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마드리드에 ‘푸에르타 델 솔’이라는 광장이 있다. ‘태양의 문’이라는 뜻이다. 스페인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모든 도로의 기점이 바로 이곳이다. ‘모든 도로는 여기서 출발한다’는 표시인 ‘㎞ 0(제로)’가 바닥에 설치돼 있다.
푸에르타 델 솔은 매일 마드리드 시민은 물론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다양한 음악가나 밴드가 곳곳에서 거리공연을 펼치고, 현지 주민들에게 ‘명당’으로 유명한 로또 판매점 앞에는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기도 한다. 이곳에서 시작하는 프레시아도스 거리에는 엘코르테잉글레스 백화점 등 유명상점들이 즐비하다.
푸에르타 델 솔에는 1866년에 만들어진 유명한 시계탑이 있다. 한때 우체국으로 사용했고, 지금은 마드리드 시장 집무실인 한 건물의 꼭대기에 붙어 있다. 이 시계탑은 새해의 출발과 스페인 전통행사인 ‘행운의 포도 12송이’의 시작 시간을 알려 주는 역할로 유명하다.
스페인은 세계적인 포도 생산국이다. 전 세계에서 포도 재배 면적이 가장 넓은 나라다. 포도 생산량은 중국, 이탈리아, 미국, 프랑스에 이어 5위다. 와인 생산량과 수출량은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3위다. '행운의 포도 12송이'는 이런 상황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행사다.
1895년은 1년 내내 날씨가 정말 좋았다고 한다. 햇빛은 온 세상에 넘쳐났고, 비는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양만큼만 내렸다. 그래서 그해 포도 농사는, 농민들의 말에 따르면, 스페인이 생긴 이래 최고라고 할 정도로 풍년이었다. 곳곳에 포도가 넘쳐 났다. 사람들은 식사 때 빵보다는 포도를 더 많이 먹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흉년이 들면 팔 게 없어서 고민이고, 풍년이 되면 가격이 폭락해서 또 걱정인 게 농민들의 현실이다.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스페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포도 농사가 풍년을 기록하자 포도 가격은 폭락했다. 포도를 따서 팔아봤자 인건비도 안 된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흉년 때보다 더 못하다고 하소연하는 농민들도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농사가 너무 잘 돼서 농민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스페인포도농민협회 지도부는 포도 농사 풍년으로 고통을 받는 농민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마드리드에서 모임을 가졌다.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봐도 뚜렷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이야 포도 자체를, 또는 포도주를 만들어 외국에 수출할 수 있다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협회 지도부는 알폰소 13세 국왕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국왕이라고 해서 뚜렷한 대책을 갖고 있지 않겠지만,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기라도 하면 사정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심정에서였다.
“전하, 전국의 수많은 포도 재배 농민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내년부터는 포도 농사를 포기하겠다는 농민이 속출합니다. 이대로 놔두다간 우리나라 포도 농업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전하, 농민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당시 알폰소 13세 국왕은 겨우 아홉 살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직전 아버지 알폰소 12세 선왕이 타계하는 바람에 그는 세상에 머리를 내밀자마자 국왕 자리에 앉았다. 그가 한 나라를 다스릴 상황이 아니어서 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교육을 잘 받아 학식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는 여걸이었다. 하지만 국가 경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편이었다. 그녀가 섭정을 하는 동안 스페인은 해외의 많은 식민지를 하나씩 잃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는 스페인포도농민협회 대표들의 방문에 앞서 신하로부터 보고를 받아 포도 재배 농민들의 어려움을 잘 알았다. 그녀는 알폰소 13세 국왕을 대신해 협회 대표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은 영민하신 전하에게도 슬픈 일이다. 전하께서는 국고를 털어 백성들을 구하려 하신다. 동원할 수 있는 국가 재정을 모두 털어 그렇게 비싸지 않은 가격에 포도를 사들여 모든 백성들에게 나눠 주도록 하겠다. 그래서 모두 포도를 배부르게 먹도록 하고, 포도 재배 농민들의 어려움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
크리스티나는 협회 대표들이 돌아간 뒤 재정부 대신을 불렀다. 왕궁 살림을 어렵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예산을 총동원해 포도를 사들여 모든 백성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연말에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포도 잔치를 베풀겠다고 선언했다.
크리스티나는 약속대로 그해 연말 알폰소 13세 국왕 등 왕궁 가족을 모두 데리고 푸에르타 델 솔 광장으로 나갔다. 광장은 수많은 사람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포도 재배 농민들도 모두 광장에 나와 있었다. 그들은 알폰소 13세 국왕 등이 광장에 나타나자 바닥에 넙죽 엎드려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관리들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포도를 나눠주었다. 이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포도를 먹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손바닥과 입이 며칠 동안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게 물들었고, 그래도 다 먹지 못한 포도를 양손에 가득 들고 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푸에르타 델 솔에서 열린 포도 먹기 행사는 스페인포도농민협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들은 이 행사를 잘 활용하면 앞으로 포도 판촉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민하던 협회는 1909년 ‘행운의 포도 12송이 먹기’ 이벤트를 고안해 냈다. 12월 31일 밤 12시, 즉 새해 1월 1일 0시를 맞아 푸에르타 델 솔의 시계탑이 종을 울릴 때 광장에 모인 새해 축하객들이 포도 12송이를 먹는 행사였다.
스페인어로 12월 31일은 노체비에하(낡은 밤)라고 부른다. 이날 자정이 되면 푸에르타 델 솔의 시계탑은 종을 열두 번 울린다. 사람들은 시계가 종을 한 번씩 울릴 때마다 포도를 한 송이씩 뜯어 먹는다. 반드시 파란 포도여야 한다. 포도 12송이는 일 년 열두 달을 뜻한다. 물론 포도 재배 농민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이렇게 포도를 많이 먹으면 새해에는 항상 행운이 가득하고 하는 일마다 잘된다고 한다.
처음에 마드리드에서 시작했던 행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스페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과거 스페인 식민지였던 중남미 지역 일부 나라에서도 이 전통을 받아들여 매년 연말에 행사를 펼친다고 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포도를 먹음으로써 액운을 쫓고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시계탑이 종을 12번 울릴 동안 포도 12송이를 다 먹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광장에 모인 사람 대부분은 포도를 완전히 해치우지 못한 채 그냥 손에 들고 있기만 한다. 포도송이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깡통에 든 포도로 대신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12송이 대신 12알을 먹기도 한다.
종이 다 울리면 사람들은 서로 옆 사람을 쳐다본다. 그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광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입안에 포도를 가득 물고 두 손에는 포도송이를 든 채 서 있는 모습을 서로 쳐다보면 당연히 우스울 수밖에 없다.
‘행운의 포도 12송이’ 행사를 마친 사람들은 즉석에서 춤을 추고 샴페인을 터뜨리며 새해를 축하한다. 마드리드의 포도 먹기 행사는 TV로 생중계한다. 광장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는 사람들은 TV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맞춰 포도를 먹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