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급류처럼 흘러 넘쳐 온 세상을 흠뻑 적시었네
트로이 사람들과 그들을 도운 친구들은 모두 죽었나니
무거운 죽음에 짓눌려 쓰러진 이들의 시체뿐이로다‘
10년을 끈 트로이 전쟁은 ‘목마’ 한 마리의 비책 때문에, 또는 덕분에 막을 내렸다. 대부분의 트로이 사람들은 성 안으로 쳐들어온 그리스 연합군의 칼과 창과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트로이는 그야말로 지옥의 대학살장이었다.
대학살을 피해 달아난 이들도 더러 있었다. 트로이의 왕자 안카이즈와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아에네아스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로 달아났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로마의 조상이 됐다.
극적으로 달아난 다른 트로이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왕자 비아노르와 그의 일행들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호메로스가 쓴 <일리어드 오디세이>는 물론 그리스의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스페인 마드리드에 전설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비아노르는 트로이를 탈출했다가 수년 뒤 귀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향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리스 연합군의 노예가 돼 그리스로 끌려갔거나, 다른 노예상인들에게 팔려 뿔뿔이 흩어졌다. 게다가 연합군 일부가 트로이에 남아 잔당을 소탕했다.
비아노르는 할 수 없이 그리스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는 춥기는 하지만 땅이 비옥한 곳에 정착했고, 데리고 간 유민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다. 오늘날 알바니아 일대라고 알려졌다.
비아노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티베리스와 혼외정사에서 낳은 비아노르였다. 그는 둘째아들을 정말 사랑해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주변의 반대 때문에 둘째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었다.
왕 자리는 결국 장남 티베리스에게 돌아갔다. 그는 비아노르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같은 나라에서 살 뜻도 없었다.
“비아노르, 너는 내 어머니 원수의 아들이다. 하지만 너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은 없다. 너는 내 아버지의 아들, 나의 이복동생이기 때문이다. 넉넉한 돈과 충분한 병사와 백성을 붙여주겠다. 너의 어머니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서 살도록 하라.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
비아노르도 이복형과 싸워 왕위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형의 요구대로 어머니를 데리고 아버지의 왕국을 떠나 유랑에 나섰다.
비아노르는 북쪽으로 가던 도중 강이 흐르고 평야가 넓은 땅을 발견해 도시를 세웠다. 그는 어머니의 이름을 붙여 도시를 ‘만투아’라고 부르기로 했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만토바가 바로 그곳이라고 한다.
비아노르는 나이가 들면서 꿈을 자주 꾸었다. 꿈에 신들이 나타나 앞으로 일어날 일과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신들이 해 준 이야기는 나중에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
비아노르는 자신에게 영적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의 이름이 이때부터 ‘오츠노’로 바뀐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츠노는 ‘꿈을 통해 미래를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어느 날 비아노르의 꿈에 그리스의 신 아폴로가 나타났다.
“오츠노, 이제 어머니와 헤어질 때가 됐다. 이곳은 네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다. 네가 여기에 계속 머물면 온갖 불행이 너와 백성에게 닥칠 것이다. 너는 다른 곳으로 가서 더 크고 화려한 도시를 세워야 한다. 해가 지는 서쪽으로 계속 가도록 하라.”
오츠노는 계속 서쪽을 향해 이동했다. 수시로 아폴로가 꿈에 나타나 가야 할 방향과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그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중단하고 싶었지만, 정든 고향 트로이를 떠나온 뒤 자신만 믿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오츠노가 만투아를 떠난 지 10년째 되던 무렵이었다. 저녁 늦게 평지에 도착한 오츠노는 천막을 치고 여느 때처럼 평온한 하룻밤을 보냈다. 그날 밤에도 아폴로는 어김없이 꿈에 나타났다. 아주 넓고 평화로우면서 비옥한 땅을 보여주었다.
“마침내 안주할 땅에 도착했구나. 이곳이 바로 네가 정착할 땅이다.”
오츠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천막 밖으로 나갔다. 전날 밤에는 어두워서 몰랐지만 그가 사람들과 함께 숙영한 곳은 아주 광활하고 아름다운 평야였다. 곳곳에는 참나무와 스트로베리, 소나무가 무성한 숲이 있었고, 폭이 적당히 넓으면서 수량이 풍부한 강도 흘렀다. 마침 양치기들이 근처를 지나갔다. 오츠노는 그들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저희들은 카르페타니, 또는 카르페타노스라고 불리는 유목민들입니다. ‘마을이 없는 종족’이라는 뜻이지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에 따라 신의 계시를 기다리면서 곳곳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동쪽에서 온 귀인을 만나 아주 넓은 평야에 정착하게 되리라는 게 전설의 내용입니다. 아마 그 귀인이 당신인 것 같군요.”
“나도 어젯밤 꿈에 아폴로 신을 만났지요. 그는 나에게 이곳에서 정착하라고 하셨다오.”
오츠노는 카르페타니와 그의 백성들에게 건물을 짓고 성벽을 쌓고 마을을 만들게 했다. 마지막으로는 신을 모실 신전을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카르페타니와 오츠노의 백성들은 어떤 신을 모실지를 놓고 마찰을 빚었다. 카르페타니는 단 한 번도 아폴로를 신으로 모셔본 적이 없었다.
오츠노는 양측을 설득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칫 내분이 일어나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번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아폴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폴로 신이시여!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
오츠노의 마음을 읽은 아폴로는 그날 밤 꿈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가지를 실행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새로 지은 도시를 사르투누스의 따님이시며 땅을 지키시는 메트라기르타 여신에게 바치도록 하라. 두 번째로 너의 결정이 공정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너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메트라기르타는 시벨레스라고 불리는 여신이었다. 원래는 프리기아 지역의 여신이었지만, 소아시아를 식민지로 삼은 그리스 사람들이 퍼뜨린 덕분에 여러 지역에서 추앙받게 됐다.
오츠노는 다음날 아침 양측 사람들을 모아놓고 꿈에 아폴로가 나타나 새 도시를 시벨레스 여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한 말을 전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구덩이를 하나 파라고 지시했다. 카르페타니와 그의 백성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큰 구덩이를 서둘러 팠다.
“아폴로 신은 제물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 제물은 내 목숨이어야 한다고 하셨다. 나를 이 구덩이에 산 채로 묻도록 하라.”
오츠노는 말을 마친 뒤 구덩이로 뛰어 들어가 편안하게 누웠다. 카르페타니와 백성들은 차마 그 구덩이를 흙으로 메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츠노는 빙긋이 웃으며 손으로 흙을 덮으라고 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구덩이에 흙을 쏟아 부었다. 졸지에 무덤이 된 구덩이 위에는 큰 돌을 올려놓았다.
사람들은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슬픔에 눈물을 쏟았다. 카르페타니는 졸지에 당한 일에 당황해 이곳에 머물러야 할지, 떠나야할지 고민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깊은 밤에 갑자기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쳤다. 천둥번개도 내리쳤다.
“우리가 오츠노를 생매장한 벌을 받게 되는 거야. 신전 건립을 놓고 싸우는 바람에 왕을 죽게 만든 건 모두 우리 잘못이야.”
그때 하늘에서 사자 두 마리가 이끄는 수레가 내려왔다. 수레에는 메트라기르타 여신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무덤에서 오츠노를 꺼집어 내더니 마차에 태워 하늘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하늘의 분노가 풀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영원히 새 고향에 정착하게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메트라기르타 여신을 모신 도시는 마게리트라고 불리게 됐다. 세월이 더 흐른 뒤에는 마침내 마드리드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됐다. 오늘날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는 이렇게 해서 생겨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