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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12. 2024

빈 둘째 날(3) 레퀴엠 초연되던 날


콜마르크트거리의 종점은 미하엘(미카엘)광장이다. 거리 맞은편에는 반원형 구왕궁이 서 있고, 앞에는 원형 광장이 펼쳐졌다. 광장은 사거리다. 콜마르크트거리 바로 옆에는 보티프교회 쪽으로 똑바로 이어지는 헤렌가세가 있고, 맞은편에는 폭스가르텐으로 연결되는 샤우플러가세와 오페라하우스로 직행하는 라이츌가세가 나온다.



미하엘광장에는 2천 년 전 빈이 빈도보나로 불렸던 고대 로마 시대 유적이 남아 있다. 당시 로마군의 전초 기지 흔적이다. 빈시청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부터 19세기까지 역사를 담은 타임캡슐을 묻었다. 광장에 가면 ‘발굴지’를 뜻하는 ‘아우스그라붕엔’이라는 이름의 안내판이 세워진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이곳도 그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지역이라는 걸 입증해주는 유적인 셈이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미하엘광장은 13세기에 만들어졌다. 당시 빈의 지배자였던 바벤베르크 공작 레오폴트 6세가 왕궁이 있던 암 호프와 외곽 지역의 통행을 위해 광장을 만들었다.


레오폴트 6세는 광장을 꾸미면서 교회도 하나 건설했다. ‘천사장 미카엘’에게 헌정한 장크트미하엘(성 미카엘)교회였다. 13세기에 처음 교회가 생겼으니 빈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인 셈이다. 교회의 중앙 신도석과 양쪽의 복도는 옛날 형태 그대로다. 양쪽 예배당은 이후에 만들어졌다. 17세기에는 교회 내부를 바로크 양식으로 리모델링했다. 교회의 파이프 오르간은 1714년에 만든 것이다. 빈에서는 가장 큰 바로크 양식 오르간이다.



장크트미하엘교회는 모차르트로 유명한 곳이다. 1791년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를 위해 첫 추도미사가 열린 곳이 바로 여기였다. 그가 미완성으로 남긴 유작 ‘레퀴엠’이 초연된 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교회에 들어가서 잘 살펴보면 한쪽 구석에 이런 내용을 담은 동판을 찾을 수 있다. 


대다수 외국인 관광객은 이 교회의 역사를 잘 모른다. 모차르트 추도미사는 물론 레퀴엠 초연 이야기도 알지 못한다. 교회가 크거나 화려하지 않다 보니 안에 들어가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모르고 여행을 가면 보이는 게 적고 볼 수 있는 게 드물다.



콜마르크트를 지나 미하엘광장까지 가는 이유는 한 가지다. 합스부르크 왕실이 살았던 호프부르크왕궁을 보기 위해서다. 호프부르크왕궁은 13세기에 처음 만들어져 1918년 오스트리아 왕정이 붕괴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처였다. 


호프부르크왕궁은 13세기에 처음 건설한 이후 계속 증축을 거듭해왔다. 현재 면적은 50만㎡에 이른다. 비종교적 건축물 중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큰 복합 건축물이다. 1946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는 오스트리아 연방대통령 집무실은 물론 다양한 박물관으로 활용된다.


이곳에 가면 꼭 둘러봐야 할 곳은 시씨박물관이다. 왕궁 안으로 들어가 통합 입장권을 사면19세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웠다는 황후 엘리자베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시씨박물관, 시씨와 남편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살았던 황제의 방, 황실 가족이 사용했던 도자기, 식기 등을 전시하는 실버크라머를 둘러볼 수 있다. 물론 박물관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는 기념품 상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곳은 한마디로 시씨 기념품 천지다. 시씨 인형이나 자석 하나라도 사지 않고 배길 방법이 없다.



박물관에서 나와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헬덴광장과 노이에부르크궁전이 나온다. 노이에부르크궁전은 이름 그대로 ‘새로 지은 궁전’이다. 원래는 궁전 맞은편 광장에도 똑같은 모양의 궁전을 하나 더 지어 대칭을 이루게 하려는 게 왕실의 생각이었지만 자금 사정에다 국제 정치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하나만 짓고 끝났다.


노이에부르크는 국립도서관,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공예품을 전시하는 에페이소스 박물관, 세계 각국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벨트박물관, 오스트리아 역사의 집, 무기류 전시실, 슈베르트와 리스트, 베토벤, 하이든 등이 사용한 악기를 볼 수 있는 악기 전시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노이에부르크에 전시된 유물 중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예수의 가슴을 찔렀다는 창, 즉 성창(聖槍)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형수의 죽음을 재촉하려고 군인이 쇠몽둥이로 사형수의 뼈를 부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사형을 관장하던 로마군 백인대장 론지누스는 예수가 죽은 걸로 생각하고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보았다.



신약성서에도 이 장면을 묘사한 내용이 나온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복음서 19장 34절)


론지누스가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합스부르크 왕실의 손에 들어갔다. 원래는 오늘날 독일 영토인 뉘른베르크에 보관됐지만 나중에 호프부르크 왕궁으로 옮겨졌다. 최종적으로는 노이에부르크궁전에 있는 제국박물관에 보관됐다.


