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라나다-알람브라 궁전 세 공주의 탑(2)

by leo


알람브라 궁전에 돌아온 무함마드 8세는 세 공주를 방이 세 개 있는 탑으로 보냈다. 세 방은 복도로 서로 연결돼 세 공주는 편리하게 만날 수 있었지만, 바깥은 높은 벽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아무도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게 돼 있었다. 다만 벽의 한쪽은 벼랑이어서 창문을 통해 바깥을 환하게 내다볼 수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탑을 ‘세 공주의 탑’이라고 불렀다.


세 공주가 알람브라 궁전으로 돌아온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그런데 무함마드 8세의 귀에 딸들이 점점 말라가고, 건강은 갈수록 악화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던 그는 카디가를 불러 사정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카디가는 이미 세 공주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면서 세 공주의 방에 갔다. 자이다는 마치 넋이라도 잃은 듯 허무한 표정으로 방의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라이다는 방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계속 한숨만 쉬었다. 조라하이다는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유일한 창문을 통해 먼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세 공주님, 무엇이 문제인가요? 당장 당나귀를 지브롤터해협 너머로 보내 온갖 진귀한 보물을 수송해 오라고 할까요?”


카디가의 질문에 세 공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로코 궁전의 하렘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가수 카셈을 데려올까요?”


카디가의 새로운 질문에도 세 공주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난밤에 제가 들었던 음악을 들려 드릴까요? 버밀론 타워에 갇혀 강제노동을 하는 세 기독교 기사가 쉴 때마다 부르는 사랑의 노래 말이에요.”


카디가가 세 기사 이야기를 꺼내자 세 공주는 눈을 번쩍 뜨더니 그녀 옆으로 조르르 달려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기대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카디가는 빙긋이 웃으며 세 공주의 손을 모아 꼭 잡았다.


“단, 비밀을 지켜야 해요. 왕께서 아시게 된다면 세 공주님은 물론 저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카디가는 그날 밤 버밀론 타워로 갔다.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후세인 바바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도 원래 기독교도였지만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와 개종한 뒤 무슬림으로 살고 있었다. 카디가는 바바에게 적지 않은 양의 금을 몰래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매일 세 공주가 거처하는 알람브라 궁전의 방에서 내다볼 수 있는 계곡으로 세 기사 포로를 데리고 가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도록 했다.


“이런 사실이 왕의 귀에 들어가면 당신이랑 나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거예요. 꼭 비밀을 지켜야 해요.”


다음 날부터 세 기사는 버밀론 타워에서 일하는 대신 계곡에 가서 노래를 부르게 됐다.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면 세 공주가 나와 화답의 노래를 불렀다. 세 기사와 세 공주는 서로 스페인어와 아랍어를 몰랐기 때문에 노래 말고는 의사소통을 할 방법이 없었다. 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바바는 계곡 나무 밑에 들어가 하루 종일 늘어지게 잠만 잤다.


계곡의 비밀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몇 달간 이어졌다. 그 사이 세 공주의 건강은 놀랄 정도로 좋아졌다. 딸들이 회복한 모습을 본 무함마드 8세는 속고 있는 줄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매우 흡족해 했다. 그는 근래 들어 숲속에서 자주 들리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평범한 청춘남녀들이 주고받는 사랑의 대화라고만 생각했다.


세월은 다시 흘러 여러 달이 더 지났다. 세 공주가 태어난 뒤 점성술사가 예언했듯이 딸들을 그토록 믿고 사랑했던 무함마드 8세가 딸들로부터 배신당할 시간이 다가왔다. 배신은 기독교 국가에서 보낸 몸값에서 시작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밝은 대낮에도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 같으면 창밖에서 세 기사의 아름다운 세레나데가 울려 퍼질 시간이 됐지만, 노랫소리는 전혀 들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세 공주가 차례로 창밖을 내다보아도 세 기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걱정하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자이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꼼꼼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카디가가 급하게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세 공주님, 이제 아버지를 배신할지, 사랑을 배신할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세 기사의 고향에서 그라나다의 왕께 몸값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세 기사는 내일 고향인 코르도바로 돌아간다는군요.”


세 공주는 카디가가 가져온 새로운 정보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논리적인 자이다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감성적인 조라이다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겁이 많고 소심한 조라하이다는 그냥 덜덜 떨기만 했다. 자이다는 순간 카디가가 방에 들어오면서 한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를 배신할지 사랑을 배신할지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세 공주님께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행운을 빌어주면서 세 기사를 보내주는 길이 첫 번째입니다. 몇 달 간은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겠지요. 하지만 세상이란 게 다 그런 겁니다.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될 겁니다. 두 번째 길은 세 기사를 따라 그라나다를 떠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야반도주라고 하지요. 이렇게 하면 아버지를 버리게 되는 겁니다. 선택은 세 공주님께서 하세요. 어느 것을 선택하든 제가 방법을 찾겠습니다.”


세 공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신들을 그토록 아끼는 아버지를 버리고 그라나다에서 도망을 친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죽도록 사랑하는 세 기사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도 참을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물고 있던 첫째 자이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라나다에서 코르도바까지 가는 길에는 많은 초소가 있고, 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잖아요. 그곳들을 피해 달아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카디가는 세 공주의 얼굴을 차례대로 찬찬히 들여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세 기사가 바바를 뇌물로 구워삶았답니다. 그가 코르도바까지 길 안내를 할 거예요. 저도 같이 갈 겁니다. 세 공주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원래 기독교도였죠.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개종했지만 이제 고향에 돌아갈 길이 생긴 만큼 세 공주님이 용기를 내신다면 저도 따라갈 거예요. 하지만 세 공주님은 과연 아버지의 믿음을 배신할 수 있을까요?”


