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잘츠부르크에서 출발해 빈 호텔에 가방을 맡겨놓고 달려간 곳은 빈 중앙공동묘지였다. 호텔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 미리 명소 한 곳을 둘러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공동묘지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뜻밖에 간단하다. 이곳은 공동묘지이면서 빈에서 가장 넓은 공원인 데다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같은 유명 음악가가 나란히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차르트의 기념비가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빈에는 무려 50여 곳에 이르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1863년에 세워진 중앙공동묘지가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로 알려진 곳이다. 면적은 70여만 평에 무덤은 무려 33만 개, 묻힌 시신은 300만 명을 넘는다. 무덤보다 묻힌 시신이 10배나 되는 것은 묻은 시신 위에 또 새 시신을 묻는 식으로 여러 번 묻었기 때문이다.
중앙공동묘지는 독일어로 ‘Wiener Zentralfriedhof’이다. ‘Zentral’은 ‘중앙’을 뜻하고 ‘fried’는 평화, ‘hof’는 ‘집’을 의미한다. 따라서 ‘Zentralfriedhof’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중앙 평화의 집’, 조금 바꾸면 ‘중앙 안식의 집’이 되는 셈이다.
중앙공동묘지에 들어가자마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단풍이 무성한 끝이 보이지 않는 가로수 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이 공동묘지라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나라 공동묘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덤만 보이지 않는다면 이곳은 공동묘지가 아니라 산책하기 좋은 공원쯤으로 여겨도 무방할 것 같았다.
가로수 길 양 옆으로 무덤이 조성됐다. 끝이 없는 가로수 길처럼 길을 따라 이어진 무덤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무덤 모양은 다양했다. 단순히 작은 비석만 하나 세워진 무덤에서 온갖 화려한 대리석으로 장식한 무덤까지 지위와 재산에 따라 무덤은 각양각색이었다.
가을 단풍으로 깊이 물든 가로수 길을 만끽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공동묘지 중앙을 향해 걸었다. 길이 얼마나 긴지 중앙에 있는 성 카를 보로마우스 교회까지 가는 데에만 10분이 걸릴 정도였다.
단풍에 푹 빠지는 바람에 여기에 왜 왔는지도 잊어버릴 즈음 교회가 눈앞에 등장했다. 교회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2번 정문 쪽으로 잠시 걸어가자 많은 사람이 옹기종기 모인 게 보였다.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자 다른 곳과 달리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된 무덤 여러 개가 나타났다. 반원형 공간 사이에 두 갈래 길을 내 하늘에서 보면 마치 오렌지 반쪽을 잘라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 행정적으로 보면 중앙공동묘지 ‘32 A-55’ 구역이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모차르트 기념비였다. 모차르트는 35세이던 1791년 빈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당시에는 없었던 중앙공동묘지가 아니라 시내 쪽에 조금 더 가까운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때만 해도 평민의 경우 개인무덤이 아니라 공동무덤을 쓰는 게 일반적이어서 모차르트도 공동무덤에 묻혔다. 나중에는 그 위에 다른 공동무덤이 또 만들어져 모차르트의 유해를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돼 버렸다.
빈 시청은 모차르트가 죽고 68년 뒤인 1859년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모차르트를 잊을 수 없었던 후배 음악인들은 기념비를 중앙공동묘지로 옮겼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베토벤 등 많은 음악인이 묻힌 곳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기념비가 옮겨진 것은 모차르트 사망 100주년이던 1891년이었다.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는 간단한 비석 하나만 설치했다.
모차르트 기념비는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나눌 수 있다. 상단에는 위대한 작곡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뮤즈의 조각상이 설치됐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뮤즈는 음악 같은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이니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를 추모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하단에는 대리석 비석 몸체에 모차르트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붙었다.
기념비를 조각한 사람은 19세기 빈의 조각가였던 한스 가서였다. 그는 여러 작품에서 모차르츠와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가서는 바이젠하우스키르헤의 대제단을 만들었는데, 모차르트는 12세 때 바이젠하우스키르헤 축성식 미사곡을 작곡해 직접 지휘했다.
