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의 은총 페스트조일레

by leo


오스트리아는 항상 페스트 같은 역병 발생에 취약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무역 중심지, 부족한 상하수도 시설, 쓰레기였다.


빈은 먼저 도나우강 변에 위치한 덕분에 동서양 사이에서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동서양에서 물건을 실은 많은 배가 도나우강을 오가면서 빈에 들렀다. 무역상은 빈의 창고에 의류, 카페트, 곡류 등을 쌓아놓고 수개월씩 보관했다.


무역상은 이동할 때 배에 상품뿐 아니라 쥐도 싣고 다녔다. 물론 무역상이 ‘정중하게 부탁해서’ 쥐를 태운 것은 아니었고, 다른 지역에 살던 쥐가 몰래 올라탄 것이었다. 쥐는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 역병을 퍼뜨리고 다녔다. 특히 빈처럼 인구가 많아 매우 붐비고 먹을 것이 많은 도시에 내려 역병을 번지게 했다.


빈 시내 곳곳에는 늘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인구가 많아 쓰레기 발생량이 많았지만 쓰레기 수거 시스템이 없어 치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빈만큼 쥐가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은 없었다. 역병을 몰고 다니는 쥐는 쓰레기만큼이나 흔했다.


게다가 빈은 19세기까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여서 아주 복잡했고 사람들이 붐볐다. 옛 기록을 보면 빈에 상하수도 시설은 없었다. 빈 시민은 1553년까지 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끌어다 마셨고 곳곳에 폐수나 오수가 흘러 다녔다. 위생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4세기에 전 유럽을 휩쓴 첫 역병이 발생한 이후 빈은 여러 차례 역병에 시달려야 했다. 1670년 네덜란드에서 시작한 대역병 때문에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역병은 먼저 영국으로 번져 런던에서 10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6년 뒤에는 빈을 강타했다.


역병은 처음에는 빈 외곽의 레오폴트슈타트 지구를 감염시켰다. 시청은 역병을 가볍게 여겼고, 역병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숨겼다. 시청의 무사안일을 노린 역병은 이듬해 7월 마침내 빈 성벽을 넘어가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먹잇감을 찾았다. 그때 역병 탓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빈 인구의 3분의 1~절반 정도인 7만~12만 명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빈 시청은 숨진 환자를 수레에 실어 빈 외곽에 버렸다. 대형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버리고 불태웠는데 구덩이가 다 찰 때까지 버린 시체를 그대로 뒀다. 결국 이것 때문에 감염이 더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성직자였던 아브라함 안타 클라라는 1680년 <로쉬 빈>이라는 책에서 ‘탐욕스러운 역병은 빈의 거리 한 곳만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빈과 주변에서 한 달 동안 머물 때 내가 본 것이라고는 죽은 사람이 실려 나가고 끌려 나가고 묻히는 모습뿐이었다’라고 적었다.


당시 유명한 ‘길거리 음악가’이자 시인이었던 아우구스틴은 “오! 내 사랑하는 비엔나여! 모든 게 사라지는구나”라고 탄식했다. 역병은 아우구스틴의 전설까지 만들어 냈다. 그는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집으로 걸어가다 역병 희생자의 시체를 버려놓은 구덩이에 빠졌다. 밤새 구덩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지만 신기하게도 역병에 걸리지 않았고, 다음날 아침에 구조돼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술 덕분에 역병 희생자가 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후 그의 이야기를 담은 ‘오! 리버 아우구스틴’이라는 민요가 생겼다.


‘매일이 축제로구나/ 역병이 마을을 휩쓰니/ 엄청난 시체의 축제로다/ 그것이 휴식이로구나’


역병이 계속 번지자 오스트리아제국의 레오폴트 1세 황제는 성모 마리아의 은총을 빌어 사태를 진정시키겠다면서 페스트조일레를 세웠다. 말 그대로 직역하면 ‘페스트 기념비’이지만 의역하면 ‘페스트 퇴치 기원비’였다. 그는 페스트조일레 제막식에 참석해 성모 마리아에게 굳게 다짐했다.


“지금은 나무로 만든 기념비이지만 역병을 몰아내주시면 대리석으로 페스트조일레를 화려하게 새로 만들어 바치겠습니다.”


레오폴트 1세가 나무 페스트조일레를 바쳤지만 역병은 사라질 줄 몰랐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는 왕실 가족을 데리고 보헤미아 프라하의 프라하성으로 달아났다. 그가 도망치면서 한 것이라고는 딱 한 가지였다. 당시 빈에 살던 의사 폴 드 소르베를 황제 자문관 겸 역병 대처 총책임자로 임명한 것이었다. 황제로서는 별 생각 없이 소르베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역병에 대처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소르베는 역사상 처음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역병에 대처했다. 그는 수도회인 ‘성삼위일체형제단’의 도움을 받아 역병에 맞섰다. 그는 수도사들에게 수시로 강조했다.


“무엇보다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수도를 정화하고, 화장실도 청소해야 합니다. 거리도 청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역병 환자가 발생하면 절대 접근하거나 손대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 위생당국에 신고하십시오.”


소르베는 역병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도시의 위생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수도는 물론 화장실, 거리 등을 수시로 청소하면서 청결한 위생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또 역병 환자만 다루는 특수병원을 만들어 토약제, 사혈, 연고 등으로 환자를 치료했다. 역병에 걸려 죽은 사람은 시 외곽에 만든 거대한 구덩이에 넣어 바로 불태웠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낙후한 대처법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전적으로 소르베의 활약 덕분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병은 1680년대 초 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 덕분에 프라하로 달아났던 레오폴트 1세 황제도 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역병이 사라진 것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도움 덕분이었다면서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기로 다짐한 대리석 페스트조일레를 서둘러 만들기로 했다.


레오폴트 1세가 염두에 둔 페스트조일레는 ‘성 삼위일체 석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성 삼위일체 석주’는 맨 꼭대기에 성모 마리아나 성삼위일체 상징물을 세운 기둥이었다. 이런 방식은 원래 고대 로마의 전통이었다. 전쟁 같은 극적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신에게 감사를 드리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기독교가 ‘성 삼위일체 석주’를 처음 세운 것은 10세기 무렵 프랑스에서였다. 그러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물결이 거셀 때 일반화됐다.


레오폴트 1세는 조각가 요한 프루비르트에게 페스트조일레 디자인을 맡겼다. 프루비르트는 코린트 대리석에 성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조각과 구품천사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천사 조각 9개를 붙인 작품을 설계했다. 실제 작업은 마티아스 라우치밀러가 담당했다. 그가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죽자 토비아스 크라커와 요한 벤델, 그리고 다른 조각가 여러 명이 힘을 합쳐 1693년 기념비를 완성했다.


페스트조일레 기단의 조각은 질병에 맞선 신앙의 승리를 상징한다. 조각의 중간 부분에는 레오폴트 1세의 문장과 기도하는 황제의 모습을 담았다.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만든 천사와 다른 종교적 인물의 조각을 세웠다.


페스트조일레가 완성되자 매일 많은 사람이 페스트조일레가 설치된 그라벤 거리로 몰려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드리고, 페스트조일레를 만들어 준 황제에게 감사를 드렸다.


레오폴트 1세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늘 속으로 ‘국민을 버리고 혼자서 빈에서 달아난 황제’라는 찜찜한 기분을 갖고 있었는데 페스트조일레를 제작함으로써 그런 죄책감을 완전히 벗는 것은 물론 거꾸로 백성의 지지를 높이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일은 실제로 그가 원했던 대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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