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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알람브라궁전 알카사바 우물탑의 비밀(2)

by leo


입가에 미소가 번지면서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골동품 가게에서 차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다 자정 무렵 알카사바 탑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계단을 통해 지하 2층까지 내려갔다.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없었다. 숨겨진 비밀 통로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내게 초를 주게나.”


아랍인은 갈레고로부터 초를 건네받아 불을 붙였다. 몰약나무 수액을 건조시켜 만든 약재인 몰약도 아니고, 유향나무의 진액인 유향도 아니고 그렇다고 때죽나무에서 채취하는 소합향도 아니고. 도대체 어떤 냄새라고 해야 할지 표현하기 힘든 향기가 초에서 퍼져 나왔다.


아랍인은 향기에 취한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번쩍 뜬 그는 초의 빛을 두루마리에 비췄다. 생각대로 낮에 보았던 것 외에 다른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그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을 치는 듯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이 쩍 하고 갈라졌다. 그 사이로 계단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지금까지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방이 눈앞에 나타났다. 입구에는 거대한 옷장이 놓여 있었다. 옷장 양쪽에는 갑옷을 입고 엄청난 크기의 칼을 든 이슬람 군인 두 명이 마법에 걸린 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옷장 앞에는 큰 항아리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어떤 항아리에는 금화가, 다른 항아리에는 다이아몬드가, 또 다른 항아리에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진귀한 보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미리 갖고 간 포대 두 개에 금은보화를 가득 담았다. 아무리 담고 또 담아도 항아리의 보물은 줄어들 줄 몰랐다. 그때였다. 갑자기 우르릉 하는 큰소리가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들렸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아랍인과 갈레고가 지하 3층에서 몸을 가까스로 빼내고 보물 포대를 겨우 끌어올리자 계단은 사라지고 갈라졌던 바닥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달라붙었다.


“여보게, 갈레고. 너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망하는 법이야. 지금 이 정도만 가져가도 우리는 엄청난 부자가 된 거야. 필요하다면 다음에 또 같이 오도록 하지. 두루마리는 내가 갖고 가고, 향초는 자네가 갖고 가게. 그러면 서로 믿을 수 있지 않겠나? 대신 마누라는 물론 누구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네. 소문이 퍼지면 우리는 죽게 될지도 몰라.”


알람브라 궁전에서 내려온 갈레고는 금은보화가 가득 든 포대를 어깨에 메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새벽이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문 앞에서 쪼그려 잠들어 있었다. 그는 몰래 집에 들어가 보물을 숨긴 뒤 아내를 깨웠다. 눈을 뜬 아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아무리 돈을 못 벌어도 저는 꾹 참고 잔소리를 안 했답니다. 아이들이 먹을 게 없어 집에서 징징 짜더라도 당신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요. 왜냐 하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나 몰래 밤새도록 다른 여자를 만나 희희덕거리다 새벽에나 돌아오고. 아이고, 억울해라.”


갈레고는 진땀을 흘리면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살살 빌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는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남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갈레고는 몰래 숨겨놓은 포대에서 금 목걸이 한 개와 큰 다이아몬드 한 개를 꺼내와 아내에게 주었다.


“여보, 어디서 생겼는지는 묻지 말도록 해요. 나쁜 짓을 해서 훔쳐온 게 아닌 건 확실하니까. 이걸 팔아서 앞으로 맛있는 음식도 사고, 예쁜 당신 옷도 사고, 아이들 멋진 옷도 사도록 해요. 대신 남들에게는 절대 이야기해서는 안 돼요.”


아내는 도대체 이런 귀한 보물이 어디서 생겼는지 궁금했지만, 남편이 남을 해치고 도둑질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날 아침 일찍 보석상에 가서 보물을 팔아 손에 거머쥘 엄청난 돈만 생각하면서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하지만, 갈레고가 아내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까먹은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옆집에 사는 낮의 새이자 밤의 쥐같은 존재인 이발사 페드루고였다. 그는 이날 밤에도 귀를 갈레고의 집과 맞닿은 벽에 바짝 가져다대고 부부가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은 채 듣고 있었다. 페드루고는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행정관의 집으로 쪼르르 달려가 지난밤에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일러바치고 말았다.


