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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11. 2024

빈 둘째 날(2) 링슈트라세와 구시가지


슈타트파크 맞은편에서 트램 2번에 오른다. 여기서부터 오페라하우스까지는 트램을 타고 가기로 했다. 여행 초기이거나 체력이 많이 남았다면 걸어가도 무방한 거리지만 이제 여행 후반부로 접어들어 힘들어하는 만큼 트램이나 버스를 많이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곳에서 오페라하우스까지는 트램으로 8분 거리다.



트램이 달리는 도로는 꽤 넓은 데다 정비도 잘돼 상당히 좋아 보인다. 도로 이름은 링슈트라세다. 링은 ‘원형’이나 ‘반지’를, ‘슈트라세’는 거리를 뜻하는 단어다. 따라서 링슈트라세는 원형 도로라는 뜻이다. 이 도로가 빈 구시가지를 반지처럼 둥글게 에워싸고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링슈트라세 자리는 원래 빈 성벽과 해자 그리고 경사지가 있던 곳이었다.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빈 발전을 앞당기기 위해 성벽을 허물고 해자를 메워 만든 도로가 링슈트라세였다. 


링슈트라세는 모두 9개 구간으로 이뤄졌는데 각 구간의 이름은 제각각 다르다. 스투벤링, 파크링, 슈베르트링, 케른트너링, 오페른링, 버그링, 카를레너링, 유니버시타츠링, 쇼턴링이다. 9개 구간과 별도로 도나우강을 따라 흐르는 도로는 프란츠요제프카이로 불린다.



링슈트라세 9개 구간과 프란츠요제프카이에는 다양한 번호의 트램이 달린다. 링슈트라세를 온전히 즐기려면 1번과 2번 트램을 잘 이용하면 된다. 


먼저 오페라극장 앞에서 1번 트램을 타고 호프부르크왕궁~부르크극장~빈대학교~쇼텐링지하철역을 거쳐 율리우스라브플라츠역에서 내린다. 길을 건너가 2번 트램으로 갈아탄다. 빈응용미술대~슈타트파크를 거쳐 1번 트램을 탔던 오페라하우스에서 내리면 링슈트라세를 완전히 한 바퀴 도는 셈이 된다. 오페라하우스 인근에는 훌륭한 건물이 많아 꽤 웅장하고 멋있고, 도나우 쪽은 강변 풍경이 이어져 눈과 가슴이 시원해진다.


만약 1번 트램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 타고 가면 도나우운하를 건너 아주 독특한 건축물인 훈데르트바서 주택이 나온다. 이 일대는 빈 서민이 사는 주택지여서 아주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 있다. 끝까지 타고 가면 프라터 공원이 종점이다.



당초 예정한 대로 오페라하우스에서 내린다. 일단은 오페라하우스에서 시작해 케른트너거리~그라벤거리~콜마르크트거리~호프부르크궁전~왕궁정원을 거쳐 다시 오페라하우스로 돌아올 계획이다. 이렇게 하면 빈 구시가지의 어지간한 관광명소는 다 둘러보게 된다.


보행자구역인 케른트너거리~그라벤거리~콜마르크트거리는 영어 ‘U’를 뒤집은 ‘∩’ 모양이다. 그래서 세 거리를 ‘황금의 U’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세 거리는 모두 고대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하니 2천 년 이상 역사를 가진 셈이다. 


고대 로마 시대 빈은 빈도보나라고 불린 군사기지였다. 빈도보나가 설치된 지역은 오늘날 그라벤거리 북쪽과 도나우운하 사이였다. 빈도보나 남쪽은 그라벤거리, 서쪽은 암 호프 앞의 티퍼그라벤거리, 북쪽은 강변의 성모 마리아 성당 앞의 잘츠그리스거리, 동쪽은 성슈테판대성당 앞의 로텐툼슈트라게거리였다.



그라벤거리는 당시에는 길이 아니라 도랑이었다. 그라벤이라는 이름 자체가 도랑이라는 뜻이다. 12세기에 레오폴트 5세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의 몸값으로 받은 돈으로 빈 성벽을 쌓을 때 도랑을 메워 도로로 만든 것이다. 케른트너거리와 콜마르크트거리는 로마군이 이동하거나 물건을 나르던 군사도로였다.


케른트너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 시대 상부 판노니아에 있던 카르눈툼이라는 로마군 군사기지로 연결되는 도로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카르눈툼은 오늘날 오스트리아 서쪽 브룩 안 더 레이타 지역이다.


케른트너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1876년에 생겨 100년 이상 역사를 자랑하는 자허 호텔이다. 원래 호텔 자리에는 모차르트, 쇼팽, 베토벤 같은 유명 음악가가 연주했던 케른트너토르 극장이 있었다.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1787년 ‘피아노협주곡 25번’을 초연했다. 베토벤은 그의 3대 교향악 중 하나로 손꼽히는 ‘9번 합창 교향곡’을 여기에서 연주했다.



