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 오페라하우스 리두트 룸. 검은색 턱시도에 검은색 구두, 하얀색 셔츠와 나비넥타이를 맨 젊은 남성 수백 명이 밝은 표정으로 나란히 줄을 섰다. 그 앞에서는 플로어에 끌리는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 수백 명이 환하게 웃는다. 청춘남녀 뒤편에는 많은 테이블이 놓였는데 역시 젊은 남녀가 정장과 드레스를 입은 채 앉거나 서서 플로어에 나간 젊은이들을 바라본다.
밤 9시 정각. 리두트 룸 한쪽에서 신나는 왈츠가 흘러나온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다.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19세기에 작곡해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노래다. 플로어에 선 청춘남녀는 노래에 맞춰 왈츠를 추기 시작한다. 절도 있게, 그러면서도 우아하게 박자에 맞춰 발을 놀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끝나자 모든 청춘남녀는 박수를 치며 뒤로 물러선다. 모두의 얼굴에 맑은 미소가 가득하다. 이어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 밝게 웃으며 큰소리로 외친다.
“이제 모두 왈츠를 즐길 시간입니다.”
오스트리아의 겨울은 무도회의 계절이다. 무도회 시즌은 매년 11월 11일에 시작해 이듬해 2월 말~3월 초까지 이어진다. 무도회 시즌 중 빈 곳곳에서는 400여 차례 무도회가 열린다. 오스트리아 전체로 확대하면 총 800여 차례에 이른다. 유럽의 어느 나라, 어느 도시도 오스트리아와 빈만큼 낭만적이고 축제 분위기가 넘치는 무도회를 많이 진행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무도회에 참가하려는 관광객이 몰린다.
오스트리아 무도회는 중세에 시작됐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역대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각종 음악 행사를 열었는데, 행사장을 꽃으로 장식하고 춤을 출 수 있게 했다. 이 행사가 귀족 사회로 펴져나가 무도회로 발전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무도회에는 귀족만 참가했다. 평민도 무도회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의 아들인 요제프 2세 황제가 호프부르크왕궁에서 개최되는 무도회를 평민에게 개방했다. 평민은 이후 다른 장소에서 귀족처럼 다양한 무도회를 개최했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무도회에서 왈츠를 출 수 없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난잡한 춤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왈츠가 무도회에 등장한 것은 1814~1815년 쇤브룬궁전에서 열린 ‘빈 회의’ 때부터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국제정치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는 밤에는 각종 무도회에 참석했는데, 이때 왈츠가 큰 인기를 얻어 무도회 메인 춤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후 요한 슈트라우스와 그의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수백 곡에 이르는 왈츠 명작을 연거푸 만들어내 왈츠는 무도회뿐 아니라 평소에도 춰야 할 춤으로 자리를 잡았다.
무도회는 대개 음악과 춤 그리고 식사로 구성된다. 모든 무도회의 수준이나 형식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모든 무도회의 규칙이 똑같은 것도 아니다. 대부분 무도회는 격식을 차리는 행사지만 그렇지 않은 무도회도 있다.
격식을 차린다는 말은 단순히 말끔한 정장을 입고 가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보다 더 엄격하다. 남성은 검은색 턱시도를 입고 하얀색 셔츠에 하얀색 나비넥타이를 매야 하며 검은색 구두를 신어야 한다. 여성은 바닥까지 내려가는 드레스를 입어야 하며 팔꿈치까지 올라가는 하얀색의 긴 장갑을 껴야 한다. 또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는 힐을 신어야 한다.
개막 세리머니에 참석하는 여성은 모두 하얀색 드레스를 입기 때문에 나머지 여성은 가능하면 다른 색 드레스를 입는다. 격식을 차리지 않으면 입장권을 갖고 있더라도 입장을 거부당할 수 있다.
무도회는 대개 밤 9~10시에 시작해 자정을 넘어 다음날 오전 5시까지 이어진다. 행사는 개막 세리머니로 시작된다. 개막 세리머니는 대개 무도회 첫 참가자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젊은 참가자가 진행한다. 첫 곡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작곡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다. 세리머니 진행자가 “알레스 발처(모두 왈츠를)!”라고 외치면 이때부터 다른 참가자들도 춤을 춘다.
