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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05. 2024

잘츠부르크(1) 모차르트, 모차르트


잘츠부르크에 도착하니 오후 6시 무렵이다. 이미 시내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상황이다. 서둘러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을 겸 야경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잘츠부르크 여행은 이번이 세 번째다. 2007년과 2014년에는 가족과 함께 온 적이 있었다.



과거 두 차례 여행 때 숙소는 잘츠부르크 구시가지에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골목길 사이에 있는 오래된 건물을 수리한 호텔이어서 산책하거나 식사하기 편했다. 이번 호텔은 미라벨 궁전 인근이다. 다소 외곽이어서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인근 거리는 한산하다. 


잘자크강의 다리를 건너 도착한 곳은 잘츠부르크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게트라이데가세다. 구시가지와 잘자크강 사이를 따라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이다. 고대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생긴 길이라고 하니 역사는 2천 년을 넘었다.


게트라이데가세는 1756년 1월 27일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이 골목 9번지 저택 3층이 그의 출생지이다.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 때까지 살았다. 이곳은 모차르트의 생가인 데다 그의 음악 인생이 시작된 곳이며, 유럽에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발판이 된 곳인 만큼 유럽 여러 나라에 있는 모차르트 관련 시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 아닐 수 없다. 



모차르트 생가 벽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고, ‘Gebursthaus(생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골목길을 오가는 관광객은 너나할 것 없이 이곳에 들어가 보거나, 대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모차르트 생가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그와 가족이 사용했던 가구, 악기, 식기 등이 전시돼 있다.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서 음악을 배우던 누나 난네를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악기 다루는 법을 배웠다. 레오폴트가 아들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한 것은 세 살 때라고 한다.


당시 귀족이나 부자 집안에서는 아들, 딸 할 것 없이 음악을 가르쳤다. 유명 음악가를 초청해 저녁마다 연주회를 열었다. 당시 잘츠부르크의 중심가였던 게트라이데가세 골목길에서는 하루 종일 음악 연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모차르트의 집에서는 궁정 악사였던 레오폴트와 난네를이 밤마다 음악을 연주했다.



모차르트는 태어난 직후부터 음악에 둘러싸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음악에 소질을 타고난 데다 어릴 때부터 매일 음악만 듣고 살았으니 천부적 재능이 일찍 폭발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과거 잘츠부르크에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모차르트 생일에 그의 생가를 방문하게 됐다. 생가 앞에 초대형 케이크가 놓였고 지역 주민들은 물론 관광객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주변이 너무 복잡해 케이크를 자르기 전에 서둘러 그곳을 떠나야 했다. 나중에 TV 뉴스를 통해 왜 그곳에 케이크가 설치됐는지를 알게 됐다. 미리 알았더라면 그곳에서 모차르트에게 생일 축하 노래 ‘해피 버스데이’를 불러주고, 케이크 한 조각이라도 맛을 보았을 텐데….


저녁인데도 게트라이데가세에는 사람이 붐볐다. 아쉬운 점은 오후 7시가 지나자 맥도널드 등 일부 식당을 제외하고 대부분 가게가 문을 닫았다는 사실이었다.



골목길에 접어들자 특이한 풍경이 먼저 눈길을 끈다. 건물 정면에 높이 붙은 특이한 연철 간판이다. 백조를 새긴 간판, 황금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장식한 간판, 순록이 하늘 높이 치솟는 간판 등등 모양과 색깔은 다양하다. 연철 간판은 과거 건물의 주인이 어떤 종류의 길드에 속했는지를 알려주는 상징물이다. 카페 모차르트와 맥도날드 뒤편 건물에는 열쇠가 붙은 간판이 달렸다. 직접 만든 자물쇠와 열쇠, 철제 광고판 등을 판매하는 가게를 알리는 표식이다.


지금 게트라이데가세는 쇼핑거리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상당수는 저택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잘츠부르크의 관광이 활성화되자 많은 저택이 상점으로 바뀐 것이다. 잘츠부르크 시청은 골목길의 옛 모습을 유지함으로써 정체성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상업화의 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게트라이데가세에서는 굳이 쇼핑하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골목길 한쪽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윈도쇼핑만 해도 된다. 천천히 다니면서 흥미로운 연철 간판을 카메라에 골고루 담아도 된다.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열심히 찍는 것만 해도 눈을 즐겁게 하는 축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게트라이데가세를 천천히 둘러보면 제법 볼 것이 많다.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아이들 선물로 살 초콜릿, 정확히 말하면 모차르트 초콜릿인 모차르트 쿠겔 ‘오리지널을 파는 ’퓌르스트‘였다. 본점은 알터 마르크트에 있지만 게트라이데가세 끝부분과 지그문트하프너가세 거리에 있는 상가 건물에 분점도 있다. 아쉽게도 밤이 깊어 세 곳 모두 문을 닫았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오는 수밖에 없다. 


모차르트의 얼굴을 담은 초콜릿 제품을 모차르트 쿠겔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나 독일에 가면 어디에서나 모차르트의 이름을 붙인 초콜릿을 볼 수 있다. 기념품 가게는 물론 제과점이나 초콜릿 전문점에도 있다. 달콤한 초콜릿 포장지에 새겨진 모차르트의 얼굴을 보고 지갑을 열지 않을 관광객은 하나도 없다. 


그중에서 오리지널은 잘츠부르크의 퓌르스트다. 모차르트 쿠겔의 역사는 1884년에 탄생한 카페 콘디토레이 퓌스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페의 창업자는 폴 퓌르스트였다. 



