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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03. 2024

장크트 길겐-모차르트 어머니 생가


버스는 할슈타트에서 북쪽으로 올라간다. 잘츠부르크에서 하룻밤을 묵기 전에 모차르트 가족의 내력이 얽힌 장크트길겐에 들러야 한다. 볼프강 호수(볼프강제) 주변에 있는 세 마을 중에서 가장 큰 곳이다. 크다고 해야 인구가 채 4천 명도 되지 않는 작은 동네라서 볼거리가 많은 것이 아니고, 할슈타트 호수에 붙은 할슈타트처럼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태어났고 그의 누나가 결혼생활을 했던 곳이니 만큼 들러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장크트 길겐이라는 지명은 7세기 그리스 출신의 성인인 성 아기디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성 아기디우스는 독일어권에서는 길그, 또는 길겐으로 불린다. 마을의 원래 이름은 ‘윗동네’라는 뜻인 오베르드룸이었다. 볼프강 호수의 윗부분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었다. 


버스는 장크트 길겐 버스전용주차장에 선다. 안개로 덮인 볼프강 제와 호수 앞을 지나는 이슐러슈트라세 거리가 나타난다. 할슈타트에서는 그쳤던 비가 여기에서는 계속 내려 귀찮기 그지없다. 


장크트 길겐에서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모차르트 가족의 내력이 담긴 모차르트하우스다. 이슐러슈트라세를 따라 걸으면 주차장에서 2~3분 거리다. 



모차르트하우스는 볼프강 호수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있다. 볼프강 호수의 옛날 이름은 아베르제였다. 볼프강이라는 지명은 모차르트의 이름이 ‘볼프강 아마데우스’라고 해서 붙여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10세기 성직자였던 성 볼프강이 피난 생활을 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슐러슈트라세 거리는 한산하고 조용하다. 비가 오고 안개가 덮여서인지 관광객도 드물다. 거리 끝에 옅은 미색 2층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초대형 저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건물도 아니다. 이곳이 바로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 발부르가 페트를이 태어나고, 누나 마리아 안나 이그나티아가 살았던 모차르트하우스다.


장크트 길겐은 원래 페트를의 아버지, 즉 모차르트의 외할아버지인 볼프강 니콜라우스 페트를의 고향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고향을 떠나 잘츠부르크에서 법을 공부해 빈과 잘츠부르크에서 대학교수, 법원 직원으로 일했다. 



니콜라우스 페트를은 병에 걸리는 바람에 고생하다 공기가 좋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휘텐슈타인 성에서 살았지만 나중에 모차르트하우스로 다시 이사했다. 그는 장크트 길겐에서 법원 직원으로 일했다. 모차르트의 어머니 페트를이 태어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그녀는 성탄절이던 1720년 12월 15일 모차르트하우스에서 출생했다. 


니콜라우스 페트를은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병을 치료하느라 이곳저곳에서 돈을 많이 빌리는 바람에 유산은커녕 적지 않은 빚만 남겼다. 어머니는 재산이라고는 한 푼도 없이 두 딸만 떠안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자선연금이라도 받으려고 잘츠부르크로 돌아갔다. 


난네를은 장크트 길겐이 어머니의 고향이라는 걸 잘 알았지만, 그녀가 나중에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그늘에 결국 가려지고 말았지만 난네를은 사실 동생 못지않은 음악의 신동이었다. 그녀는 여덟 살 때부터 합시코드를 배웠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기술은 완벽에 가까웠다. 모차르트가 롤 모델로 삼은 사람은 바로 누나였다. 꼭 이겨야 할 경쟁상대로 생각한 사람도 누나였다. 


안타깝게도 난네를은 음악가의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녀가 열여덟 살이던 1769년부터 레오폴트는 딸을 연주 여행에 데려가지 않았다. 오페라 가수를 제외하면 성인 여성은 음악가로 활동할 수 없는 게 당시 현실이었다. 


난네를이 음악가로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동생처럼 아버지를 버리고 집에서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아주 드물기는 했지만 당시에 그런 여성이 없지는 않았다. 17~18세기 프랑스 작곡가 엘리자벳 자 케 델라게, 모차르트에게 피아노를 배운 로즈 칸나비흐 등이었다. 



안타깝게도 난네를은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 아버지에게 매우 순종적이었다. 가출한다는 것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난네를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면서도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결혼을 포기했다. 대신 아버지가 골라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두 번이나 했고 아이를 다섯 명이나 둔 홀아비였다. 외할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은 요한 밥티스트 프라이허였다.


난네를이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어머니가 태어났던 모차르트하우스였다. 그녀는 연주회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집에서 하루에 세 시간 이상 피아노를 연습했고, 귀족 자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했다. 가끔 그녀의 실력을 잘 아는 귀족의 초청을 받아 저택에서 개인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난네를은 남편이 1801년 세상을 떠나자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아버지를 모시며 여생을 마쳤다. 누나와 달리 모차르트는 장크트 길겐에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난네를이 잘츠부르크로 돌아간 뒤 모차르트하우스가 모차르트 가족과 깊은 인연을 가졌다는 사실은 망각의 안개로 덮였다. 이런 놀라운 사실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거의 100년이 지난 1905년이었다. 당시 법원 판사였던 안톤 마치그가 법원 다락에서 낡은 서류를 발견했는데, 그 서류 기록에 모차르트하우스의 내역이 적혀 있었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조각가 야코브 그루버에게 페트를과 난네를의 두상을 담은 부조를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이듬해 8월 두 두상을 모차르트하우스에 세웠다. 두상 부조는 지금도 건물 중앙 벽에 붙어 있다.


모차르트하우스 소유권은 2005년 장크트길겐모차르트협회에 넘어갔다. 2008년부터는 모차르트 못지않게 뛰어난 음악가였던 난네를을 기리는 영구 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모차르트하우스는 또 장크트 길겐 모차르트 챔버오케스트라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건물에 있는 폴켄슈타인 홀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이 진행된다. 모차르트하우스 덕분에 장크트 길겐은 오스트리아 국내외적으로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됐다. 



모차르트하우스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장크트 길겐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각종 기념품가게는 물론 식당, 카페, 술집이 이어진다. 이곳의 건물 분위기는 할슈타트와는 매우 다르다. 목재도 많이 사용됐지만 기본적으로는 석재와 콘크리트 건물이다.


모차르트하우스 맞은편은 성아기디우스성당과 공원묘지다. 성당을 지나면 한가운데에 분수가 세워진 작은 광장이 나온다. 분수 앞에는 라트하우스, 즉 시청이라고 적힌 건물이 보인다. 건물이 워낙 작아서 정말 시청인지, 아니며 이전에 시청이었던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라트하우스 앞에는 흥미롭게도 난네를의 이름을 붙인 ‘카페 난네를’이 보인다. 벽에는 천사의 보살핌을 받는 난네를의 얼굴이 새겨졌다. 카페 쇼윈도에는 난네를의 이름을 붙인 ‘난네를 술’과 황후 엘리자베트(시씨)의 이름을 붙인 ‘시씨 술’이 전시돼 있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 들어가 커피나 술 한 잔을 마시려고 줄을 선다. 나도 안에 들어가 라떼 한 잔을 시킨다. 종업원은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불친절하지도 않다. 워낙 많은 사람이 오가기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인다. 


창밖으로는 비가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비가 내려 약간 쌀쌀한 가을 날씨에 따뜻한 커피 한 잔만큼 좋은 것은 없다. 잘츠부르크에서 다시 만난 모차르트와 난네를의 인생을 생각하며 달콤한 라테를 입안에 머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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