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하우스 앞에서 오스트리아 빈의 명물인 트램 1번을 탄다. 트램은 링슈트라세를 따라 달린다. 호프부르크왕궁, 미술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빈시청, 부르크극장을 지나자 빈대학교가 나타난다.
빈대학교 앞은 지하철, 트램이 오가는 교통의 요지인 쇼텐토어광장이다. 대학교 인근답게 많은 대학생이 광장에서 지하철을 타러 가거나 트램을 기다린다. 트램 정류장에 있는 매장에는 점심용으로 빵을 사려는 학생이 줄을 섰다. 트램 정류장 앞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공원이다. 여러 학생이 공원 벤치에 앉아 쉬거나 잔디밭에서 다리를 뻗고 샌드위치 점심을 먹는다.
공원 뒤편에는 뾰족한 첨탑 두 개가 형제처럼 나란히 선 교회가 보인다. 빈을 잘 모르는 일부 관광객은 이 교회를 성슈테판대성당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곳은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후로 유명했던 엘리자베트, 즉 시씨의 남편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암살 미수와 관련한 이야기가 담긴 보티프키어셔, 즉 보티프교회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오스트리아 황제이면서 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 국왕이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무척이나 바빴다. 그는 호프부르크왕궁에서 국정을 돌보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오후 성벽 인근에서 산책하기를 즐겼다.
프란츠 요제프가 결혼하기 1년 전인 1853년 2월 18일이었다. 스물세 살이었던 프란츠 요제프는 여느 때처럼 그날도 막시밀리안 오도넬 백작과 함께 성벽 주변을 산책했다.
황제와 백작이 조용하고 차분한 대화에 빠져 있을 때 한 사내가 인근 나무에 몸을 숨겼다. 헝가리 민족주의자인 스물두 살의 리베니 야노쉬였다. 눈치를 살피던 그는 빠른 걸음으로 황제의 뒤쪽으로 뛰어갔다. 워낙 갑자기 나타난 데다 몸이 정말 날렵해 호위병들이 전혀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리베니는 바지에서 단검을 꺼내 황제의 목을 찔렀다.
“으악!”
프란츠 요제프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쓰러졌다. 깜짝 놀란 오도넬 백작은 호신용으로 든 지팡이에서 검을 꺼내 리베니에게 휘둘렀다. 군인 출신이었던 백작의 반격이 워낙 매서웠기 때문에 리베니는 황제를 다시 공격할 틈을 얻지 못했다.
무술에 능했던 오도넬 백작은 연거푸 검을 휘둘러 리베니의 팔을 찔렀다. 리베니가 손에서 단검을 떨어뜨리고 넘어지자 그를 덮쳐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겁에 질려 엉거주춤하던 의사 에텐라이히가 용기를 내 오도넬을 도왔다. 그사이 호위병들도 몰려가 리베니를 밧줄로 꽁꽁 묶었다. 리베니는 피를 흘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코슈트 라요수 만세!”
코슈트는 헝가리 법률가이자 언론인이며 정치인이었다. 그는 1848~1849년 혁명을 일으켜 헝가리공화국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혁명의 목표는 오스트리아제국으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무력 진압하는 바람에 헝가리의 혁명은 엄청난 인명피해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리베니가 황제에게 칼을 휘두른 것은 혁명 실패에 보복하기 위해서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목을 찔려 피를 많이 흘렸지만 제복의 옷깃 덕분에 단검 칼날이 급소를 비껴가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황제는 직무를 수행할 때는 황금 실로 수놓고 높은 옷깃이 달린 제복을 입었다. 결국 리베니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시의로부터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다.
리베니는 오스트리아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빈 외곽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프란츠 요제프는 암살을 시도한 리베니의 사연을 듣고는 그를 동정하게 됐다. 조국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황제는 아들을 잃고 상심한 리베니 어머니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매년 연금을 챙겨주라고 지시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암살 시도를 막아 목숨을 구해준 오도넬 백작의 작위를 높여주고 많은 사례 선물을 하사했다. 의사 에텐라이히에게는 귀족으로 신분을 상승시키고 ‘에텐라이히의 요제프’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암살 위기에서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졌다는 소식을 들은 동생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요제프 대공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해군 제독으로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왕자였다. 나중에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멕시코 국왕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요제프 대공은 하느님이 황제를 보호해주신 것에 감사하는 뜻에서 암살 시도가 있었던 장소에 교회를 지어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교회 건설비 모금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가 직접 돈을 내거나 황실이 자금을 지원해도 되지만, 국민이 낸 돈으로 교회를 건설하는 게 여러 측면에서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막시밀리안은 모금운동에 ‘보티프가베’라는 이름을 붙였다. 질병에서 회복하거나 위기에서 벗어난 기독교 신자가 성지 순례를 가서 바치는 헌금이나 공물을 뜻하는 말이었다. 모금운동은 오스트리아는 물론 합스부르크 왕실의 통치를 받는 모든 나라에서 진행됐다. 그 덕분에 이른 시일 안에 교회를 건설하기에 충분한 돈이 모였다. 빈에서만 30만 명이 헌금했다.
막시밀리안은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설계안 국제공모전을 열었다. 오스트리아제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 등에서 모두 75개 작품이 출품됐다. 처음에는 제국의 모든 백성을 위한 초대형 국립성당을 지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비용이 엄청나게 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건축 규모를 대폭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공모전 당선자는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던 하인리리 폰 페르스텔이었다. 그는 네오고딕 양식 성당을 짓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프랑스의 고딕성당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공사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결혼하고 2년 뒤인 1856년에 시작됐다. 기공식에는 황제 부부는 물론 빈의 교회를 총괄하는 라우셔 추기경과 대주교 80여 명이 참석했다. 황제는 직접 삽을 들고 흙을 퍼 날라 공사의 시작을 알렸다.
유럽에서는 정치적 상황, 자금 사정 때문에 성당을 수 세기에 걸쳐 짓는 게 일반적이었다. 공사를 담당하는 건축가도 여러 명이 대를 잇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보티프교회의 경우 아주 짧은 기간에 공사가 끝난 덕분에 단 한 명의 건축가, 즉 페르스텔이 착공부터 준공까지 모든 공정을 책임질 수 있었다.
보티프교회는 착공 26년 만인 1879년 4월 24일 완공됐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결혼 25주년인 은혼이 되던 해였다.
보티프 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높이 99m에 이르는 탑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높은 천장이 깊은 인상을 준다.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엄청난 아치형 창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내려 비치는 햇살이 눈을 부시게 만든다. 화려한 주제단도 눈길을 끈다. 석화석고 기둥 여섯 개가 달렸고 금박을 입힌 선단과 정교하게 색을 칠한 닫집도 있어 매우 화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