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성 보로메오처럼” 칼스키어셔

by leo


1.


“황제 폐하, 폴란드에 역병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1700년대 초 오스트리아 빈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에게 긴급한 보고가 올라갔다. 당시 합스부르크의 영토였던 폴란드에 역병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관리들이 잘 대처했지만 8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전히 조금씩 퍼진다는 게 보고의 내용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역병은 전쟁 때문에 발생했다. 스웨덴이 러시아 등과 ‘대북방전쟁’을 벌였는데 전쟁터는 바로 폴란드였다. 전쟁을 피해 고향을 등진 폴란드 피란민 수만 명이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전쟁이 일어나면 난민은 제대로 씻지 못해 위생이 나빠지는 데다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도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역병이 발생하기 딱 좋은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난민 중에서 역병 감염자가 대거 발생했고, 폴란드는 물론 보헤미아, 모라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 합스부르크 영토 상당부분에 역병이 퍼지게 됐다.


카를 6세는 역병 발생 소식을 듣고 고심했다. 자칫 그의 자리마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신하들에게 역병 저지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짐이 황위에 오른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아직 백성이 짐의 은혜를 느끼지도 못하는 상황이지. 이런 처지에 역병이 나라를 황폐화시킨다면 다들 내 탓이라고 할 게 아니겠나? 어떤 수를 써서라도 역병을 물리쳐야 해.”


카를 6세는 신하들에게 지시한 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에 의지하기로 했다. 그래서 모든 신하를 데리고 성슈테판대성당에 가서 미사를 올리면서 선언했다.


“역병이 더 이상 퍼지지 않고 여기서 끝나게 해주시면 성당을 지어 성 카를로 보로메오에게 헌정하겠습니다.”



2.


성 카를로 보로메오는 16세기 이탈리아 밀라노에 역병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봐 역병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한 사람이었다.


성 보로메오는 원래 밀라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는데,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먼 친척이었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종교에 귀의했다.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해서 당시 부패했던 다른 사제들과는 달랐다. 모든 수입은 자선단체에 기부했고 사치품은 근처에 가져오지도 못하게 했다. 심지어 명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신앙이었다.


마침 메디치 가문 출신인 비오 4세가 교황으로 취임하자 성 보로메오는 그의 도움을 받아 밀라노 주교로 서임됐다. 그가 밀라노에 머물렀던 1576년 흉작 때문에 기근이 발생하고 역병이 나돌았다. 많은 사람이 굶어서 또는 굶주림에 지친 탓에 병에 걸려 죽어나갔다. 총독과 귀족들은 국민은 나 몰라라 하면서 제 목숨만 건지려고 모두 밀라노에서 달아났다. 하지만 성 보로메오는 달아나지 않았다. 그의 귀에 빈자들을 돌보라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보로메오, 빈자들을 돌보도록 하라. 그것이 내가 너에게 내리는 소명이니라!”


성 보로메오는 밀라노 교구에 있는 모든 종교단체 지도자를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역병을 물리치기 위해 신의 은혜만 기다리지 말고 직접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기근과 역병을 무서워하지 않는 주교의 연설은 모든 사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성 보로메오는 총독과 귀족의 창고에 쌓였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에게 먹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성당 기금을 활용해 곡식을 외부에서 사들여 배고픈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해 도시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성 보로메오의 노력 덕분에 기근은 해소됐고 역병도 물러갔다. 소식을 들은 총독과 귀족들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벌게진 얼굴을 한 채 밀라노로 돌아왔다. 그는 그들을 질책하지 않고 어깨를 두들겼다.


“어서 오세요. 밀라노는 안전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3.


카를 6세의 약속 덕분인지 중부 유럽을 강타한 역병은 오스트리아에 큰 피해를 내지 않고 사라졌다. 그는 약속대로 새 성당을 짓기로 하고 먼저 성당 설계 공모전을 열었다. 요한 베르나르드 피셔 본 얼라흐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공사는 1716년에 시작됐고, 21년 뒤에 완공됐다. 이 성당은 흔히 칼스키어셔(카를 성당)라고 불리지만 정식 이름은 카를로보로메오성당이다.


폰 얼라흐는 고대 그리스 신전 양식의 포르티코에 설계의 초점을 맞췄다. 포르티코는 대형 건물 입구에 기둥을 세워 만든 현관 지붕을 뜻한다. 그는 여기에 덧붙여 고대 로마의 트라야누스 기둥을 모델로 해서 만든 두 개의 큰 기둥을 세워 성당을 받치게 했다. 두 개의 큰 기둥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솔로몬 사원’과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분위기를 풍기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카를 6세의 선황인 카를 5세 황제가 신성로마제국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삼은 신화 속의 인물이었다.


스키어셔 곳곳에는 성 보로메오의 모습이 담겼다. 먼저 성당 입구 기둥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로렌조 마티엘리가 새긴 부조를 붙였다. 성 보로메오의 일생을 담은 부조였다. 주 제단에는 성 보로메오의 승천을 나타내는 그림이 있다. 여러 조각 위로 천사가 원을 이루고 태양이 빛을 비춘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비슷한 그림을 연상케 한다.


성당의 돔 지붕은 이탈리아 로마 성베드로대성당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다. 돔 지붕 프레스코화는 잘츠부르크 출신의 화가 미카엘 로트마이어와 볼로냐의 화가 가테타노 판티가 맡았다. 성 보로메오가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빈에서 역병이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칼스플라츠 인근에 있는 칼스키어셔 바로 옆에는 원래 슈피탈러 고테사커, 즉 슈피탈러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무덤이 있던 곳이었다. 비발디는 1741년 7월 28일 빈에서 눈을 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무덤은 물론 공동묘지도 사라져 버렸다. 이곳에 그의 무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인 매년 성당 앞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비발디 추모 콘서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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