화가 단단히 난 행정관은 갈레고를 당장 붙잡아오라고 했다. 그는 보물이 어디서 난 것인지 말하지 않으면 갈레고의 목을 자르고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그라나다에서 쫓아내겠다고 협박했다. 겁을 잔뜩 먹은 갈레고는 지난 밤 알카사바 탑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행정관은 아랍인도 붙잡아오라고 했다. 그는 그 날 밤 자정, 갈레고와 아랍인을 앞세우고 이발사와 부하 두 명을 대동한 채 알카사바 탑으로 올라갔다. 갈레고에게서 빼앗은 노새의 등에 커다란 포대 수십 개를 실은 채였다.


아랍인이 탑 지하 2층에서 두루마리를 읽어 내려가자 전날처럼 바닥이 갈라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행정관과 이발사는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의 눈앞에는 전날 아랍인, 갈레고에게 그랬던 것처럼 보물들이 넘쳐나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희희낙락하면서 미리 가져간 여러 개의 포대에 금은보화를 가득 실었다. 그래도 보물은 줄어들 줄 몰랐다.


“갈레고 그리고 아랍인. 너희 둘은 금은보화가 가득 찬 포대를 위로 갖다놓도록 해라. 그리고 내 부하들에게 나머지 포대들을 갖고 오라고 전해라.”


행정관은 서둘러 담지 않으면 금은보화가 사라지기라도 할까봐 손을 재빨리 놀리면서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에게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는 아랍인의 눈에서 반짝 하고 빛나는 예리한 눈빛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옷장 양쪽에 마법에 걸린 채 서 있던 두 이슬람 병사가 번쩍 하고 두 눈을 떴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갈레고와 아랍인은 보물이 가득 든 포대를 들고 위로 올라가 행정관이 말을 그의 부하들에게 전했다.


“행정관님이 포대를 더 들고 아래로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부하들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다시 전날처럼 우르릉 하는 큰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행정관과 이발사는 물론 그의 부하들도 금은보화를 포대나 호주머니에 집어넣는 데 정신이 팔린 탓에 그 엄청난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잠시 후 전날과 똑같이 계단은 사라지고 바닥은 그대로 달라붙고 말았다. 아랍인은 바닥을 발로 툭툭 치면서 빙긋 웃었다.


“여보게, 내가 어제 말했지.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망하는 법이라고. 우리가 내일 다시 와서 문을 열어주면 되겠지만, 자네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지? 저들의 운명은 알라신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인샬라! 나는 내일 그라나다를 떠날 걸세. 자네는 알아서 하도록 하게. 만약 저 보물이 다시 필요한 때가 있으면 먼 훗날 그때 다시 연락하도록 하세.”


두 사람은 행정관이 담은 보물을 공평하게 나눴다. 아랍인이 특히 좋아한 황금 방울을 가져가는 대신 다른 보물은 갈레고가 더 많이 가져가기로 했다. 다음날 아랍인은 골동품 가게 문을 잠그고 그대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었던 데다 보물 말고는 챙겨갈 재산이 없어 혼자서 떠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일은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고향인 아프리카 모로코의 탕헤르로 돌아갔다고 한다.


갈레고도 다음날 새벽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족, 노새와 함께 그라나다에서 종적을 감췄다. 아무도 가난한 물장수 갈레고가 어디로 갔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그라나다에서 먼 도시에 정착해 돈 페드로 질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귀족 행세를 했다. 사람들은 그의 아내를 ‘세뇨라 질’이라고 불렀다. 세뇨라는 마님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행정관과 그의 부하 두 명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들이 없어졌다고 해서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들이 알카사바 탑 아래 지하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부터 그라나다에는 이런 말이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부패한 행정관, 입이 가벼운 이발사를 그리워할 때가 되면 알카사바 탑 지하의 문이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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