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부르크왕궁의 마리아 안토니아

by leo


“응~애, 응~애.”


오스트리아 빈 호프부르크왕궁의 한 침실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음성이 작고 귀여운 걸로 보아 여자 아기가 태어난 모양이었다. 1755년 11월 2일 밤 8시 30분의 일이었다.


아기를 낳은 여성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걸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였다. 태어난 아기는 그녀의 열다섯 번째 자녀이자 딸 중에서는 막내인 마리아 안토니아 조세파 조안나였다. 19년 뒤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태어난 것이었다. 가족은 그녀를 앙투앙이라고 불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린 자식들을 돌보기에는 너무 바빴다. 여름에는 새벽 4시, 겨울에는 6시에 일어나 하루 일정을 시작해 거의 자정이 다 돼서야 마쳤다. 그래서 앙투앙은 태어나자마자 다른 오빠, 언니들처럼 어머니 품을 떠나 유모에게 넘겨졌다. 그녀는 첫 겨울을 호프부르크왕궁의 육아실에서 보냈다. 유모는 고위관리의 부인인 콘스탄스 베버였다. 앙투앙은 베버를 무척 좋아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프랑스에 시집을 가서도 베버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아바마마, 생신을 축하드리옵니다.”


앙투앙이 세 살이 될 때까지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은 가족 말고는 없었다. 그녀가 공식 무대에 데뷔한 것은 네 살이던 1759년 아버지 프란츠 슈테판 국왕의 생일 축하 파티에서였다. 부모는 물론 귀족, 왕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앙투앙은 프랑스어로 축하 노래를 불렀다. 형제들은 음악을 연주했다.


당시 빈 궁정의 분위기는 격식에 별로 얽매이지 않고 느슨한 편이었다. 아버지 프란츠 슈테판의 영향이 컸다. 남편을 정말 사랑했던, 그래서 아이를 열여섯 명이나 낳은 마리아 테레지아도 이런 부분에서는 남편의 뜻을 존중했다.


앙투앙은 다른 형제들처럼 아버지를 좋아했다. 프란츠 슈테판은 국왕이면서 국정은 부인에게 모두 떠맡기고 한량처럼 편안하게 살았다. 그는 딸들에게 유전자적 기질을 그대로 물려줬다. 식물과 꽃, 그리고 정원을 좋아하고 가꾸는 성격이었다.


반면 딸들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두려움의 눈으로 바라봤다. 앙투앙은 한 편지에 어머니에 대한 심경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를 정말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매우 무서워합니다. 심지어 먼 거리에서 보더라도 가슴이 콩콩 뛴답니다. 어머니에게 편지를 쓸 때 마음이 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앙투앙의 형제들은 호프부르크왕궁에서 자신들끼리, 혹은 다른 귀족이나 왕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극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했다. 겨울에는 호프부르크왕궁 정원에 나가 썰매를 탔다. 썰매를 즐긴 뒤에는 깔깔거리며 따뜻한 초콜릿을 나눠 마셨다.


그들은 여름이면 호프부르크궁전을 떠나 쇤브룬궁전에 가서 무더위를 피했다. 쇤브룬궁전의 정원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물놀이도 했다. 도시락을 싸 들고 쇤브룬궁전 여러 분수를 돌아다니며 소풍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이들이 이른바 ‘평범한’ 어린이들과도 함께 놀게 했다. 물론 그녀가 말한 평범한 어린이들이란 평민이 아니라 귀족의 자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앙투앙의 형제들은 대체로 매우 친밀했다. 물론 형제 사이에 시기와 질투가 없지는 않았다. 앙투앙과 언니들은 딸 중에서 넷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약간 질투했다. 어머니가 그녀를 가장 좋아했던 데다 자매 중에서 유일하게 정략결혼을 하지 않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앙투앙은 세 살 많은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 루이사와 매우 친했다. 둘 다 성격이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다. 남들이 볼 때는 마치 쌍둥이처럼 놀았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1768년 열여섯 살 때 나폴리 국왕과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는데 동생에게 수시로 편지를 써서 심정을 밝혔다.


