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호텔에서 벨베데레궁전까지 걸어가는 코스로 일정을 시작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호텔에서 궁전까지는 도보로 15분 거리다. 트램을 타고 갈 수도 있지만 12분 걸린다고 한다. 도보나 트램이나 큰 차이가 없다. 그럴 바에야 걷는 게 낫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벨베데레궁전에 가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바로 18세기 말~19세기 초 ‘빈 분리파’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를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들이 잘 모르는 게 있다. 이곳에는 ‘키스’ 외에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등 거장의 작품도 수두룩하다는 사실이다.
또 프랑스혁명 때 처형당한 마리 앙투아네트와 혁명을 피해 달아난 유일한 생존자인 그녀의 딸 샬럿 이야기가 담긴 곳이라는 것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벨베데레궁전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리 앙투아네트와 샬럿의 유령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벨베데레궁전은 17~18세기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의 장군이었던 사보이의 오이겐 공작이 건설한 여름 별장이었다. 그는 오스만투르크, 프랑스, 스페인 등과의 여러 차례 전쟁에서 모두 이겨 오스트리아 제국이 유럽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그 덕분에 많은 급여와 포상금을 받았고,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까지 더해 재산을 엄청나게 늘릴 수 있었다.
벨베데레궁전은 상궁과 하궁 그리고 두 궁전 사이의 정원으로 나눠진다. 상궁은 각종 행사용으로, 하궁은 오이겐 공이 여름에 무더위를 피해 거주하는 별장으로 사용됐다. 그는 평소에는 빈 시내, 오늘날에는 슈테플백화점 뒤편인 힘멜포르트가세에 있는 슈타츠팔레에서 살다 무더위가 찾아오면 벨베데레로 갔다.
오이겐 공이 죽은 뒤 유산을 물려받은 사촌조카는 궁전을 오스트리아 왕실에 팔아버렸다. 궁전을 구입한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는 상궁을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바꿨다.
벨베데레궁전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에서 왕정이 폐지된 이후에는 국유화됐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오스트리아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의 미술 작품을 사들였다. 클림트의 ‘키스’는 1908년 상궁에 자리를 잡았다.
1층 벽에 설치된 ‘키스’는 오스트리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스타프가 예술 인생의 황금기였던 20세기 초에 그렸는데, 두 연인이 입을 맞추는 ‘키스’는 여러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두 연인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이 엿보이기도 하고, 진한 에로티시즘을 느낄 수도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관람할 당시의 기분에 따라 작품에서 받는 감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키스’에 등장하는 남녀는 클림트와 그의 연인 에밀리 플뢰게라고 알려졌다. 물론 화가가 사실 여부를 확인한 적이 없으니 정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클림트는 에밀리를 매우 사랑했고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러면서도 많은 여인과 바람을 피웠다. 에밀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문제로 삼지 않았다.
‘키스’ 앞에는 늘 관광객이 붐빈다.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시간을 잘 못 맞추면 줄이 길 수 있지만 때로는 서너 명만 대기할 때도 있다. ‘키스’를 배경으로 구도, 각도를 잘 맞추면 정말 그림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작품이 주인공인지, 내가 주인공인지 헷갈릴 정도다.
‘키스’ 앞에서 사진만 찍고 휙 돌아서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작품을 감상해야 할 순서가 남았다. 그림은 가로 180cm, 세로 180cm로 꽤 크기 때문에 어지간히 뒤에서 봐도 충분히 제대로 볼 수 있다. 벽에 붙은 관능적인 그림, 그리고 그 앞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셀카를 찍는 연인. 두 장면이 하나로 합쳐진 모습은 꽤 이색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클림트의 그림은 ‘키스’뿐만이 아니다. ‘유딧 1’, ‘프리차 리들러’, ‘아담과 이브’, ‘궁전으로 가는 길’, ‘죽음을 앞둔 노인’, ‘아말리에 주커칸들’, ‘신부’ 등 무려 20여 점에 이른다.
