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의 14대 왕이었던 무함마드 8세의 별명은 ‘왼손잡이’였다. 왼손을 잘 썼기도 했지만, 하는 일마다 망치기 일쑤였던 게 이유였다. 당시만 해도 ‘왼손, 왼손잡이, 왼쪽’이라는 단어는 ‘서툴다, 사악하다’는 등의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날씨가 화창하던 어느 봄날, 무함마드 8세는 화려한 마차에 올라탄 채 신하들을 이끌고 엘비라 산언저리를 둘러보았다. 그때 전쟁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는 이슬람 병사들이 인근을 지나갔다. 그들은 기독교 군대에게서 약탈한 노획물과 남녀 노예들을 가득 실은 짐마차를 여러 대 끌고 갔다.
무함마드 8세는 짐마차 바로 뒤를 따라가는 조랑말 등에서 울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했다. 가슴이 쿵쿵거릴 정도로 깜짝 놀란 그는 당장 여성을 데려오라고 했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눈을 멀게 하고, 말문을 막히게 하고, 다리를 덜덜 떨리게 할 만큼 미모가 뛰어난 여성이었다.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붙잡은 기독교 노예라고 했다.
“전쟁터에서 약탈한 노획물과 노예들을 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가지고 가다니, 무도한 놈들이로구나. 그동안 전장에서 고생한 점을 어여삐 여겨 용서하겠다. 대신 이 노예는 짐에게 바치는 선물로 주고 가도록 하라.”
무함마드 8세는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옆자리에 태워 알람브라 궁전까지 데리고 갔다. 시녀들에게 깨끗하게 목욕시키고 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혀 후궁들의 궁전인 하렘에 보내 놓으라고 했다. 그는 이어 수년 전 포로로 잡혀 와 왕궁에서 일하는 다른 기독교 여성을 들어오게 했다.
“앞으로 너에게 카디가라는 아랍 이름을 하사하겠다. 당장 하렘에 가서 새로 온 기독교 여성에게 개종한 뒤 나와 결혼하라고 설득하라.”
왕의 의도를 알아차린 카디가는 곧바로 하렘으로 달려갔다. 어차피 이곳에서 빠져나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틀린 처지에 이번 일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여성은 하렘에서 울고 있었다.
“울음을 당장 그치세요. 어차피 당신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랍니다. 왕은 당신을 왕비로 삼으려고 하고 있어요. 그 제안을 받아들이세요. 눈물을 닦고 주변을 둘러봐요. 스페인 어디에 이렇게 아름다운 궁전이 있던가요? 당신은 이제 이 궁전의 안주인이 되는 겁니다.”
카디가의 이야기를 다 들은 기독교 여성은 왕의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기독교 군대의 장군이었던 아버지는 전장에서 목숨을 잃어 그녀는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은 처지였다. 이슬람 병사들에게 끌려가 몸을 망치는 것보다는 다소 늙었지만 이슬람 왕의 부인이 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함마드 8세와 기독교 여성은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알람브라 궁전에서 함께 살게 됐다. 그녀는 개종하고 아랍식 이름을 얻었지만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한 지 1년여 만에 세 쌍둥이 딸을 낳았다. 5분 간격으로 태어난 세 딸에게 자이다, 조라이다, 조라하이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녀는 이후에는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했고, 수년 뒤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왕비를 잃은 무함마드 8세는 점성술사를 불러 졸지에 혼자서 키우게 된 세 딸의 운명을 물었다.
“왕이시여, 딸들은 원래 변덕스럽답니다. 공주님들이 결혼할 나이쯤에는 당신을 놀라게 할 정도로 훌륭한 여성으로 자랄 겁니다. 다만, 공주님들을 당신의 품안에 두고 키우시라고 조언을 드립니다. 배신을 당하지 않으시려면 어떤 사람에게도 맡기지 마십시오.”
점성술사의 이상한 점괘를 들은 무함마드 8세는 세 공주를 세상의 어떤 남자도 볼 수 없고, 어떤 남자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궁전에 보내 키우기로 했다. 그 임무는 카디가에게 맡기기로 했다.
무함마드 8세의 세 공주가 간 곳은 지중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살로브레나 성 안에 만들어진 훌륭한 궁전이었다. 세 공주가 묵을 방은 귀하고 값비싼 보물과 비단으로 장식됐고, 정원에는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귀한 과일과 향기로운 꽃들이 가득했다. 궁전에는 시종들은 한 명도 없고, 모든 일은 시녀들이 맡고 있었다. 어린 세 공주는 아버지에게서 떨어진 아쉬움이 컸지만, 궁전이 워낙 아름다운데다 카디가가 어머니 노릇을 잘 했기 때문에 아무런 슬픔이나 고민 없이 무럭무럭 잘 자랐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3~4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세 공주는 세상 어느 숙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지성적이고 단아한 여성으로 성장했다. 첫째 자이다는 사려 깊은 성격이었다. 여기에 호기심이 많아 항상 질문을 하거나, 세상 모든 일의 깊숙한 부분까지 공부하려는 욕심이 많았다. 셋 중 가장 미모가 출중했던 둘째 조라이다는 외모만큼 세상의 아름다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수시로 거울이나 분수의 물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셋째 조라하이다는 세상 막내가 다 그렇듯 수줍음이 많으면서 애교가 넘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녀는 꽃은 물론 애완동물을 무척 사랑했다.