‘나와 똑같은 네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속으로 짊어져야 하는 고통은 엄청난 운명에 대해 이야기해 줘야 할 것 같아.’


부모는 너무 바빠 앙투앙의 교육을 제대로 챙길 수 없었다. 그들은 브란데이스 공작부인에게 딸의 교육을 맡겼다. 문제는 공작부인이 그다지 책임감이 강하거나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부모도 그 점을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국정 때문에, 아버지는 사생활 때문에 너무 바빴다. 게다가 부모는 막내딸인 앙투앙을 귀엽게만 보았지 엄격하게 교육시킬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7년 전쟁이 끝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랜 앙숙이었던 프랑스와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 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었다. 그녀는 딸 중 하나를 프랑스 국와 루이 14세의 손자인 루이 왕세자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딸들을 사랑했지만 국가의 운명 때문에 딸들을 ‘외교 장기판의 말’ 같은 존재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앙투앙은 늘 상대에게 밝은 미소를 보여주는 게 특징이었다. 당시 빈 주재 프랑스 대사는 그녀를 ‘우아한 매력 덩어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영향 덕분인지 앙투앙이 루이 14세의 손자와 결혼할 대상자로 떠오르자 프랑스 측에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앙투앙은 춤을 잘 췄고, 자수를 좋아했으며, 하프 연주를 즐겼다. 하지만 프랑스어를 읽거나 쓸 줄도 몰랐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 결혼식까지는 2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 14세에게 좋은 가정교사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루이 14세는 애비 드 버몽이라는 교사를 빈으로 보냈다. 그는 다소 우둔하고 학습지진아 상태였던 앙투앙을 똑똑한 숙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친구에게 사정을 털어놨다.


“앙투앙이 사물을 심도 있게 분석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다네.”


앙투앙은 예뻤고 피부는 밝은 핑크빛이었다. 늘 발랄하고 표정이 밝아 상대에게 호감을 줬다. 외모에서 큰 문제는 치아였다. 전혀 가지런하지 않고 울퉁불퉁했던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명한 프랑스 치과의사를 빈으로 불렀다. 의사는 앙투앙에게 치아교정기를 착용하게 했다. 결혼식 직전까지 교정기를 쓴 덕분에 그녀의 치아는 가지런해질 수 있었다.


마지막 문제는 헤어스타일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금발이었지만 그다지 질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제대로 관리를 못 해 깔끔하지도 않았다. 이마도 앞으로 툭 튀어나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역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미용사를 불러 문제를 해결했다.


앙투앙은 외양적으로는 프랑스의 왕세자비가 될 준비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대 최고의 화가를 불러 앙투앙의 초상화를 그려 프랑스 파리로 보냈다. 루이 14세는 손자며느리의 초상화를 보고 매우 만족했다.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으로 떠나는 앙투앙을 위해 1770년 4월 19일 벨베데레궁전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다. 이틀 뒤 그녀는 어머니와 형제들, 친구,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작별인사를 남기고 황금과 유리로 장식한 마차에 올라 오스트리아 빈을 떠났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주일 뒤 앙투앙, 즉 마리아 안토니아 조세파 조안나를 태운 마차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었다. 그녀는 월경한 직후 오스트리아에서 입고 간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프랑스 왕실에서 보내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은 베르사유궁전에서 열렸다. 그녀는 은색과 흰색 바탕에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남편 루이 왕세자와 함께 ‘거울의 방’을 지나 왕립 예배당으로 들어가 결혼식 미사를 올렸다.


결혼식을 하던 날 열다섯 살이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식 디너파티에서 한 살 많은 남편 루이 왕세자와 실수 없이 춤을 추었다. 춤을 좋아하던 그녀에게 댄스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16가지 코스로 마련된 베르사유 결혼식장의 음식은 매우 화려했다. 다만 음식 유형이 오스트리아와는 너무 달랐다. 미식가인 루이 왕세자는 음식을 즐겼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입맛을 잃었다. 그녀는 파티가 끝난 뒤 오스트리아에서 따라온 시녀에게 디저트를 가져오라고 했다. 오스트리아의 빵이던 크로아상이 프랑스에 퍼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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