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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30. 2024

황후 시씨와 쇤브룬궁전의 추억


1.


1853년 8월은 무척 무더웠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탓에 햇빛은 전혀 가려지지 않고 모조리 땅에 쏟아졌다. 오스트리아 바트이슐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별장 카이저빌라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열여덟 살 생일 연회가 열렸다. 많은 귀족, 왕족이 참여해 행사를 즐겼다.


이날 행사는 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바이에른공국 막시밀리안 공작의 맏딸 헬레나의 약혼식을 겸했다. 폭염에 가까운 날씨였지만 사람들이 몰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부인은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루도비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바이에른왕국의 막시밀리안 1세 조제프 국왕이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오스트리아 왕실과 여러 차례 혼인 관계를 맺은 가문으로 유명했다. 루도비카의 언니인 소피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어머니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태후였다. 


헬레나의 아버지 막시밀리안 공작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권력과 명예에 그다지 큰 욕심이 없었다. 그저 아내, 자녀들과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시 짓기를 좋아했고, 악기 연주와 마술 배우기도 즐겼다. 아이들에게 시를 읽어주고, 직접 음악을 연주해서 들려주거나 마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이들이 즐겁게 깔깔 웃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루도비카와 언니 소피는 달랐다. 두 사람은 자녀를 재산으로 여기는 당시 시대정신을 고스란히 가진 왕족이었다. 그들은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지키고, 그들의 부귀영화를 존속시키는 데 관심이 많았다. 두 사람은 오랜 논의 끝에 루도비카의 큰딸인 헬레나와 소피의 맏아들 프란츠 요제프를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날 약혼식은 그런 연유로 열리게 된 행사였다.


“♩~♪~♪~♬~”


“♬~♩~♪~♪~”


합스부르크 왕가 소속 궁정악단이 연주하는 화려한 음악을 배경 삼아 약혼식 참석자들은 왈츠를 추었다. 새로운 황제 부부의 탄생을 눈앞에 둔 상황이어서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흘러넘쳤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왈츠를 추자는 여러 귀족 여성들의 제의를 정중하게 뿌리친 뒤 행사장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는 내년에 결혼할 헬레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차분한 소녀였지만, 사실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매지간인 두 집안의 어머니끼리 합의한 약속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헬레나 옆에 앉은 소녀를 발견했다. 헬레나는 참석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반면 소녀는 집에서 착용하는 평범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는 길게 땋아 내린 상태였다. 그런데도 소녀의 미모는 헬레나를 훨씬 뛰어넘어 환하게 빛났다.


어린 황제의 눈은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가슴은 방금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한 소년처럼 콩콩 뛰기 시작했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얼굴은 벌게졌다. 그는 소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눈에 이제 헬레나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는 영원히 후회하게 될 거야. 황제로서 독자적 결정을 내린다면 어머니와 이모도 거부하지 못할 거야.’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식용 화병에 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아주 크고 열정적으로 핀 장미였다. 그는 꽃을 꺼내 들더니 소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던 헬레나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소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장미꽃을 선사했다. 


“내가 세상에서 만나본 가장 아름다운 소녀여! 나와 결혼해 주시겠소?”


헬레나와 약혼식을 연다고 오스트리아의 귀족들과 여러 나라의 왕족들을 초대했는데, 갑자기 결혼 상대를 바꾼다는 프란츠 요제츠 황제의 말은 행사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았다. 황제가 결혼하겠다고 한 소녀는 헬레나의 동생인 엘리자베트였다. 나이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줄여서 부르는 이름은 시씨였다. 황제의 깜짝 선언에 가장 놀란 사람은 소피 태후였다. 


“황제, 너무 성급하신 것 아니오? 일이라는 것은 차근차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거늘….”

“어머니, 저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눈을 보세요. 딸기 같은 입술은 또 어떤가요. 갓 피어난 아몬드처럼 신선하고 아름다운 소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요?”