물론 이게 진짜 예수를 찔렀던 성창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2003년 영국의 금속학자 로버트 페더 박사가 성창의 연대를 조사했더니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7세기에 만든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빈의 고고학연구소가 다시 조사해 보니 8~9세기 무렵이라는 결과가 도출됐다.



노이에부르크궁전 끝부분에서 부르크링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 걷는다. 궁전 뒤쪽은 왕실 정원인 부르크가르텐이다. 정원 한쪽 모퉁이에 조그맣게 따로 단장된 공간이 나타난다. 온전히 모차르트를 위한 공간이다. 끝부분에는 모차르트 동상이 서 있고, 가운데에는 봄, 여름이면 ‘음표’ 모양의 꽃이 피어나는 화단이다. 


모차르트 동상은 독일어로는 ‘모차르트 덴크말’이라고 부른다. 동상은 악보대를 든 모차르트를 형상화했다. 정면의 부조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두 장면을 의미한다. 뒷면의 부조는 여섯 살인 모차르트가 아버지, 누나 난네를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을 담았다. 받침돌은 각종 장식품, 마스크, 화관으로 꾸며졌다. 아르 누보 양식으로 만든 받침돌의 아기상은 모차르트 음악의 힘을 상징한다. 


모차르트 동상은 모차르트 탄생 140주년이던 1869년 4월 21일에 제막됐다. 동상 제작비는 빈 시민 모금으로 충당됐다. 모차르트 동상이 처음 세워진 장소는 알베르티나플라츠의 알베르티나 궁전 앞이었다. 그런데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이던 1945년 3월 12일 연합군의 폭격을 맞아 부서졌다. 수리를 받은 동상은 1953년 6월 5일 오늘날의 위치인 부르크가르텐으로 옮겨졌다.



모차르트 동상을 찾는 관광객의 발걸음은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동상과 주변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날씨가 따뜻한 4~5월이다. 이 무렵이면 부르크가르텐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꽃이 화사하게 핀다. 동상 앞에는 높은음자리표 모양의 꽃밭이 조성된다. 꽃밭 앞에서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이 줄을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차르트 동상에서 오페라하우스 쪽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다른 동상이 하나 나온다. 기울어가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상이다. 그는 제네바에서 암살당한 황후 엘리자베트의 남편이었다. 프란츠 요제프와 달리 엘리자베트의 동상은 부르크가르텐 반대쪽인 폭스가르텐 끝부분에 설치됐다. 부르크가르텐은 ‘성의 정원’, 즉 ‘왕궁 정원’을 뜻하고 폭스가르텐은 ‘국민 정원’을 의미한다. 서로 사랑했던 부부의 동상을 나란히 세우지 않고 이렇게 멀찍이 띄어 놓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대부분 관광객은 폭스가르텐에 있는 엘리자베트 동상에는 일부러 찾아가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동상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물론 사진을 찍는 사람도 드물다. 두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프란츠 요제프가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먹여 살렸지만 지금 빈 관광을 먹여 살리는 것은 모차르트와 함께 황후 엘리자베트, 즉 시씨다. 


꽤 많은 사람이 부르크가르텐에서 휴식을 즐긴다. 그냥 잔디밭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사랑하는 연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콧노래를 즐기는 남자도 보인다. 이곳에 잠시 앉아 쉬기로 한다. 정면에서 바라본 호프부르크왕궁과 뒤쪽인 정원에서 살펴보는 왕궁의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적당히 불어오고, 햇살도 꽤 따사로워 그야말로 마음을 비우고 멍 때리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정원에서 한가로운 가을 오후를 즐기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다. 다들 멍 때리기 도의 경지에 도달한 모양이다.



돌고 돌아 다시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19세기 중엽 빈 성벽을 허물고 링슈트라세를 만들면서 가장 먼저 지은 공공건물이 바로 오페라하우스였다. 


황제는 오페라하우스를 짓기 위해 건축 설계안 국제 공모전을 열었다. 유럽 각국의 유명 건축가들이 대부분 참가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인 아우구스트 시카르트 폰 시카르드스부르크와 에두아르드 반 더 뉠도 공모전에 응모했다.



평생 일을 같이한 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아 마침내 공모전 당선이라는 영광을 얻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당선되자마자 비난이 쏟아졌다. 설계안이 엉터리라는 것이었다. 오페라하우스 예정 부지 맞은편의 하인리히스호프보다 못하다는 게 비난의 요지였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계는 물론 언론까지 이들을 물고 늘어졌다. 사실 비난하는 목소리의 한쪽 모퉁이에는 오스트리아 건축가가 아니라 헝가리 건축가라는 것에 대한 차별 의식이 숨어 있었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비난을 견디지 못했다. 뉠은 너무 고통스럽다며 공사가 진행 중이던 1868년 자살하고 말았다. 게다가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시카르드스부르크는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뉠이 자살하고 10주 뒤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래도 두 사람의 설계대로 오페라하우스 공사는 계속됐다. 오페라하우스는 1869년 5월 25일 완공됐다. 개장 축하 공연작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였다. 당시 공연에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시씨로 유명한 엘리자베트 황후도 참석했다.


당시의 비난과는 달리 지금 오페라하우스는 빈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빈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사실 건설 당시에 비난과 악평에 시달린 건축물은 빈 오페라하우스만이 아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과 루브르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런던의 시청사와 브리지 타워 다리, 런던 아이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다들 지금은 각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나 마찬가지인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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