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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13. 2024

빈 셋째 날 모차르트의 10년을 따라


빈 여행 마지막 날, 그동안 여러 차례 빈에 왔지만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정에 도전하기로 한다. ‘빈에서 모차르트를 만나다’가 일정의 주제다. 



빈 곳곳에는 모차르트의 흔적이 남았다. 그가 처음 빈에 발을 디딘 곳부터 시작해서 첫 하숙집, 신혼집, 대성공을 거뒀을 때 살던 화려한 저택, 빈곤해진 뒤 떠돌아다닌 외곽의 싼 집과 세상을 떠난 집에서부터 첫 오페라 ‘후궁 탈출’을 공연한 극장, ‘마술피리’를 무대에 올린 극장에 이르기까지 빈 시내에는 그의 발자취가 아직도 짙다. 


모차르트는 1756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스물다섯 살인 1781년까지 살다 아버지와 누나를 버려두고 혼자서 빈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10년 뒤인 1791년 서른다섯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간 곳은 성페터교회 뒤편에 있는 암호프광장이다. 이곳에는 ‘콜랄토저택’이라는 건물이 있다.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 빈을 처음 방문해 첫 연주회를 가진 곳이 여기였다. 한마디로 모차르트가 빈에서 데뷔한 장소였다.



콜랄토저택의 주인은 이탈리아 출신 귀족인 토마스 빈치게라 콜랄토 백작이었다. 그는 90년 전에 지어 낡은 저택 개축 공사를 몇 주 전에 마무리한 상태였다. 지인을 모시고 집들이 행사를 어떻게 진행할지 고민하다 마침 빈을 방문한 모차르트를 초대한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콜랄토저택 연주회 개최를 시작으로 빈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나중에는 쇤브룬궁전에 들어가 황실 가족 앞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했다. 아우어스페르크슈트라세 1번지인 아우어스페르크궁전에서는 군 최고사령관인 히트부르크하우젠 왕자를 위해 연주했다. 마우니츠 백작의 저택인 발하우스 광장 2번지와 방크가세 2번지인 쇤보른바티아니저택, 그리고 왕립도서관 앞의 요제프광장 6번지 팔피저택에서도 연주했다. 각 저택에는 안팎에 ‘모차르트가 연주한 장소’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암호프광장에서 그라벤 거리를 따라 걸어 성슈테판대성당과 케른트너 거리가 만나는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어느 곳으로도 꺾지 않고 곧바로 맞은편 골목, 즉 싱거슈트라세로 향한다. 목표는 싱거슈트라세 7번지다. 건물의 이름은 도이치오던하우스, 즉 독일기사단궁전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독일기사단 단장이 관할하는 독일수도원교회와 독일기사단 보물관이 있다. 



잘츠부르크로 돌아간 모차르트는 스물다섯 살인 1781년 잘츠부르크 1인자인 콜로레도 대공‧대주교에게서 빈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가 달려간 곳은 바로 싱거슈트라세 7번지였다. 


성인이 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의 개혁을 추진하던 콜로레도와 사이가 나빴다. 그는 잘츠부르크를 떠나 독립하고 싶었지만 콜로레도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독일기사단궁전에서 콜로레도와 설전을 벌였다. 화가 난 콜로레도는 모차르트에게 마음대로 하라며 내쫓아 버렸다. 이렇게 해서 모차르트는 콜로레도의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을 얻게 됐다. 


자료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났다고 한다. 그것이 ‘쫓겨났다’는 말의 상징적 표현인지, 정말 ‘엉덩이를 차여’ 쫓겨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실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차르트는 자유를 얻은 기분에 콧노래를 부르며 그라벤 거리를 따라 걸었다. 그는 잘츠부르크의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성페터교회 옆의 밀히가세 1번지 주택으로 갔다. 집주인은 남편 프리돌린 베버를 잃고 혼자서 네 딸을 키우던 체칠리아 베버였다. 모차르트는 만하임에 연주여행을 갔을 때 베버 가족을 만나 잘 알던 사이였다. 