태후는 아들을 여러 차례 타일렀다. 며칠 더 여유를 두고 생각해 보자고 했고,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다시 바뀔 수도 있다고도 했고, 소녀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황제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황제가 어머니의 당부를 거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태후는 엘리자베트를 불러 사근사근하게 물어보았다. 엘리자베트는 태후이기에 앞서 이모인 소피 앞에서 별다른 부담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얘야, 황제가 너를 사랑한다는구나. 너는 황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모, 어떻게 저런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다만 황제가 아니라면 좋을 텐데….”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의 결혼식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둘 다 어린 나이였지만, 먼 과거 페르디난드 1세 황제가 후사를 보지 못해 조카인 프란츠 요제프가 즉위한 일을 잘 기억하는 황실로서는 결혼식을 서둘러야 했다.



2.


세기의 결혼식은 1854년 4월 24일 빈의 호프부르크왕궁 인근에 있는 아우구스티너키어셔, 즉 아우구스티너 교회에서 치러졌다. 결혼식을 마친 새 신부는 마차에 올라 호프부르크왕궁까지 이동했다. 거리에는 빈 시민 수천 명이 구름처럼 몰려 오스트리아 제국의 새 황후를 보려고 앞 다퉈 머리를 들이밀었다. 


시씨는 이 장면이 너무 부담스러웠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했다.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성격이었던 새 황후는 시어머니와 오스트리아 귀족들에게 첫인사를 드리러 가는 마차 안에서 대성통곡하고 말았다. 


사실 빈의 귀족은 시씨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그들은 ‘헛간’에서 태어난 새 왕비의 자질을 걱정했다. 게다가 시씨는 유럽 최대 제국인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될 준비를 전혀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오스트리아 역사는 하나도 몰랐고, 황궁에서는 옷을 어떻게 입는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주 까다로운 궁궐 법도도 전혀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아우구스티너키어셔에서 열린 결혼식을 마치고 호프부르크왕궁에 도착한 시씨를 기다린 것은 바로 이 같은 귀족들의 시선이었다. 그들의 두 눈에는 ‘어디 너 같은 것이 황후라고…’하는 경멸감 섞여 있었다. 영리한 시씨가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시씨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를 감지하고 금세 ‘멘붕 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콩콩거리는 가슴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 없어 옆방으로 달려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황후의 눈물 이야기를 들은 귀족 부인들은 입방아를 찧어대기 시작했다. 시녀들의 설득에 따라 다시 연회장에 들어선 시씨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시씨 부부는 쇤브룬궁전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추운 겨울에는 호프부르크왕궁에 들어가 살았다. 신혼은 시씨가 기대했던 아름답고 황홀한 러브스토리와는 전혀 달랐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황후를 정말 사랑했지만 매일 정무로 바빠 제대로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이모이자 시어머니인 태후는 시씨를 도와주기는커녕 괴롭히기만 했다. 태후는 18세기의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녀는 인간의 개성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필요성이 없어지면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다는 관념을 갖고 있기도 했다. 이런 가치관은 조카이자 며느리인 시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황후마마, 그렇게 말씀하시면 상대에게 실례를 저지르는 것이옵니다.”

“황후마마, 걸으실 때 그런 자세를 하시면 천박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시옵니다.”


황실 생활은 시씨를 점점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매일 귀족들과 시종들로부터 황실 법도에 어긋난다는 지적에 시달렸다. 행동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분석하는 시종들로부터 끊임없이 고치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시씨가 찾은 해결책은 미모 가꾸기와 승마였다. 그녀는 당시 유럽 모든 황후, 왕비 중에서 가장 미모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씨의 초상화를 그린 당대의 화가 프란츠 사베르 빈터할트가 남긴 글이 그녀의 미모를 잘 설명한다.


“황후의 미모는 놀라울 정도다. 키는 크고, 몸매는 매우 균형이 잘 잡혔고, 밝은 갈색 머리카락은 화려하다. 낮은 이마는 그리스의 여신 같고, 눈은 부드럽다. 입술은 매우 붉고 미소는 달콤하다. 목소리는 아주 낮은 뮤지컬 음악처럼 들리고, 몸동작은 우아하다.” 


시씨는 미모를 유지하고 가꾸는 일에 피눈물 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키는 170cm를 넘었지만, 평생 몸무게는 50kg 아래였다. 당시 여성들과는 달리 화장품과 향수를 즐겨 사용했다. 피부를 부드럽게 유지하려고 매일 아침에는 찬물로 샤워하고, 저녁에는 올리브오일 목욕을 했다. 


