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을 둘러싼 성벽을 모두 허물고 해자를 모두 메우겠습니다. 도시를 더 팽창시키기 위해 성벽을 허문 자리에 새로운 도로를 만들고, 공공 건축물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185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빈을 새롭게 변신시킬 칙령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빈을 외부의 침략에서 보호해온 성벽을 없애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빈 성벽은 13세기에 오스트리아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를 인질로 붙잡았다가 풀어줄 때 받은 몸값으로 만든 구조물이었다. 성벽은 이후 600년 동안 빈을 굳건하게 지켜왔는데, 오스만투르크의 ‘빈 포위’ 때도 빈을 살린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18세기부터 빈 인구가 크게 늘어나 외곽 지역으로 주거지역이 팽창하는 상황에서 빈의 안팎을 가로막은 성벽은 도시 발전을 저해하는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성벽은 빈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성벽을 무너뜨리고 새로 낸 길도 빈을 한 바퀴 도는 링(원형) 같았다. 그래서 그 도로는 링슈트라세라고 불리게 됐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성벽을 무너뜨린 덕분에 링슈트라세 주변에 생긴 토지를 적극 활용했다. 일부는 민간에게 팔았고 일부는 공원으로 활용했고 나머지는 공공용도로 사용했다. 그는 부지 매각으로 돈 번을 이용해 각종 공공건축물을 건설했다.
황제의 지시를 받은 내무성은 각종 공연을 거행할 수 있는 오페라하우스를 짓기로 하고 설계안 공모전을 열었다. 당시 유럽 최고의 제국에서 실시하는 공모전이었던 만큼 유럽 각국의 유명 건축가들이 대부분 참가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우리도 한 번 참여해보도록 하지. 당선된다면 경력에 큰 힘이 될 거야.”
“좋아. 우리 둘의 능력을 합치면 당선되고도 남는 작품을 만들 수 있어.”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에두아르드 반 데르 뉠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건축가 아우구스트 시카르드 폰 시카르드스부르크와 함께 공모전에 참여했다. 한 살 차이인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일을 같이한 사이였다. 시카르드스부르크는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을 담당했고, 뉠은 미적이고 장식적인 분야를 맡았다. 빈에서는 호흡이 잘 맞는 건축가로 이름을 서서히 알리던 중이었다.
뉠과 시카르드스부르크의 작품은 심사위원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1등을 차지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은 인생에 날개를 달고 하늘로 훨훨 날아오를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의 즐거움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뉠과 시카르드스부르크의 설계안은 전문가들에게서는 큰 칭찬을 받았지만, 비전문가였던 언론은 물론 시민, 심지어 황제에게서는 정반대 소리를 들었다. 황제는 노골적으로 비난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어떻게 이런 설계안을 당선작으로 정했지? 두 건축가가 예술적 심미안을 가지기는 한 건가? 길 건너편에 있는 하인리히스호프는 안 보이나? 오페라하우스가 들어섰을 때 부끄러워서 어떻게 하려는 것이지?”
하인리히스호프는 오페라하우스가 들어설 예정인 부지 맞은편에 있던 개인 저택이었다. 정말 훌륭한 건축물이어서 빈을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하인리히스호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무너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오페른링호프라는 건물이 들어섰다.
신문도 연일 두 사람의 설계안을 물고 늘어졌다. 시작부터 절반의 실패라는 게 언론의 지적이었다. 게다가 링슈트라세가 여러 이유로 1m 높아지는 바람에 오페라하우스는 1m 아래로 가라앉게 됐다. 어떤 신문은 이 상황을 빗대 오페라하우스를 ‘가라앉은 보물상자’라고 조롱했다.
다른 신문은 한창 건설 중이던 오페라하우스를 ‘건축계의 쾨니히그라츠’라고 놀렸다. 쾨니히그라츠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영토였던 체코 프라하 동쪽에 있는 흐라데츠 크랄로브였는데, 독일식 지명이 쾨니히그라츠였다. 오페라하우스 공사가 진행되던 1866년 쾨니히그라츠에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의 분수령이었던 ‘쾨니히그라츠 전투’가 벌어졌다. 오스트리아는 이 전투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뉠은 너무 괴로웠다. 괜히 공모전에 뛰어드는 바람에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성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건축계에 발을 붙이기도 어렵게 됐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힘들어하던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말았다. 오페라하우스 공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던 1868년 4월 4일 집에서 목을 매 자살해 버렸다.
뉠이 자살했다는 소식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 전해졌다. 그는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소심한 사람이로군. 그런 일을 갖고 자살까지 하다니.”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황제는 뉠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후 모든 예술가의 작품을 평가할 때에는 절대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늘 칭찬만 했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군. 마음에 쏙 들어.”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시카르드스부르크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살아나기 힘든 불치병에 가까웠던 결핵이었다. 오페라하우스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터에 평생 같이 일한 동료가 자살했다는 소식은 그의 건강을 해치기에 충분했다. 그는 뉠이 자살하고 10주 뒤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두 사람이 모두 불행하게 죽자 오페라하우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쏙 들어갔다. 그 이후로는 아무도 오페라하우스 설계가 잘됐니, 못됐니 하면서 욕하지 않았다.
두 건축가가 사라졌어도 오페라하우스 공사는 계속 진행됐다. 물론 두 사람의 설계안대로였다. 오페라하우스는 1869년 5월 25일 완공됐고 개장 첫 공연도 그날 열렸다. 초연작은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였다. 개장 기념 공연에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시씨로 유명한 엘리자베트 황후가 참석했다.
뉠은 빈의 중앙묘지에 묻혔는데, 1875년 빈의 파보리텐 지구에 반-데르-뉠 거리가 생겼다. 빈 시청이 그의 업적을 기념해 거리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사후약방문 격이기는 했지만 뉠의 명예가 조금이나마 회복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