모차르트는 밀히가세 1번지에서 1781년 5~9월 사이 넉 달 동안 머물렀다. 스물다섯 살이었던 그는 그 짧은 기간에 당시 열아홉 살이던 체칠리아 부인의 둘째딸 콘스탄체와 사랑에 빠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체칠리아 부인은 모차르트를 집에서 쫓아냈다. 모차르트는 짐을 그라벤 거리 17번지 집의 3층으로 옮겼다. 성페터성당 바로 앞의 요제프브루넨 맞은편이었고, 밀히가세 1번지 콘스탄체의 집에서 걸어서 1분 거리였다. 그는 새 하숙집에서 콘스탄체와 밀회를 즐겼다. 이 건물에는 지금은 각종 상점이 입점했다.


모차르트는 그라벤 거리 17번지 집에서 첫 오페라 ‘후궁 탈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1782년 7월 16일 부르크극장에서 초연돼 대성공을 거뒀고, 모차르트는 단번에 500굴덴을 벌었다. 당시의 부르크극장은 링슈트라세의 빈시청 맞은편에 있는 오늘날의 부르크 극장과 달랐다. 그때에는 호프부르크왕궁의 미하엘광장 쪽에 있었다. 이 극장은 나중에 사라졌고 지금의 부르크극장이 새로 생겼다. 미하엘광장에 가면 왕궁 벽에 ‘이곳에 부르크 극장이 있었다’는 동판이 붙은 걸 볼 수 있다. 


‘후궁 탈출’로 자신감을 얻은 모차르트는 체칠리아 부인에게 딸과 결혼하겠다고 밝혔다. 체칠리아 부인은 사윗감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허락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결혼에 반대했지만 그는 여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1782년 8월 4일 결혼식을 거행한 곳은 성슈테판대성당이었다. 원래 장모의 집 근처에 있던 성페터교회에서 결혼하려 했지만 주변 지인의 도움으로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모차르트는 스물여섯 살, 콘스탄체는 스무 살이었다. 결혼을 승낙한다는 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결혼식 다음날이었다. 


갓 결혼한 모차르트 부부의 뒤를 따라 성슈테판대성당 앞의 로텐투름슈트라세를 걷는다. 리히텐슈테그 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조금만 가면 호허마르크트가 나타난다. 여기서 4~5분 정도 더 이동하면 비플링거슈트라세가 보인다. 모차르트가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이 거리의 19번지였다. 그는 이곳에서 ‘대미사곡 C단조’를 작곡해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초연했다.



모차르트의 신혼집인 비플링거슈트라세는 그가 여섯 살 때 첫 빈 연주회를 열었던 암호프광장 인근이다. 그는 이 집에서 결혼 이듬해 6월에 첫 아들 라이문트 레오폴트를 낳았다. 부부는 첫 아들을 암호프교회에 데려가 세례를 받게 했다. 하지만 아들은 불과 두 달 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부부는 결혼하고 첫 8년 사이에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다. 그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둘뿐이었다.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와 프란츠 자베르 볼프강 모차르트였다. 


비플링거슈트라세 19번지에서 다시 거꾸로 호허마르크트 쪽으로 1분 정도 걸어가면 조그만 골목길 사이로 유덴플라츠가 나타난다. 과거에는 유대인 밀집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홀로코스트 위령탑’이 있다.


모차르트는 1783년 4월 유덴플라츠 3번지 건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1784년 1월까지 9개월 정도 살았다. 그는 이 집에서 ‘터키 행진곡’이 들어간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K331’를 작곡했다. 이 건물은 지금은 학교 등으로 사용된다.



유덴플라츠에서 호허마르크르트를 지나 다시 성슈테판대성당으로 간다. 북쪽 탑 앞을 지나 슐러스트라세로 들어간 뒤 곧바로 돔가세 쪽으로 우회전한다. 


모차르트는 1784년 9월 29일 돔가세 5번지 2층으로 이사했다. 당시에는 빈에서 가장 훌륭한 저택이어서 연간 임차료가 960굴덴에 이를 만큼 비싼 곳이었다. 그가 빈에서 가장 멋진 저택에 들어가게 된 것은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난 덕분이었다. 1784~1787년은 모차르트의 전성기였고 경제적으로 황금기였다. 