‘키스’를 봤다면 이제는 천천히 미술관 다른 공간을 둘러볼 차례다. 꽤 넓은 데다 작품도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 다 보려면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 에곤 실레의 ‘웅크린 부부’와 ‘죽음과 소녀’ 등 20점,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 평원’과 ‘병 다섯 개’, 클로드 모네의 ‘요리사’와 ‘지베르니 정원의 길’, 르누아르의 ‘목욕 후’ 등 4점, 뭉크의 ‘해변의 두 남자’ 등 3점, 에밀 놀데의 ‘꿈을 말하는 요제프’ 등이다.
여러 대가의 화려한 작품을 관람하면서 호강하느라 온갖 색감으로 물든 눈이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걸 느끼며 상궁에서 나온다. 하루 종일 머무르고 싶지만 일행과 다음 일정을 생각하면 나 혼자 고집을 피울 수는 없다.
상궁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의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 즉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가 담겼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내딸을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시키기로 약속한 뒤 파리로 보내기 며칠 전 환송 파티를 열기로 했다. 그녀가 정한 파티 장소는 바로 벨베데레궁전 상궁이었다. 당시 파티 참석자가 1만 3천여 명이었다니 이곳 말고는 이렇게 큰 행사를 손쉽게 치를 공간을 찾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대혁명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녀뿐 아니라 남편 루이 16세와 가족도 대부분 참변을 당했다. 그녀의 딸 중 딱 한 명만 목숨을 건져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다. 큰딸 마리 테레사 샬럿이었다. 다른 가족은 모두 처형당하고 혼자 갇혀 있었는데, 오스트리아가 샬럿과 프랑스군 포로를 교환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죽을 고비를 넘긴 샬럿을 구해온 오스트리아 정부가 정해준 처소는 다름 아니라 벨베데레궁전 하궁이었다.
벨베데레궁전에서 살았던 마지막 중요 인물은 아들을 두지 못한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후계자로 지정했던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 그는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는 바람에 제1차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상궁에서 나오면 정원이 나타난다. 프랑스 파리 외곽 베르사유궁전의 정원 조성 작업에도 참가했다는 조경 전문가가 손댔다는데 결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우아하지도, 아름답지도, 풍요롭지도 않은 정원은 조금 나쁘게 말해서 황량하게 보인다. 봄에 온 적도 있었고, 여름에 온 적도 있었고, 이번에는 가을인데 정원은 전혀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벨베데레궁전 하궁은 상궁에 비해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 오이겐 공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 이야기가 있는 데다 그들이 살던 모습 그대로 단장돼 있지만 관광객에게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궁에서 나름대로 인기 있는 공간은 상궁 쪽으로 만들어진 조개 모양 분수다. 하궁 쪽에서 분수를 배경으로 상궁을 향해, 거꾸로 상궁 쪽에서 분수를 배경으로 하궁을 향해 사진을 찍으면 꽤 아름다운 그림이 나온다.
벨베데레궁전 하궁 오른쪽에는 조그마한 출구가 있다. 이곳으로 들어올 수는 없고 나갈 수만 있다. 출구로 나가 빈에서 가장 큰 시민 공원인 슈타트파크로 간다. 이곳에서 직접 가는 트램은 없고, 도중에 내려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여기서 공원까지 그냥 걸어가도 경로에 따라 10~15분 정도 걸린다. 괜히 트램 비용만 낭비하는 셈이니 여기까지도 그냥 걸어가는 게 낫다.
조금이라도 덜 걸으려면 하궁 출구 오른쪽의 살레시아너가세를 따라가면 된다. 골목길 끝에 슈타트파크 모퉁이가 나타난다. 지하철 4호선 슈타트파크역도 보인다. 나중에 빈 시내로 가려면 이곳에서 지하철을 타거나, 큰길에서 트램을 타면 된다.