극장이 없어지고 호텔로 바뀐 것은 인근에 오페라하우스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규모와 위용을 자랑하는 대극장이 생겼는데 케른트너토르 같은 중간 규모 극장은 경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극장을 부수고 아파트를 지었다가 나중에 다시 아파트를 호텔로 바꿨다.


자허 호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자허토르테로 불리는 초콜릿케이크다. 자허 호텔을 창설한 에두아르드 자허의 아버지 프란츠 자허가 메테르니히 총리 집에서 셰프로 일할 때 개발한 케이크로 알려졌다. 원조 자허토르테를 맛보려면 자허 호텔 1층의 자허 카페에 가야 한다. 카페 앞에는 늘 긴 줄이 늘어 서 있어 빈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자허 호텔은 옛 케른트너토르 극장 자리에 세워졌고 인근에 오페라하우스가 있다는 점에서 착안해 각 스위트룸에 유명한 오페라나 작곡가 이름을 붙였다. 라 트라비아타, 카르멘, 이도메네오, 마술피리, 나비부인, 나부초, 리골레토는 물론 레오나르드 번스타인 등이다.



호텔 로비 등에는 과거 숙박객 중 유명한 사람의 사진을 걸어두었는데 가장 중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걸렸다. 또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부부, 모나코의 레이니어 국왕과 그레이스 켈리 부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같은 사람들이다. 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번스타인, 플라치도 도밍고, 호세 카라라스 같은 음악인 사진도 보인다. 


물론 우리처럼 평범한 관광객은 이곳에 묵는 게 쉽지 않다. 방값이 너무 비싸다. 성수기에는 하룻밤에 200만~300만 원이라고 하니 10만~20만 원짜리 방도 고르고 또 골라야 하는 처지에서는 언감생심이다.


자허 카페 앞의 긴 줄을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걷다 보니 케른트너거리와 그라벤거리가 만나는 슈테판스플라츠 광장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빈에 이민을 온 이란 사람들이 모여 구호를 외친다. 이란에서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끌려갔다가 목숨을 잃은 아미니를 추모하고 이란에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하는 시위다. 놀랍게도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시위에 참가했다. 이란 사람 외에 외국인도 더러 보인다.



바로 인근의 성슈테판대성당 앞에서도 시위가 진행 중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흩어진 소수민족인 하자라 사람들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권력을 재장악한 이후 하자라족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국제사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시위다. 


도랑이었던 그라벤이 거리로 바뀐 이후 이 일대는 각종 행사가 벌어지는 곳으로 인기가 높았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빈의 중심지여서 행사를 벌이기에 좋았다. 이곳에서는 각종 축제가 펼쳐졌고, 여러 시장이 열렸다. 기독교 축일에는 다양한 행진이 진행됐고, 전쟁에서 이긴 군대가 돌아오는 개선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각종 문화예술 공연과 퍼포먼스는 물론 시위도 수시로 벌어진다. 


그라벤거리는 코로나19 이전보다 많이 복잡해졌다. 여러 카페가 차려놓은 테이블과 의자가 거리를 점령했다. 이전에는 거리 입구에서 두 분수와 페스트조일레가 시원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테이블과 의자, 커피를 마시는 사람만 보인다. 좁아진 거리로 걷는 사람이 많아 길은 더 복잡해 보인다. 카페 입장에서는 좋을지 몰라도 고급스럽고 시원한 그라벤거리의 옛 정취는 사라져버렸다. 내년 1~2월에 다시 빈에 갈 예정인데 거리 풍미가 되살아났는지 확인해야겠다.



페스트조일레는 그라벤거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다. 1679년 발생해 7만여 명을 집어삼키는 등 빈을 오랫동안 괴롭힌 대역병과 1683년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오스만투르크의 빈 포위가  1683년에 모두 끝나자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드리는 뜻에서 세운 ‘삼위일체 기념비’다. 물론 성모 마리아가 역병과 오스만투르크 군대를 물리쳐준 것은 아니었다. 역병을 해결한 것은 시간이었고, 오스만투르크를 몰아낸 것은 폴란드 지원군이었다.


빈 시민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교묘한 여론 조작이 숨어 있다. 당시 황제는 레오폴트 1세였는데 그는 역병이 심해졌을 때는 프라하로, 오스만투르크가 쳐들어왔을 때에는 파사우로 달아나버렸다. 역병과 이슬람군이 사라진 뒤 돌아온 그는 싸늘한 민심을 느껴야 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그가 추진한 게 바로 페스트조일레였다. 


