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부르크왕궁의 성창

by leo


1.


서기 30년, 또는 33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 로마군 병사 여럿이 서 있었다. 그들 곁에서는 여러 사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서서히 죽어갔다. 그중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고대 로마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책형’은 아주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사형이었다. 로마인은 로마시민을 사형할 때는 책형을 사용하지 않았다. 책형은 노예, 반역자, 외국 범죄자를 모욕하면서 처형할 때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책형을 당하는 사형수가 죽음에 이르는 시간은 죄질과 책형의 방법에 따라 수시간~수일로 달랐다. 사형수가 일찍 죽지 않을 경우 쇠몽둥이로 사형수의 뼈를 부수기도 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형수들을 둘러보는 다른 사내가 있었다. 로마군 병사들의 지휘관인 백인대장 론지누스였다. 그는 예수 앞으로도 걸어가 이리저리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미, 죽은 것 같군. 뼈를 부술 필요는 없겠어. 그래도 모르니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봐야겠군.’


론지누스는 이미 예수가 눈을 감았다고 생각하고 평소 다른 사형수들에게 하던 것처럼 쇠몽둥이로 뼈를 부술 필요는 없다고 봤다. 그래도 만에 하나 착오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복음 19장 34절)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물처럼 쏟아졌다. 피는 바로 아래에 서 있던 론지누스의 눈 위로 쏟아졌다. 그는 평소 심각한 눈 질병에 시달린 탓에 시력이 매우 약해져 한 치 앞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의사가 곧 실명할 것이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그런데, 론지누스가 예수의 피를 뒤집어쓴 순간 갑자기 눈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아! 눈이 보인다. 눈이 보여. 이건 기적이야! 예수, 이 사람은 진정한 구원자였단 말인가?”


성경에도 이 장면이 설명돼 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가복음 15장 39절)


큰 감동을 받은 론지누스는 곧바로 기독교인으로 개종했고, 군에서 제대해 수도사가 됐다. 로마로 돌아간 그는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붙잡혀 참수형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세월이 한참 흐른 이후 성인이 돼 성 론지누스로 불리게 됐다. 성베드로대성당 돔 바로 아래 발다키노 주변 네 모퉁이에 네 개의 벽감이 있는데, 각 벽감에는 약 10m 크기의 조각상이 하나씩 서 있다. 그중 하나는 창을 든 모습의 성 론지누스 조각상이다.



2.


론지누스가 개종해서 군을 떠난 뒤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3세기 무렵 이집트 테베 출신 로마군 사령관 모리스의 손에 들어갔다. 흑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리스는 기독교도였고 그가 이끈 병사도 대부분 테베 출신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테베군단'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로마 황제 막시밀리아누스는 모리스에게 병사 6000여 명을 이끌고 스위스로 가라고 했다. 로마 지배에 저항하고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기독교인들을 몰살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을 베어 와서 로마의 여러 신에게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다.


모리스는 죄 없는 기독교도들을 죽일 수 없다며 명령을 거부했다. 분노한 황제는 그들에게 ‘10분의 1형’이라는 처벌을 내렸다. 병사들이 명령을 듣지 않거나 큰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명령에 따를 때까지 또는 잘못을 뉘우칠 때까지 10명마다 1명씩 죽이는 처벌이었다. 무작위로 10명마다 1명을 고르기 때문에 누가 죽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리스는 무고한 기독교인은 물론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부하 병사들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순교를 원하지 않거나 기독교인이 아닌 병사들에게 원한다면 군에서 이탈하라고 했다. 처벌하러 달려온 장군에게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목숨을 건지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죽을지라도 무고한 기독교인에게 칼을 들이댈 수는 없다. 너희 중에서 하느님을 위해 죽는 게 무섭거나 기독교도가 아닌 자는 자리를 떠나도 좋다. 아무도 너희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진영에서 달아나지 않았다. ‘10분의 1형’이 시작돼 여러 순배가 돌 때까지도 모리스와 병사들은 황제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다.


모리스를 처벌하러 간 장군에게서 소식을 듣고 화가 더 치민 막시밀리아누스 황제는 병사를 모두 죽이라고 했다. 결국 테베 출신 병사들은 기독교인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그들의 정확한 인원은 6666명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처형당한 곳은 아가우눔이었는데 순교한 모리스의 이름을 따 지금은 ‘생 모히쓰’로 불린다. 그곳에는 성 모히쓰 수도원이 있다. 모리스는 세월이 흘러 성인 반열에 올랐고 흥미롭게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수호성인이자 군인,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 보병의 수호성인이 됐다.


성 모리스는 흑인으로 추정되는데 15세기에 독일 뉘른베르크 북쪽 코르부르 시청은 성 모리스를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삼으면서 노란 귀걸이를 한 흑인으로 묘사된 모리스의 얼굴을 도시 문장에 새겨 넣었다.



3.


론지누스의 기적과 모리스의 순교가 담긴 성창은 이후 여러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 다들 성창을 갖고 싶어 했는데, 성창을 소유하면 천하를 주름잡는다는 속설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었다.


성창은 4세기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손에 들어갔다. 9세기 초에는 교황 레오 3세가 성창을 샤를 대제, 즉 샤를마뉴에게 선물로 증정했다. 전설에 따르면 샤를마뉴는 47번의 전투에 성창을 들고 나가 모두 승리했고, 우연히 성창을 떨어뜨렸을 때 목숨을 잃었다.


성창은 10세기 무렵에는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는 성창을 앞세워 정복 사업을 벌여 나갔다. 성창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 오토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됐으며, ‘이탈리아 황제로 불린 독일인’이라는 영광을 얻었다. 하인리히 1세의 손자 오토 3세는 전쟁에 나설 때마다 병사들에게 성창을 보여주며 용기를 북돋았다.


지금은 유럽의 3개 도시가 ‘성창을 가진 도시’로 알려졌한다. 그중 한 곳은 바로 오스트리아 빈이다. 빈의 성창은 원래 19세기에는 뉘른베르크에 있었지만 프랑스 나폴레옹이 침략전쟁을 시작하자 빈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이 성창을 확보하면 천하무적이 될 것을 우려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정이었다.


독일의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를 병탄한 뒤 성창을 빼앗아 뉘른베르크로 다시 옮겼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연합군은 1945년 4월 40일 뉘른베르크 지하터널에서 성창을 발견해 빈으로 되돌려 보냈다. 전설에 따르면 연합군이 성창을 확보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히틀러는 베를린의 벙커에서 자살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성창을 호프부르크왕궁 제국박물관에 보관했다. 제국박물관은 2003년 영국의 금속학자 로버트 페더 박사에게 의뢰해 성창의 연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7세기에 만든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빈의 고고학연구소가 엑스레이 등을 동원해 다시 조사해보니 성창은 8~9세기 무렵에 만들었으며, 1세기에 제작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탈리아 로마의 성베드로대성당에도 성창이라는 게 보관돼 있지만 대성당 측은 이 성창이 진짜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마지막 성창은 아르메니아의 종교적 수도로 일컬어지는 바가르사파트에 보관돼 있는데, 이곳은 이전에는 ‘독생자(예수)의 강림’라는 뜻인 에츄먀친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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