잠을 잘 때에는 일부러 베개를 사용하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면 그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잠들기 전에 얼굴에 송아지 생고기나 다진 딸기를 페이셜마스크처럼 바르기도 했다. 엉덩이를 작게 만들고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제비꽃이나 사과식초에 담근 옷을 꼭 조여 입고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음식물 섭취도 철저하게 관리했다. 


시씨는 쇤브룬궁전의 방에 의자 모양 체중계를 곳곳에 갖다놓고 늘 몸무게를 달았다. 뿐만 아니라 늑골 벽, 줄넘기용 줄, 링 등 운동시설이나 도구를 비치해두었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만들어 기구나 시설을 이용해 실내에서 체조를 했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 동안 운동하는 것은 당시 왕실에서는 일상적이지 않았다. 지금 쇤브룬궁전 남동쪽 1층에는 ‘하얀 황금의 방’이라는 뜻인 바이스골드지머라는 방이 있다. 하얀 벽과 천장이 황금색 벽토로 치장된 방이다. 운동에 매달렸던 시씨가 각종 기구를 가져다놓고 체조를 즐겼던 곳은 바로 여기였다.


시씨는 승마에도 집착했다. 아버지에게 배워 어릴 때부터 즐기던 운동이었다. 그녀는 하루에 여러 시간 동안 말을 타곤 했다. 나중에는 유럽에서 남녀를 통틀어 가장 승마술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게 더 빨리 더 멀리까지 말을 타게 됐다. 가능하면 쇤브룬궁전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시씨는 결혼 이듬해 첫 딸을 낳았다. 이름은 소피라고 지었다. 불과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는 딸을 무척 사랑했다. 자식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황궁에 시녀로 들어온 어릴 적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기가 얼마나 축복인지 이제야 알겠어. 아무런 희망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쇤브룬궁전 생활에서 소피는 나의 유일한 기쁨이야.”


태후는 그런 그녀에게 절망을 안겨다 주었다. 어린 며느리에게서 딸을 빼앗아가 버린 것입니다. 당시 황실 법도에 따르면 왕자와 공주들은 어머니에게서가 아니라 유모와 가정교사에 의해 길러져야 했다. 이후에 태어난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태후는 며느리의 방과 정반대편인 쇤브룬궁전 서쪽 부분에 있는 자신의 방 바로 옆에 육아실을 설치했다. 시씨가 모유를 먹이거나 돌보는 것을 금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만나지도 못하게 했다. 둘째딸 기젤라를 낳았을 때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씨가 두 딸을 만나려면 미리 태후에게 알려 승낙을 받아야 했다. 승낙을 받더라도 태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매우 짧은 시간 동안 딸의 얼굴만 잠시 보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런 행위가 며느리의 가슴을 찢어놓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 태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첫딸 소피는 결국 엄마의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채 이듬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시씨는 자식들을 돌보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러 가는 것도 포기하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즐거움보다 시어머니의 승낙을 받기 위해 태후의 방에 들어가는 고통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즐거움을 잃은 그녀의 심적 상처는 점점 깊어갔다. 


“결혼은 정말 멍청한 일이야. 열다섯 살 아이가 결혼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팔려가고, 그리고 30년 동안 후회만 하고 사는 것이지. 하지만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게 비극이야.”


불행과 고통이 이어지면서 시씨는 결혼을 후회하게 됐다. 일에만 매달리는 남편은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전혀 중재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부부의 사이도 악화일로를 걸었다. 


시씨는 불면에 시달리게 됐다. 수면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대신 밤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곤 했다. 심지어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정신적으로도 황폐해졌다.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녀의 딸 발레리는 열세 살 때 일기장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엄마는 정말 목욕을 이상하게 한다. 엄마에게 가면 깔깔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정말 무섭다. 하지만 오늘은 다행히 괜찮아 보인다.’



3.


겨우 버텨가던 시씨에게 결정적으로 타격을 준 불행이 일어났다. 외아들인 루돌프가 1889년 빈 근교에서 마리아 베체라라는 애인과 동반 자살한 것이었다. 이 일은 시씨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사이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쌓고 말았다. 


‘보고 싶은 아버지, 그리운 내 고향….’