슈타트파크는 ‘시립공원’이라는 뜻이다. 정확한 이름은 빈 슈타트파크다. 공원이 생긴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1848년 서유럽을 강타한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이 빈에도 밀어닥쳤다. 그 결과 페르디난트 5세 황제는 하야하고 프란츠 요제프가 즉위했다. 새 황제는 빈 성벽의 효용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거 2차례나 오스만투르크의 빈 포위 공격을 막아준 고마운 성벽이지만 내부의 반란에는 무용지물이라는 게 입증됐다. 게다가 성벽은 급격히 발전하는 빈의 변화를 저해하기만 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1857년 12월 20일 “도시 성벽과 요새를 철거하고 해자는 메운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성벽, 요새, 해자를 없애고 대규모 도로와 각종 공공 건물과 개인 저택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새로 만든 도로는 빈 구시가지를 에워싼 링슈트라세였다. 이때 빈 시청이 링슈트라세에 건물만 짓지 말고 공원도 여러 곳 꾸미자고 요구했다.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링슈트라세 주변에는 슈타트파크, 부르크가르텐, 볼크스가르텐, 라트하우스파크, 지그문트프로이트파크 같은 공원이 많이 생겼다.
여러 공원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곳은 2만여 평에 이르는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슈타트파크다. 현지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하철로 한 구간인 데다 트램을 타더라도 10분이면 오갈 수 있어 일상생활이나 여행에 지친 사람이 모여 따스한 햇살과 빈에서는 이례적인 맑은 공기를 즐긴다.
슈타트파크역 쪽에서 들어가면 먼저 쿠어살롱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놀랍게도 과거에는 온천 시설이었다고 한다.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성벽 바깥쪽의 제방에서 온천수가 나왔는데, 이 물을 마시면 속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많은 사람이 몰렸다. 성벽이 무너지고 공원이 생기자 빈 시청이 1865~67년 이 건물을 지은 것이었다. 쿠어살롱은 요한 슈트라우스 전성시대에는 많은 귀족이 참가하는 인기 댄스홀 및 콘서트홀로 사용됐다. 지금도 각종 무도회, 콘서트는 물론 집회가 열리는 장소로 사용된다. 평소에는 카페-레스토랑으로 운영된다.
쿠어살롱에서 북서쪽에는 요한 스트라우스 2세 동상이 서 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동상은 우아한 자세로 조각돼 있어 많은 사람이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로 인기가 높다. 이곳에는 요한 스트라우스 외에 다른 예술가의 동상도 여럿 있다. 널리 잘 알려진 프란츠 슈베르트는 물론 20세기 조각가 에드문트 헬머, 헝가리 출신 작곡가 레이하르 페랭, 오스트리아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 등이다.
슈타트파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공원 곳곳에 펼쳐진 파란 잔디밭은 온통 잔디 위에 드러눕거나 돗자리 위에 앉은 사람 천지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고, 그냥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도시락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친구, 지인과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웃는 사람도 보인다.
잔디밭을 둘러싼 벤치에도 빈자리가 없다. 따뜻한 가을햇살을 즐기는 노부부, 키스할 기회를 엿보는 젊은 연인,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노트북을 펼친 직장인, 배낭을 옆에 내려놓고 땀을 닦고는 물로 목을 축이는 자유여행객. 다들 차림새가 다르고 벤치에서 열중하는 일도 다르지만 여유를 즐긴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표정이다.
공원 안쪽의 연못에는 물오리가 떼를 지어 헤엄을 친다. 두 어린이는 도시에서 보기 힘든 물오리가 신기한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이나 오리를 쳐다본다. 그 옆의 나무 아래 그늘에는 두 여성이 옷을 깔고 드러누워 나른한 오후의 휴식을 즐긴다.
연못을 지나가자 다시 잔디밭이 나온다. 이곳 주변에는 나무가 특히 많아 잔디밭에도 그늘이 많이 생겼다. 잔디밭 한가운데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젊은 여성 20여 명이 잔디밭에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일부는 히잡을 쓴 걸로 봐서는 이슬람계 여성으로 보인다.
잔디밭 한쪽 구석 수로 앞에 앉아 잠시 휴식한다. 아침 일찍 나와 벨베데레 궁전을 둘러보고 슈타트파크 공원까지 산책하느라 다들 많이 지친 상태다. 공원 바깥의 자전거도로에서는 안전헬멧을 쓴 할아버지와 손자가 나란히 자전거를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