모차르트 기념비 주변을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의 무덤이 둘러쌌다. 의도는 분명하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작곡가인 모차르트가 최고의 음악가라는 걸 내세우기 위해서다. 다들 베토벤을 ‘음악의 황제’라고, 모차르트를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러 베토벤을 한 수 높게 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셈이다.
독일 출신인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빈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장례식에는 후배 작곡가 슈베르트도 참석해 추모의 횃불을 들고 행진했다. 그는 처음에는 빈 북서쪽 베링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888년 중앙공동묘지로 이장됐다.
베토벤이 죽고 1년 뒤인 1828년 이제 겨우 서른한 살이던 슈베르트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처음에는 베링 공동묘지의 베토벤 무덤 근처에 매장됐지만 1888년 베토벤과 함께 중앙공동묘지로 이장됐다.
숙소로 체크인하러 가기 전에 쇤브룬궁전으로 향한다. 쇤브룬궁전 일대는 코로나19 이전과는 꽤 달라졌다. 가장 먼저 주차장이 넉넉하게 단정된 게 보인다. 주차장 한쪽 구석에는 기념품가게도 만들어졌다.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비우게 할 시설이라면 조그마한 공간도 놀리지 않고 설치하려는 속셈이다.
쇤르분궁전의 가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이전에 빈을 세 번 방문했을 때에는 여름과 겨울이었기 때문에 풍광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프라하나 체스키 크룸로프처럼 짙게 물든 단풍이 궁전을 뒤덮어 가을의 축제를 벌이는 것 같았다.
쇤브룬궁전이 자리를 잡은 곳은 빈 외곽인 히칭과 마이틀링 사이의 빈강 주변이다. 원래는 해발 60m의 언덕이었다. 이곳에서 궁전 역사가 시작된 것은 16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1569년 땅을 사들여 대형 오두막을 지은 게 계기였다. 오늘날 동물원이 있는 자리였다. 주변에는 담장을 세워 민간인의 출입을 막고 오리, 사슴, 곰 등을 풀어 사냥터를 꾸몄다. 황실 가족이 사냥 놀이를 즐기거나 여름휴가를 보낼 곳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당시에 빈 시내의 호프부르크 궁전은 습한 여름을 보내기에는 너무 더웠다.
전설에 따르면 17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마차슈는 1612년 이곳에서 사냥을 하다 작은 샘을 발견했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물의 수압이 얼마나 강한지 마치 화려한 분수처럼 솟아나는 분수였다. 마차슈는 그 장면에 매료돼 ‘정말 아름다운 샘(Schönbrunn)이로구나’라고 감탄했다. 쇤(Schön)은 ‘아름답다’, 브룬(brunn)은 ‘샘’이라는 독일어다.
마차슈가 ‘쇤부른’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이곳에 바로 쇤브룬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니었다. 40여 년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부인인 곤차가의 엘레노라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사냥터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궁전은 ‘곤차가성’으로 불렸다.
쇤부른궁전은 긴 역사를 갖고 있지만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것은 200여 년 전이었다. 18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740년 궁전을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녀는 낡은 궁전을 아주 안락한 여름 별궁으로 새로 고쳤다. 쇤브룬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원래는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궁전을 능가하는 규모로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궁전이라는 기록에 만족해야 했다.
48만 평의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쇤브룬궁전 일대는 지금은 공원이다. 이곳은 1년 내내 빈 시민은 물론 외국 관광객에게 무료로 개방된다. 다만 궁전 내부와 제국마차박물관, 황태자의 정원, 오랑제리정원, 미로, 동물원 등에 들어갈 때에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쇤브룬궁전에는 1441개의 방이 있다. 그중에서 관광객이 둘러볼 수 있는 방은 45개다. 아쉽게도 궁전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그냥 둘러보기만 해야 한다.
