐트스키어셔, 페터스키어셔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도록 만들기로 했다.
문제는 아무리 파사우 교구의 주교라 하더라도 이런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빈은 오스트리아 태수의 영토였는데, 이곳을 다스린 태수는 레오폴트 3세 공작이었다. 그와 합의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진행할 수 없었다.
다행히 레긴마르 주교는 레오폴트 3세와 매우 친한 사이였다. 레오폴트 3세에게 종교적 도움이 필요하면 주교가 힘을 보탰고, 거꾸로 주교에게 군사적, 정치적 지원이 필요하면 레오폴트 3세가 달려갔다.
레긴마르 주교는 바이에른의 레겐스부르크에 있던 레오폴트 3세를 만나러 갔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빈의 종교적 권리를 파사우 교구에 주십시오. 루프레흐트트키어셔나 페테르스키어셔는 물론 빈의 모든 교회를 우리 교구에 넘기십시오.”
레오폴트 3세는 주교의 말을 다 들은 뒤 웃으며 말했다.
“교회를 다 드리고 나면 저에게는 남는 게 없겠군요.”
레긴마르 주교도 껄껄 웃었다.
“손해 보는 장사를 하시면 안 되지요. 거기에 걸맞은 대가를 드리겠습니다.”
“뭘 주시겠습니까?”
“공작께서 빈에 매우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주교의 말처럼 공작은 빈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곳으로 취급됐지만, 위치가 좋아서 군사도시로 만들든지 아니면 도나우강을 낀 무역도시로 바꾸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가진 땅은 옛날 고대 로마 시대에 로마인이 만든 군사기지인 빈도보나 일대뿐이어서 하고 싶은 일을 적극 추진하기는 어려웠다.
공작은 속사정을 잘 아는 주교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주교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 수 없어 그냥 웃기만 했다.
“관심만 많습니다. 껄껄.”
주교는 두 눈을 쫑긋 뜨고 진지하게 말했다.
“파사우 교구는 빈에 땅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 땅을 다 드리지요. 그러면 공작께서 빈을 활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작의 표정은 순식간에 진지하게 바뀌었다.
“제가 빈 시내에 있는 모든 교회 건물과 종교 관할권을 주교께 드리면, 주교께서는 빈의 땅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하면 주교께서 저보다 더 손해를 보시는 게 아닙니까?”
주교는 빙긋 웃었다.
“저는 대신 다른 조건을 하나 더 걸겠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 군사기지 외곽에 성당을 하나 지을 생각입니다.”
“새 성당을 지으시겠다고요?”
“파사우의 수호성인인 성 슈테판에게 바치는 대성당을 지을 생각입니다. 공작께서는 대성당을 짓는 비용을 지원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서로 주고받는 게 비슷해질 겁니다.”
공작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에게 돈이나 인력은 부족하지 않았다. 모자란 것은 빈의 땅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상세한 내용은 양측 대리인에게 논의하라고 시키면 되겠습니다.”
정치권력과 교회가 땅을 주고받는 일이다 보니 합의서를 만드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레오폴트 3세는 모든 게 정리되기도 전인 1136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무산되는 것처럼 보였던 양측의 영토 교환은 레오폴트 3세가 눈을 감은 지 1년 만인 1137년에 이뤄졌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레오폴트 4세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른 바 ‘마우테른 조약’에 서명한 덕분이었다.
레오폴트 4세에게는 형이 둘이나 있었다. 생몰 연도를 알 수 없는 큰형 아달베르트와 한 살 위인 하인리히 2세 야소미르고트였다. 아버지 레오폴트 3세가 죽은 다음 셋째 아들인 그가 두 형을 제치고 공작자리를 물려받은 것을 보면 능력이 뛰어나고 술수도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레오폴트 3세와 레긴마르 주교가 당초 약속한 대로 빈의 교회 건물과 종교 관할권은 파사우 교구가 가져가기로 했다. 대신 빈도보나 주변의 포도밭 같은 넓은 땅은 레오폴트 4세가 건네받기로 했다. 다만 성슈테판대성당을 새로 지을 빈도보나 동쪽의 공터만 파사우 주교가 계속 보유하기로 했다.
성슈테판대성당 건설 부지는 원래 로마군 기지에서 나오는 시신을 묻는 공동묘지로 사용하던 장소였다. 대성당을 짓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무덤과 장례용 구조물이 적지 않았다. 20세기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케른트너거리와 그라벤거리가 만나는 지점인 스톡-임-아이젠-플라츠에서 많은 무덤이 발굴됐다.
레오폴트 4세는 아버지가 약속한 대로 주교에게 성당을 지을 공사비는 물론 인력을 지원했다. 성당 축성식이 열린 것은 조약 체결로부터 10년 뒤인 1147년이었다. 모든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축성식으로부터 13년 뒤인 1160년이었다.
파사우 교구의 기대대로 새 대성당에는 신도가 몰려들었다. 당시 빈에는 교회 4곳이 있었지만 모두 규모가 작고 시설이 낡아 지역 주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데, 넓고 화려한 새 성당이 생기자 사람들은 발길을 돌린 것이었다.
맨 처음 지은 대성당은 1258년에 발생한 대형 화재 때문에 전소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성당 기둥이 세워졌던 초석뿐이었다. 파사우 교구는 대성당을 새로 짓는 공사를 곧바로 재개했다. 이후에도 대성당은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피해를 입어 증축, 재건축을 되풀이했다. 1278년에 다시 불이 나 큰 피해를 입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고딕 양식으로 보수, 증축을 실시한 덕분에 재건될 수 있었다.
빈은 제2차 세계대전 때 52차례나 폭격을 당했다. 많은 폭탄이 빈에 떨어졌지만 성 슈테판 대성당은 폭탄 세례를 피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던 것도 이유였지만 연합군이 성당, 궁전 등 역사적 유적을 피해 정밀하게 폭격한 덕분이었다.
전쟁 막바지였던 1945년 4월 11일의 경우는 달랐다. 연합군은 원래 대성당 근처에 있는 공장에 폭탄을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수로 폭탄이 대성당에 떨어져 대성당은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신도석 천장은 무너졌고 고딕 양식으로 지은 합창대는 그 아래에 묻혀버렸다. 두 번째 폭탄은 초대형 종을 파괴해 버렸다. 성당은 나흘 동안이나 불탔다.
성슈테판대성당 재건 작업은 전쟁이 끝난 뒤 곳곳에서 모은 성금으로 진행됐다. 다른 나라에서도 지원금을 보냈다. 정부는 부족한 공사비를 채우기 위해 대성당 우표까지 발행했다. 기본적인 복구 작업이 마무리된 것은 1952년이었다. 모든 공사가 최종적으로 끝난 것은 1976년이었다. 붕괴 22년 만에 재건된 북쪽 탑이 마지막 공사 부분이었다.
성슈테판대성당은 가로 109m, 세로 72m, 높이 65m 규모를 자랑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가장 중요한 고딕 건축물이인데, 오스트리아인은 이곳을 ‘슈테플’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대성당을 빈의 상징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민족적 성지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