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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알람브라궁전 알카사바 우물탑의 비밀(1)

by leo


18세기 무렵 알람브라궁전의 알카사바성 인근에 ‘저수조 광장’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슬람이 스페인을 지배할 무렵 그곳에 저수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그라나다 사람들이 음용수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매일 큰 물통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지고 물을 뜨러 다니곤 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물장수들이 하루 종일 우물을 오가면서 떠온 물을 싼 가격에 사서 먹었다.


여러 물장수 중에 덩치는 작지만 힘이 센 페드로 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스페인 주요 도시 물장수들은 대부분 갈리시아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이 필요할 때면 “물장수를 데려오라”고 하지 않고 “갈레고를 불러 와”라고 했다.페드로 길의 별명도 갈레고였다.


가진 재산이라고는 노새 한 마리뿐이었던 갈레고는 어린 세 아들, 딸을 매우 사랑했다. 누에바광장에서 알람브라궁전까지 물을 뜨러 오가려면 무척 힘들었지만, 자신을 꼭 빼닮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없던 힘이 생기곤 했다. 그는 대개 해가 져 어두워질 무렵이면 물장사를 마치고 꼭 집에 돌아갔다.


구름이 짙게 끼어 하늘에 밝게 떠 있어야 할 달을 완전히 가려버렸던 어느 여름날. 갈레고는 무더운 날씨 덕분에 그날따라 물장사가 잘 돼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물을 한 통만 더 떠 달라는 한 부자의 부탁을 받고 칠흑같이 깜깜한 늦은 밤에 다시 알람브라궁전으로 올라갔다.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려 노새에 싣고 막 내려오려던 찰나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이슬람 노인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세상 누구보다 선하고 자비로운 갈레고여. 나는 스페인을 떠돌아다니는 방랑객이라오. 평소에는 바깥에서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잠을 청했지만 오늘은 무척이나 몸이 불편하군요. 괜찮다면 오늘 하룻밤만 당신의 집에서 자도록 해 주지 않겠소?”


이슬람 노인의 간절한 요청을 받은 갈레고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부자의 부탁 따위는 잊어버리고 노새 등에 실었던 물통을 비우고 노인을 노새에 올라타게 했다. 그는 노인을 집에 데려와 좁은 방바닥 한구석에 한 장뿐인 담요를 깐 뒤 그곳에 눕게 했다.


평소 돈도 제대로 못 버는 남편에게 불만이 많았던 갈레고의 아내는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집에 생전 처음 보는 이교도 노인을 데려온 게 못마땅해 계속 투덜거렸다. 갈레고는 그런 불평을 못 들은 척 했다. 편안하게 몸을 누인 노인이 갈레고의 귀에 대고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낯선 나그네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풀어주다니 정말 고맙구려. 그 보답으로 선물을 하나 하리다. 내 보따리를 끌러 보면 작은 백단향 상자가 하나 있을 거요. 비록 초라해 보이는 상자지만 언젠가는 당신에게 큰 보물이 될 지도 모르지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끝낸 노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갈레고는 노인이 잠든 것으로 생각하고 잠자리로 들어갔다. 그런데 새벽녘에 갑자기 아내가 갈레고의 몸을 심하게 흔들었다.


“여보, 어서 일어나요. 큰일 났어요. 바닥에서 잠을 자던 노인이 눈을 뜨지 않아요. 아마 죽은 것 같아요.”


아내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깜짝 놀란 갈레고는 벌떡 일어나 노인에게 달려갔다. 아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노인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큰일 났네. 이 일을 어떡하지. 살인 누명을 쓰게 생겼군.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설명하더라도 과연 사람들이 나를 믿어줄까?”


걱정에 사로잡힌 갈레고는 눈물만 뚝뚝 흘리는 아내를 바라보며 고민하다 노인의 사체를 몰래 산에 갖다 묻기로 했다. 지금은 새벽이어서 산을 오가는 사람들이 없는 데다 늘 이 시간이면 알람브라 궁전으로 물을 뜨러 다녔기 때문에 의심을 살 여지는 없었다. 갈레고는 집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살펴본 뒤 노새에 노인의 시체를 실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구석진 곳에 노인을 갖다 묻었다.


하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다. 하필이면 갈레고의 바로 이웃집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는 페드루고라는 이발사였다. 아내 없이 혼자 사는 처지에 밤잠이 없는 데다 귀도 밝아 늘 침대에 누워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몰래 듣곤 했다. 그는 하필이면 새벽에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깼다가 갈레고 부부의 이야기를 엿듣게 됐다.


원래 이발소라는 곳이 동네의 이런저런 소문이 퍼지는 곳이 아니던가. 입이 가벼운 데다 늘 잘난 체를 하던 페드루고는 몰래 들은 이야기를 이발소에 면도를 하러 온 행정관에게 고스란히 일러 바쳤다.


행정관은 부패한 관리였다. 평소에도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시민들을 체포한 뒤 뇌물을 바치면 풀어주고, 돈이 없다고 하면 감옥에 잡아넣곤 했다. 그는 갈레고가 이슬람 노인을 살해하고 값진 소지품을 가로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하들을 불러 갈레고를 붙잡아오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갈레고에게 큰소리를 질렀다.


“솔직하게 말해라. 죽인 노인에게서 어떤 보물을 빼앗았느냐?”


깜짝 놀란 갈레고는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면서 덜덜 떨었다. 마음속으로 성당에서 신부의 설교 때 들은 모든 기독교 성인들의 이름을 다 불러보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요청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잘못하다가는 모가지가 날아가고 불쌍한 아이들은 평생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노인이 남기고 간 상자를 행정관에게 보여주었다.


“이것 하나뿐입니다. 나리!”


행정관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아랍어가 적혀 있는 두루마리 하나와 향초 한 개가 들어있었다. 그는 실망스러웠다. 여러 번 갈레고를 족쳤지만 더 이상 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떠들어봐야 목만 아플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갈레고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네 놈의 늙은 노새를 나에게 바치도록 해라. 그렇게 하면 네가 이슬람 노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믿도록 하겠다.”


엉뚱하게도 노새를 빼앗긴 갈레고는 노인이 남긴 상자를 옆구리에 낀 채 집을 향해 걸어갔다. 유일한 재산이었던 노새가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물장사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무리 건강하고 힘이 세다 하더라고 노새가 없으면 이전만큼 물을 길어 나르기는 어려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걱정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두 눈에 문득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아랍인이 운영하는 이슬람 골동품점이 띄었다. 그는 갑자기 두루마리에 적힌 글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그는 가게에 들어가 두루마리를 아랍인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해석한 두루마리의 내용은 이랬다.


‘이 두루마리는 알람브라 궁전의 알카사바성 탑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비법이지만 지금은 마법에 걸려 있다. 엄청난 걸쇠가 보물 앞에 걸려 있다.’


갈레고와 아랍인은 깜짝 놀랐다. 두루마리는 보물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나중에는 혹시 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하지만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상자 안에 향초 같은 것이 들어 있지 않은가? 내가 듣기로 마법의 두루마리는 자정에 향초를 켜서 보면 숨겨진 내용이 보인다고 하던데….”


“상자에 향초가 하나 있긴 한데….”


아랍인은 향초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수십 년 동안 골동품을 팔았지만 이런 향초 냄새는 처음 맡아보는군. 지금 스페인은 물론 아랍에서 이런 향초를 만드는 곳은 없을 거야. 그렇다면 이 향초는 수백 년 전 것이 분명해.”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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