모차르트는 돔가세에서 살 때 ‘피가로의 결혼’은 물론 피아노 협주곡 20~25번을 작곡했다. 이 기간 중에 그가 번 돈은 해마다 5천~1만 굴덴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받던 연봉 400굴덴과 비교하면 12~24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당시 빈의 유명 병원의사가 받는 연봉은 600굴덴이었다. 상류층이라도 1년에 500굴덴을 벌면 소득이 높은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따라서 그가 번 돈은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액이었을 게 분명하다.



이번에는 조금 멀리 가야 한다. 슈테판스플라츠 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3개 정류장을 지나 로쿠스가세 역에서 내린다. 이곳은 빈의 링슈트라세 바깥에 있는 지역이다. 빈에 성벽이 있던 시절에는 성벽 외곽이었다.


1787년 오스트리아와 오스만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길어지자 모차르트의 재정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돈이 급했던 그는 집세 부담을 덜기 위해 란트슈트라세 75번지로 이사를 갔다. 오페라 ‘돈 조반니’와 ‘아이네 클라이네 하흐트무지크’를 작곡한 곳은 여기였다. 재정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12월 1일에는 집값이 더 싼 투흐라우벤 27번지로 짐을 옮겼다. 



로쿠스가세 역에서 10분 정도만 걸으면 이색적인 관광 명소가 나온다. 바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다. 이곳에서 트램 1번을 타고 빈 시내 쪽으로 향한다. 1번 트램은 19세기에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만든 링슈트라세를 둘러볼 수 있는 흥미로운 교통수단이다.


1번 트램을 타고 가다 지하철 쇼텐토르 역 앞에서 내린다. 역 바로 앞에 지그문트 프로이트 공원이 보이고 공원 뒤편에 뾰족한 첨탑 두 개가 솟은 교회가 보인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암살 위기를 넘긴 뒤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드리는 뜻에서 만든 보티프교회다. 


교회 옆의 베링거슈트라세를 따라 3분 정도 걸으면 베링거슈트라세 26번지가 나온다. 재정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차르트는 1788년 6월 이곳으로 이사를 가 1789년 초까지 살았다. 이곳은 지금도 빈 중심가까지 걸어서 20분 이상 걸리는 곳이다. 모차르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성벽 밖이었기 때문에 더 외곽이었을 게 분명하다. 이 일대 집값은 시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쌌다. 그가 오페라 ‘코지 판 투테’를 쓴 곳은 여기였다. 이곳에서 입구에 이런 사실을 알리는 명판이 붙어 있다. 물론 모차르트가 살던 때의 건물은 허물어졌고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섰다. 



자, 이제 모차르트의 마지막을 향해 가보자. 모차르트는 1790년 11월 말 시내의 라우헨슈타인가세 8번지로 집을 옮겼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아파트였다. 그가 얻은 아파트에는 방 여섯 개, 부엌 2개, 부속실 여러 개가 붙어 있었다. 


모차르트는 돈을 벌기 위해 열정적으로 곡을 썼다. 발세그 스튜파흐 백작에게서 의뢰를 받고 유작이 된 ‘레퀴엠’을 작곡한 곳은 이 집이었다. 이곳에서는 또 오페라 ‘마술피리’와 ‘티토의 자비’도 썼다. 


모차르트는 이듬해 12월 5일 이곳에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건물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그 자리에는 ‘슈테플 백화점’이 들어섰다. 백화점 건물 7층 스카이바에는 모차르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다. 백화점 건물이 생기기 전인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는 클라이너 카이저하우스가 있었다. 백화점 후문 벽에는 모차르트가 1791년 12월 5일에 죽었다는 명판이 지금도 붙어 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성슈테판대성당에서 거행됐다. 관은 대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의 사인이 전염병 때문이라고 생각한 대성당 사제주임이 반대했던 것이었다. 간단한 장례 미사가 거행된 곳은 대성당 외부의 십자가 경당 앞이었다. 지금 십자가 경당의 철문 뒤에는 모차르트의 장례 미사가 열린 장소임을 알리는 명패가 붙어 있다. 


‘1791년 12월 6일 불멸의 작곡가 모차르트의 육체는 이곳에서 축복을 받았다. 여기에서 그의 관은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성 슈테판 대성당을 마지막으로 ‘모차르트 여행’은 끝이다. 그가 연주했던 부르크극장 등 여러 공연장도 있지만 모두 다 둘러보기는 너무 멀고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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