쇤부른궁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황후 엘리자베트, 즉 시씨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다. 독일 뮌헨에서 시집을 온 시씨가 신혼살림을 차린 곳이 바로 쇤브룬궁전이었다. 시씨가 시집살이를 했던 방은 궁전 2층에 있다. 그녀는 이곳에서 시어머니인 태후 소피의 눈총을 받으며 마음고생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쇤부른궁전 관람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기념품가게에 가면 눈에 띄는 상품 중 상당수는 시씨 관련 제품이다. 당시에는 큰 대우를 못 받았던 시씨는 지금 빈 관광을 먹여 살리는 중요한 소재가 된 셈이다.
모차르트는 여섯 살이던 1762년 10월 아버지, 누나 난네를과 함께 쇤브룬궁전에 들어가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 가족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가 연주회를 진행한 방은 2층에 있는 ‘거울의 방’, 즉 스피겔잘로 알려졌다. 방이 넓어 보이게 하려고 크리스탈 거울을 많이 설치했기 때문에 ‘거울의 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세기에는 시씨의 접견실로 사용됐다.
쇤브룬궁전 내부를 관람했다면 이번에는 50여만 평에 이르는 넓은 정원과 식물원, 동물원을 둘러봐야 한다. 우선 궁전 하단 정원을 지나 글로리에테로 올라간다. 이곳에서는 궁전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빈 시내 전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글로리에테로 올라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걸어서 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래 정원에서 마차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사람은 걸어서 올라간다. 걷는 도중 수시로 뒤를 돌아보면 궁전과 빈 전경이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글로리에테 앞에는 제법 큰 연못이 있다. 연못 앞에서 글로리에테가 나오도록 사진을 찍으면 나름대로 괜찮은 그림을 만들 수 있다. 거꾸로 글로리에테 앞에서 연못을 배경으로 궁전, 시내 사진을 찍어도 된다.
특이한 모양인 글로리에테는 사실 ‘전쟁기념비’다. 왕위계승전쟁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는 1765년에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글로리에테를 만들었다.
이 건물이 전쟁 기념비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관광객은 거의 없다. 건물 안에는 카페가 있어 더위나 추위에 지친 관광객이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을 즐기는 공간으로 이용된다. 글로리에테 옥상에 올라갈 수도 있다. 이곳에서 연못 그리고 궁전, 시내를 내려다보면 아래에서 보던 것보다 조금 더 웅장한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글로리에테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언덕에서 내려온다. 많은 관광객이 사진을 찍는 넵튠 분수 아래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름다운 정원으로 들어간다. 봄, 여름에는 푸른 잎으로 뒤덮이는 정원이지만 가을인 지금은 짙은 갈색 잎이 길을 덮었다. 아직 덜 익은 나뭇잎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따스한 가을 햇살과 시간이 익혀주기를 기다린다.
많은 사람이 쇤브룬궁전 정원의 숲 터널에서 느긋한 산책을 즐긴다. 혼자 온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유모차르를 미는 젊은 부부, 가벼운 핸드백을 멘 여러 여성, 연인 등등. 숲 터널을 장식한 나무 종류는 다양하다. 어린 아이가 있거나 시간에 여유가 많을 때에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라는 티어가르텐에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다.
1882년에 지었다는 팜하우스 앞에서 방향을 틀어 ‘별의 연못’이라는 ‘스텐바신’과 ‘장미의 정원’인 ‘로사리움’을 향해 돌아간다. 장미 정원은 그야 말로 갈색 나뭇잎의 향연이다. 길바닥은 온통 짙은 갈색 나뭇잎으로 두껍게 덮였다. 나뭇잎을 한 아름 안아 허공으로 뿌리면서 환하게 웃는 두 소녀의 미소는 가을이 아니라 아직 여름처럼 싱그럽다.