퓌르스트가 둥근 공 모양 초콜릿인 모차르트 쿠겔을 창안한 것은 가게 문을 열고 6년 뒤인 1890년이었다. 모차르트 탄생 100주년이 되던 1856년에 태어난 그가 새 초콜릿을 고안한 것은 1891년에 사망 100주년을 맞는 모차르트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0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무역박람회에 모차르트 쿠겔을 출품해 1등상인 금상을 받았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잘츠부르크시청으로부터 시민권을 얻었다.


카페 콘디토레이 퓌르스트’는 지금도 브로드가세 13번지에 본점을 두고 있다. 입구에는 폴 퓌르스트가 가게를 창업했다는 간판이 붙어 있다. 물론 미라벨플라츠와 게트라이데가세 등 여러 곳에 지점도 생겼다. 지금은 2015년에 가게를 물려받은 폴 퓌르스트의 고손자인 마르틴 퓌르스트가 초콜릿을 만든다.


카페 퓌르스트에서 만드는 모차르트 쿠겔은 해마다 300만 개 정도다. 하루에 1만 개이니 엄청난 생산량이 아닐 수 없다. 퓌르스트의 모차르트 쿠겔에는 인공 보존료를 넣지 않는다. 이 말은 아무리 길어도 6주밖에 보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면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초콜릿의 보존 기간은 대개 1년이다.



모차르트 쿠겔에 사용되는 종이 포장지는 푸른색과 은색이다. 이 포장지는 세월에 따라 여러 번 바뀌었지만 기본 색상은 그대로다. 초콜릿 제조 방법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모차르트 쿠겔이 큰 인기를 얻자 20세기 말 들어 다른 곳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모차르트 쿠겔이라는 이름을 단 제품을 내놓았다. 지금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모차르트 쿠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제품이 무려 13개나 생산된다. 가장 큰 회사는 빨간 색 상자가 인상적인 레버와 미라벨이다. 독일 회사인 레버의 연간 생산량은 1억 8천만 개다. 연간 30만 개를 생산하는 퓌르스트보다 60배나 많다. 미라벨도 해마다 퓌르스트의 20배 정도인 5천700만 개를 생산한다. 



게트라이데가세에는 모차르트의 이름을 붙인 ‘모차르트 카페’가 있다. 물론 모차르트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가게이지만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는 잘츠부르크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모차르트 카페는 놀랍게도 올해 개업 100주년을 맞은 곳이다. 이 카페는 1923년 10월 6일 게트라이데가세 22번지에 문을 열었다. 카페는 모차르트하우스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많은 예술가가 모여 커피를 즐겼다. 이곳에서는 음악 연주회, 토론회, 문학 낭송회 같은 행사가 자주 열렸다.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진다.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문화예술인 집결지라는 성격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너무 지쳐 이제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게트라이데가세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로 저녁을 때운 뒤 잘자크강의 시원한 바람을 온몸에 느끼며 천천히 숙소를 향해 걷는다. 다리를 건너 마카르트플라츠에 접어들면 모차르트 가족과 관련된 집이 하나 더 나타난다.



게트라이데가세에서 살던 모차르트 가족이 이사해 10년 이상 살았던 ‘모차르트하우스’가 바로 그곳이다. 모차르트 가족은 1773년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의 집을 떠나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 레오폴트가 잘츠부르크 궁정 악단에서 부지휘자로 일한 데다 모차르트도 1년 전 궁정 음악가로 채용돼 고정 수입이 크게 늘어난 덕분이었다.


모차르트 가족이 이사한 것은 게트라이데가세의 집은 4명이 살기에는 비좁았던 탓이었다. 난네를과 모차르트가 10대로 성장해 방을 따로 줘야 했다. 남매지간이더라도 다 큰 남녀가 한방에서 지낸다는 것은 서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모차르트 가족이 이사한 집은 당시에는 ‘무용 대가의 집’이라는 탄즈마이스터하우스로 불렸다. 집주인이 유명한 무용가여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모차르트가 탄즈마이스터하우스로 집을 옮긴 것은 그의 위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그는 잘츠부르크에서 인기 절정을 달렸다. 당대의 아이돌이었고 슈퍼스타였다. 많은 친구와 지지자를 확보했다. 잘츠부르크뿐 아니라 유럽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모차르트는 1781년 잘츠부르크를 떠날 때까지 탄즈마이스터하우스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유명한 작품도 많이 작곡했다. 후원자였던 지그문트 헤프너에게 헌정한 ‘헤프너 세레나데 KV250’과 여러 개의 심포니는 물론 피아노 협주곡도 다수 만들었다. ‘대관식 미사’를 작곡한 장소도 바로 여기였다.


아들이 떠난 뒤에도 레오폴트는 죽을 때까지 이 집에서 계속 살았다. 난네를은 결혼해 집을 떠났지만 나중에 돌아와 아버지를 모셨다. 



‘모차르트하우스’는 모차르트 기념사업을 진행하는 모차르테움 재단에서 관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보험사 건물이었는데 재단에서 사들여 건물을 부수고 옛날 모양대로 새로 저택을 지었다. 2년 뒤에는 새로 만든 저택에 박물관 문을 열었다. 일부는 콘서트 홀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은 1773~80년 모차르트가 살았을 때 사용했던 각종 악기와 여러 가지 서류 등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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