자정에는 ‘굴라시 타임’이 있다. 굴라시는 원래 헝가리 수프인데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했을 때 오스트리아에 전해졌다. 하얀 장갑을 끼고 갈색 굴라시 국물을 떠먹는 게 어울려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무도회의 오랜 전통이다. 이때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플레더마우스 쿼드릴’이 연주되고 대개 전통적인 프랑스 춤을 춘다. 물론 모든 무도회에서 꼭 굴라시를 먹는 것은 아니다. 무도회 성격에 따라 다른 음식이 나오기도 한다.
남성은 춤을 추러 갈 때나 춤을 추고 나올 때 파트너 여성에게 선물을 주는 게 전통이다. 과거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카드를 주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요즘은 보석에서부터 과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선물을 준다.
무도회의 마지막은 대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이 장식한다.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는 오스트리아인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들이다. 이 곡이 나오면 무도회가 끝난 것을 감지하고 귀가할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오늘날 빈의 무도회는 대개 직업별 길드가 개최한다. 빈커피메이커협회는 호프부르크왕궁에서 ‘커피 메이커 무도회’, 즉 카페시더볼을 연다. 주최 측의 특징이 커피이다 보니 행사에서는 커피와 각종 빵, 과자가 제공된다.
오페라하우스에서는 오페른볼이 펼쳐진다. 이 행사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공식 무도회다. 12월 31일 밤에 시작해 새해 첫날 새벽에 끝나는 행사다. 오페른볼은 여러 무도회 중에서 가장 비싸다. 가장 싼 입장권이 300여 유로이며, 박스석 가격은 수만 유로까지 치솟는다.
가장 인기 있는 행사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주최하는 무도회다. 이 행사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매년 신년음악회를 개최하는 빈음악협회 홀에서 열린다.
사냥협회가 주최하는 재거볼은 가장 규모가 큰 행사다. 1월 첫 월요일에 열리는 이 무도회 참가자는 무려 5000명에 이른다. 재거볼은 격식을 따지지 않는 무도회여서 젊은이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무도회 복장을 입지 않는 대신 오스트리아 전통 복장을 입어야 한다. 이 무도회에서는 오스트리아 전통 음악이 많이 연주된다.
빈 시청인 라트하우스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큰 자선행사인 라이프볼이 펼쳐진다. 수익금은 대개 에이즈 지원 등 공익활동에 사용된다. 이 행사는 성소수자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학생들이 주최하는 가면무도회 루돌피나 리두테도 재미있는 행사다. 여성은 가면을 쓰지만 남성은 맨얼굴로 참석해야 한다. 여성은 신분을 밝히지 않고 남성에게 춤을 요청할 수 있다. 참석자는 대부분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다.
외국인 관광객도 무도회에 갈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쉽다. 무도회에 입장시켜 줄 현지인 ‘연줄’ 따위는 필요 없다. 입장권을 사기만 하면 된다. 돈만 내면 누구나 환영받을 수 있다.
문제는 무도회 인기가 높아 입장권이 금세 매진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는 점이다. 오페른볼 입장권은 대개 1년 전에 다 팔린다. 따라서 여행을 가서 “내일 가 볼까?” 한다고 해서 당장 무도회 입장권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짧게는 서너 달, 길게는 1년 전에 무도회 참가 계획을 짠 다음 입장권을 사고 필수 착용 의복을 준비한 뒤 무도회 일정에 맞춰 여행을 가야 한다.
표를 산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택시도 필요하다. 무도회는 대개 오전 5시까지 이어지는데, 지하철과 버스 운행은 자정에 끝나서 6시 무렵에 재개된다. 따라서 오전 5시에 무도회장으로 태우러 올 택시를 예약해야 한다.
무도회에 가서 쑥스러운 장면을 연출하지 않으려면 미리 왈츠를 배우는 게 바람직하다. 왈츠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여덟 스텝만 제대로 익히면 된다. 완전 ‘몸치’만 아니라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
물론 외국인 관광객이 영화에서나 봄직한 낯선 행사에 참석한다는 것은 꽤 모험적이고 두려운 일이지만 이색적인 중세 문화를 현대에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