장미의 정원에서 다시 중앙 정원으로 나온다. 대부분 관광객은 잘 모르지만 중앙 정원을 포함해 쇤브룬궁전 곳곳에는 조각 작품이 많다. 워낙 정원이 넓어 조각이 몇 개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는 꽤 많다. 대부분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신이나 고대 로마의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 인물을 다룬 작품이다. 정원을 천천히 다니면서 조각이 무엇을 형상화했는지를 찾아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고대 로마의 초대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가족묘지 마우솔레움의 원형이었던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을 건설해 남편 마우솔루스를 묻은 카리아의 아르테미시아,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의 딸이며 시의 여신이었던 칼리오페, 고대 로마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운 브루투스가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에게 성폭행당하고 자살한 루크레티아를 안고 있는 조각, 아버지를 번쩍 들고 트로이를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 아르고호 원정대를 이끌고 황금 양털을 찾아 나선 그리스신화의 주인공 이아손, 그리스신화에서 꽃과 봄을 상징하는 여신 플로라가 물동이를 머리에 인 조각, 고대 로마의 포로 로마노에 있던 베스타 신전에서 ‘신성한 불’을 지켰던 여사제 베스탈, 트로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사과를 든 조각, 이탈리아에 쳐들어가 로마를 벌벌 떨게 만든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고대 이탈리아의 쿠마이에서 아폴로 신의 신탁을 전한 여사제 쿠마이의 시빌, 그리스신화에서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가 뱀이 감긴 지팡이를 든 모습, 가면이 달린 기둥에 기대어 선 천하무적 헤라클레스,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 손에 든 아테네의 영웅 페르세우스,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쳐들어왔을 때 ‘지연작전’을 펼쳐 승리의 기반을 마련한 고대 로마 정치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지하철역으로 나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둘러봐야 할 곳이 있다. 바로 모차르트가 앙숙 살리에리와 음악 맞대결을 벌였던 오랑제리다. 오란제리는 글로리에테를 둘러뽀고 나갈 때 쇤브룬 궁전 오른쪽의 숲속에 있는 건물이다.
오랑제리는 추운 겨울에 왕실이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 만든 온실 형태 건물이다. 이곳에서는 오렌지 외에 이국적인 열대 과일을 키웠기 때문에 오랑제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쇤브룬 궁전은 물론 영국 런던 켄싱턴 궁전, 프랑스 파리 외곽 베르사유 궁전, 오스트리아 빈 벨베데레 궁전 등에도 오랑제리가 있다.
오랑제리에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맞대결이 벌어진 것은 1786년 2월 7일 오후 3시였다. 맞대결 주최자는 당시 황제 요제프 2세였다. 그는 똑같은 주제로 오페라를 작곡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낸 주제는 ‘오페라 작곡과 오페라 회사 설립’이었다. 살리에리는 이탈리아 스타일로 ‘처음에는 음악, 나중에는 말’을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독일 오페라인 ‘임프레사리오(기획자)’를 작곡했다.
두 작곡가의 대결은 귀족 등 많은 손님을 초대한 가운데 파티 겸 저녁 식사 형식으로 진행됐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작곡한 두 오페라는 오랑제리의 양쪽 끝에서 차례대로 공연됐다. 가운데에는 초대 손님이 마치 심판처럼 배치됐다. 한쪽 오페라가 끝나면 의자를 돌려 반대쪽 오페라를 볼 수 있게 했다.
황제의 계획은 모차르트의 독일 오페라가 승리를 거두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살리에리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더 큰 박수가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현대 음악 전문가들은 모차르트의 작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뛰어나다고 평가하지만, 당시 행사장에 참석했던 귀족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익숙했던 데다 모차르트의 시대를 뛰어넘은 창의성을 이해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금도 해마다 여름에는 오랑제리에서 모차르트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가 열린다.
쇤브룬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을 상징하는 궁전이지만 거꾸로 그들의 몰락을 지켜본 곳이기도 하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1918년 11월 11일 카를 1세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그는 국민의 뜻에 밀려 강제로 국왕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퇴위 문서에 서명한 곳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욕의 세월을 담았던 쇤브룬궁전이었다. 그는 문서에 서명한 날 저녁에 가족을 데리고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다.
왕실이 떠난 쇤브룬궁전은 이후 여러 가지 용도로 이용됐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고아원으로 사용됐다. 고위 정치인이나 장군 등이 궁전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 궁전 극장은 창고로 전락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궁전 곳곳과 글로리에테에 대공포와 기관총이 설치됐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집중 폭격을 받아 궁전과 글로리에테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이 빈을 점령했을 때에는 영국군 사령부로 시용됐다. 그 덕분에 궁전의 그림, 조각 등을 약탈당하는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