시씨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됐다. 어릴 때 아버지가 들려주던 음악 연주와 서투르게 보여주던 마술 공연이 보고 싶어졌다.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 몰래 뛰어다니던 이사르강의 푸른 제방에도 다시 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고향에 가더라도 아버지는 볼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시씨는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행을 선택했다. 그녀는 엄청난 악몽을 안겨준 쇤브룬궁전을 떠나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녀가 다닌 여행지에는 스위스, 영국, 아일랜드, 그리스 등 유럽 국가뿐만 아니라 모로코, 알제리, 이집트, 터키 등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유럽의 왕족이 거의 다니지 않는 여행지였다. 


시씨는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쇤브룬궁전에 있는 방에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여행용 가방이 늘 준비됐다. 빈의 장인들에게 부탁해 각종 여행용 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그녀가 사용했던 여행용품은 호프부르크왕궁의 시씨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황후마마, 이번에는 여행을 잠시 보류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마마를 시해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1898년 9월 10일 이미 환갑을 넘은 시씨는 황제 없이 혼자서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스위스 제네바였다.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 휴가를 보낸 곳이었다. 숙소는 ‘하얀 언덕’이라는 뜻의 보리바즈 호텔이었다. 황실 경비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체가 황후를 암살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황후에게 이번에는 여행을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황후는 이를 묵살하고 시녀들만 데리고 제네바로 출발했다.


여행 중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씨는 흡족한 일정을 보낸 뒤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레만호에 정박하고 있던 배를 타기로 했다. 그녀는 느긋하게 레만호로 이어지는 몽블렁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 낯선 남자가 황후 주위로 다가왔지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송곳을 꺼내 그녀의 가슴을 푹 찔렀다. 마침 시녀들은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기는 바람에 이 장면을 보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는 큰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가슴을 찔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낯선 남자가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갔다는 정도로만 여겼다. 그녀는 시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사람이 왜 저러는 거지? 시계를 훔쳐 가려는 것인가?”


시씨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몽블렁거리를 혼자서 걸어 배에 올라탔다. 그녀는 선실에 들어가지 않고 난간을 잡고 서 있었다. 황후가 안전하게 타는 것을 확인한 선장은 천천히 배를 호수 한가운데로 몰고 나갔다. 배가 막 속력을 내려는 순간 시씨는 그 자리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황후마마, 왜 이러시옵니까, 무슨 일이옵니까?”


“가슴이 조금 아프군.”


깜짝 놀란 시녀들이 달려와 그녀를 반듯하게 눕혔다. 가슴 쪽에서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시녀들은 꽉 조인 코르셋을 풀고 옷을 헤쳐 보았다. 명치 부분에서 혈흔이 보였다. 피는 많지는 않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장은 뱃머리를 다시 돌렸다. 시녀들은 황후를 호텔로 옮겼다. 의사가 서둘러 달려와 그녀를 살펴보았다. 


“가슴을 너무 깊숙이 찔려 회생하시기 어려울 듯합니다. 이대로 두면 가슴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와 보기 흉하게 될 겁니다. 평온하고 깔끔하게 돌아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수밖에 없다.”


의사는 시씨의 팔꿈치 관절 안쪽 동맥을 절개했다. 피는 더 이상 심장 쪽에서 솟구쳐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얼마 뒤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시씨의 장례식은 그해 9월 17일 황후라는 직위에 맞게 화려하게 치러졌다. 그녀가 평소 “내가 죽으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하게 장례를 치러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녀의 삼중관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 ‘헝가리 여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시씨는 오스트리아 황족의 공동묘지인 카푸치너클로스터, 즉 카푸치너 성당에 묻혔다. 합스부르크 가문 전통에 따라 심장은 아우구스티너키어셔에, 내장은 성슈테판대성당 납골소에 모셔졌다. 


쇤브룬궁전에서 외로운 밤을 보낼 때 시씨는 많은 문학 서적을 읽으며 시를 공부했다. 그리고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시씨박물관에는 그녀가 남긴 시들이 걸려 있다. 그녀의 슬픈 심정을 담은 시입니다.


싱그러운 봄이 돌아온다네

나뭇가지에 신선한 초록이 매달리고

새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가르치면

꽃들은 아름답게 다시 피어난다네


그러나,

봄은 나에게 축복의 계절인가

아주 멀고 이상한 이 땅에서

나는 고향의 태양을 그리워하네 

이사르강의 제방을 그리워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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