카디가가 아버지라는 단어와 믿음, 배신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사용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자이다가 발끈하고 나섰다.


“아버지가 우리를 믿었다고요? 그런 분이 우리를 탑에 가둬 밖에도 못 나가게 하시나요? 그런 분이 밤마다 우리 방문 앞에 걸쇠를 걸어놓으시나요? 저는 사랑하는 기사를 따라 가겠어요. 게다가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도 원래는 기독교도였죠. 그렇다면 우리도 근본적으로는 기독교도인 셈이죠. 조라이다, 조라하이다,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니?”


자이다의 반강요, 반설득이 이어지자 처음에는 주저하던 나머지 두 공주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세 공주의 결심을 확인한 카디가는 한밤중에 돌아오겠다면서 방에서 뛰어나갔다.


카디가는 무함마드 8세는 물론 그라나다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자정 무렵 알람브라 궁전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긴 밧줄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베란다로 걸어가더니 밧줄을 아래로 던졌다. 미리 아래에 와 있던 바바가 내려온 밧줄을 잡아 흔들리지 않게 단단하게 나무에 묶었다. 카디가가 가장 먼저 밧줄을 타고 내려가자 자이다와 조라이다도 머뭇거리지 않고 밧줄을 이용해 방에서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이는 막내인 조라하이다뿐이었다.


조라하이다는 밧줄을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주저했다. 기독교 기사를 사랑하지만 아버지를 저버리고 달아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 사이 밑에 있던 카디가와 두 언니는 어서 내려오라고 거듭 재촉했다. 여러 번 망설이던 조라하이다는 결국 밧줄을 풀어 아래로 던져버리고 말았다. 두 언니는 막내 동생과 함께 갈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세 기사와 두 공주 그리고 카디가와 바바까지 모두 7명이 말을 타고 함께 달아났다는 사실은 금세 발각됐다. 진노한 무함마드 8세는 봉화를 올려 그라나다의 모든 초소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 나가지 못하게 철통같은 경계를 하도록 지시했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라나다 궁전 가장 높은 탑에 있던 봉화에 불이 붙었고, 도미노가 쓰러지듯이 불은 각 산봉우리로 이어졌다.


세 기사와 두 공주 일행은 큰길 대신 산속의 좁은 길을 택해 밤새 말을 달렸다. 사람은 물론 말도 지치고 피곤에 찌들었지만, 목숨을 잃지 않고 코르도바로 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힘든 강행군을 펼친 일행은 마침내 엘비라산의 깊은 협곡을 잇는 다리 인근에 도착했다. 다리만 건너면 기독교 국가인 코르도바의 영토였다. 협곡 아래로는 빠른 속도로 강물이 흘렀다. 그라나다와 코르도바 사람들은 황토색 강물을 보고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무슬림과 기독교도의 피가 흐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협곡을 잇는 다리 앞에는 무슬림 병사 수십 명이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이미 그라나다 궁전에서 날아온 봉화로 전갈을 받은 뒤 다리를 봉쇄한 모양이었다. 일행이 앞으로 나아갈 방법은 더 이상 없었다. 이때 진홍색 옷의 기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강물로 뛰어내려 협곡을 건너자. 죽든 살든 그 방법밖에 없겠다.”


다들 주저하고 겁을 먹고 걱정할 여유도 없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 것으로 그 기사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을 표시했다. 가장 먼저 제안을 내놓은 진홍색 옷의 기사가 협곡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자이다에게 목을 꼭 붙잡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놓지 말라고 당부한 뒤 강물로 뛰어들었다. 초록색 옷의 기사는 조라이다와 함께, 푸른색 옷의 기사는 혼자 몸을 던졌다. 카디가는 바바의 목을 잡고 그 뒤를 따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강물을 따라 아래로 흘러가던 일행은 겨우 협곡 건너편 좁은 모래밭에 몸을 올릴 수 있었다. 강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세 기사와 두 공주 그리고 바바뿐이었다. 카디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이다는 바바에게 카디가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인샬라(신의 뜻대로)!”


가슴 아파하거나 후회할 여유도 없었던 여섯 사람은 힘들게 걷고 걸어 다음날 오후 코르도바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포로로 잡혀갔던 아들, 형제, 친구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코르도바 곳곳에서 함성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성문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함께 온 두 공주는 물론 바바에게도 뜨거운 환영을 보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코르도바에서는 두 기독교 기사와 원래 기독교 여성의 딸이었던 두 이슬람 공주의 화려한 결혼식이 열렸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는지 아닌지는 그라나다에 사는 백성 중에서는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니들을 따라가지 않고 남은 막내 공주에게는 불행한 운명이 기다렸다. 두 딸의 배신에 극도로 실망한 무함마드 8세는 막내딸의 방 앞에 걸쇠를 걸어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1년 365일 내내 시녀들을 붙여 감시하게 했다. 두 딸이 탈출구로 사용했던 유일한 창문도 봉쇄해 버렸다. 소문에 따르면, 막내 공주는 두 언니를 따라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녀의 시신은 작은 관에 담겨 그녀가 살았던 궁전 천장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