코린트 대리석으로 만든 페스트조일레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만든 천사와 다른 종교적 인물의 조각이 설치됐다. 바로 아래 부분에는 성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조각과 구품천사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천사 조각 9개가 만들어졌다. 중간부분에는 레오폴트 1세의 문장과 기도하는 황제의 모습이 담겼다. 탑의 기단 조각은 질병에 대한 신앙의 승리를 상징한다. 



페스트조일레가 완성되자 많은 사람이 그라벤거리로 몰려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드리고, 페스트조일레를 만들어 준 황제에게 감사를 드렸다. 레오폴트 1세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늘 속으로 ‘백성을 버리고 혼자서 빈에서 달아난 황제’라는 찜찜한 기분을 갖고 있었는데, 페스트조일레를 제작함으로써 그런 죄책감을 완전히 벗는 것은 물론 거꾸로 백성의 지지를 높이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일은 실제로 그가 원했던 대로 흘러갔다.


그라벤거리 양쪽 끝부분에는 분수 두 개가 설치됐다. 성슈테판대성당 쪽의 분수는 레오폴트브루넨이고, 반대쪽 분수는 요제프브루넨이다. 이곳에 분수를 설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가는 사람의 식수로 쓰기 위해서였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흥미롭게도 두 분수는 소방용이었다. 당시 빈의 건축물 중에 나무로 만든 게 많아 불이 자주 났다. 그래서 불이 날 경우 서둘러 끄기 위해 그라벤거리에 분수 두 개를 만든 것이었다.


페스트조일레와 요제프브루넨 사이의 좁은 골목에 조그마한 교회 하나가 보인다. 독일어로는 페터스키어셔, 우리말로는 성베드로교회다. 파란 지붕이 인상적이어서 그라벤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늘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규모는 크지 않고 그다지 웅장하거나 아름답지도 않지만 이 교회는 빈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다. 바로 빈에서 최초로 생긴 교회다. 중세만 해도 교회 주변은 악마와 유령 전설이 흐르는 공동묘지였지만 지금은 주택가, 상점가로 바뀌었다.



페터스키어셔 자리에는 원래 고대 로마 시대 빈도보나의 군인용 막사가 있었다. 로마가 망하고 로마군이 철수한 뒤 4세기 무렵에 막사는 바실리카 형태의 1층 교회로 개조됐다. 전설에는 8세기에 프랑스의 샤를마뉴(샤를 대제)가 이 교회를 지었다고 전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희박하다. 옛 교회는 무너져 사라졌고, 현재 건물은 18세기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라벤거리는 서쪽 끝에서 호프부르크왕궁으로 이어지는 콜마르크트거리와 암 호프로 가는 보그너가세로 갈라진다. 지금 콜마르크트거리는 빈 최고 고급 쇼핑거리다. 이곳에는 명품 상점이 늘어섰다. 이곳이 명품거리로 거듭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고대 로마 시대는 물론 암 호프에 왕궁이 있던 시절에 콜마르크트거리는 단순히 도시 외곽으로 이어지는 ‘길’에 불과했다. 호프부르크왕궁이 생기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이 길은 왕궁에 납품되는 온갖 물건이 오가는 곳으로 변신했다. 각 납품업자는 이곳에 건물을 지어 물건을 저장해 놓았다가 왕실에서 요구하면 즉시 달려가 물건을 전달했다. 그래서 왕실과 거래하는 각종 상점이 즐비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왕정이 몰락한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왕실에 납품하던 업체는 모두 문을 닫고, 그 자리에는 샤넬, 루이비통 같은 명품 상점이 들어섰다. 케른트너거리가 외국인 관광객과 서민을 위한 쇼핑거리라면 콜마르크트거리는 부자를 위한 명품 쇼핑거리로 바뀐 것이다. 


이곳에서 아이쇼핑만 해야 한다고 슬퍼할 것은 아니다. 돈이 없는 평범한 관광객이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없지는 않다. 그중 추천할 만난 곳은 맛있는 빵과 초콜릿으로 유명한 카페 데멜이다. 커피는 평범하지만 다과류는 카페 자허와 함께 손꼽을 만한 곳이어서 손님이 늘 넘쳐난다. 데멜은 1786년에 문을 열었으니 200년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시씨로 알려진 황후 엘리자베트가 이곳의 케이크를 좋아해 왕궁에 납품하도록 했다. 



10년 전 가족과 함께 빈을 여행할 때 데멜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이곳과 비슷한 케이크를 파는 곳이 드물었다. 그래서 케이크는 놀랄 만큼 맛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곳 못지않게 맛있는 케이크를 파는 카페나 제과점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맛’보다는 ‘경험’을 기대하고 들어가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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