인간이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한다 하더라도 신이 망치기로 마음먹으면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는 게 세상의 일이었다. 무함마드 8세의 세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살로브레나 성에서 지중해 수평선 너머의 조그만 어선까지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맑았던 날의 일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자이다는 다른 날처럼 그날도 방 바깥쪽 베란다에 걸터앉아 건너편 계곡이나 저 멀리 해변을 두리번거렸다. 평소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던 곳이지만 그날은 달랐다. 수평선 너머에서 배가 두어 척 오는가 싶더니 자이다가 내려다보는 해변에 정박했다. 배에서는 사람들이 내렸다.
호기심이 동한 자이다는 그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보려고 두 손을 눈가에 모았다. 그곳에는 이슬람 병사 여러 명과 포로로 끌려온 기독교 병사들이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쿵쿵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밧줄에 묶인 꽃다운 나이의 기사 세 명 때문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옷을 입었고, 힘든 상황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자이다는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 두 동생에게 어서 밖으로 나와 보라고 일렀다. 호들갑을 떠는 언니의 목소리를 들은 조라이다와 조라하이다는 무슨 일이냐면서 웃으며 달려갔다.
“저기 해변을 좀 보렴. 밧줄에 묶인 세 젊은 기사를….”
조라이다와 조라하이다는 언니의 말대로 두 손을 눈가에 모아 해변을 쳐다보다 역시 가슴이 쿵쿵 뛰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남자라고는 아버지 말고는 제대로 본 적도 없었던 그녀들로서는 왜 이런 느낌이 생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이다는 세 기사 중에서 진홍색 옷을 입은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면 조라이다는 초록색 옷을 입은 청년 외에는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라하이다는 파란색 옷을 입은 기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우연히 방에 들어온 카디가가 세 공주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베란다로 가서 해변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훌륭하게 생긴 세 기독교 기사가 이슬람 병사들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세 청년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세 공주를 보면서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점성술사가 말했던 그 때가 왔구나. 결혼할 만한 나이….’
그로부터 며칠 후, 무함마드 8세가 알람브라 궁전의 시원한 방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을 때 카디가가 보낸 편지와 상자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세 공주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상자에는 만개를 앞둔 배꽃, 살구꽃, 복숭아꽃이 들어 있었다. 그는 카디가가 보낸 편지와 상자가 무슨 뜻인지를 이해했다.
‘점성술사가 말했던 시기가 온 모양이로구나. 이제부터 내 딸들은 알람브라 궁전에서 내가 직접 키워야겠다.’
무함마드 8세는 신하들을 이끌고 곧바로 살로브레나 성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세 공주는 옷을 예쁘게 입고 궁전 입구에서 기다렸다. 아버지가 도착하자 첫째 자이다는 차분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자세로 걸어 나가 아버지라기보다는 왕에게 바치는 존경의 눈길을 듬뿍 담은 인사를 드렸다. 조라이다는 시녀의 도움을 받아 우아한 자세로 걸어 나가더니 세상 어떤 남자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미소와 함께 아버지의 손에 입을 맞췄다. 조라하이다는 낯선 아버지 앞에 서는 게 쑥스러운 듯 머뭇거리더니 쪼르르 달려가 두 팔로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았다.
무함마드 8세는 기대를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훌륭하게 자란 세 딸을 보고 너무 흡족해 했다. 세 딸 모두 그토록 사랑했던 왕비를 쏙 빼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곁에 서 있던 신하를 곧바로 그라나다로 보냈다. 왕의 세 공주가 그라나다로 돌아갈 터이니 모든 백성들은 절대 길가에 나오지 말고, 집의 모든 창문을 꼭 잠가 공주들의 얼굴을 훔쳐보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이었다.
무함마드 8세는 화려한 마차 세 대에 세 딸을 각각 태운 뒤 그라나다로 향했다. 왕 일행이 세닐 강둑 주변을 지날 무렵 포로들을 호송하는 이슬람 군인들의 행렬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들은 이동 중이어서 왕의 신하가 보낸 전갈을 미처 받지 못했던 것이었다.
신하들은 포로들과 이슬람 군인들에게 고개를 숙여 절대로 들지 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슬람 군인들은 명령에 따라 고개를 땅으로 내렸다. 포로들 중에는 무함마드 8세의 세 딸이 살로브레나 성의 베란다에서 보았던 세 기사도 포함돼 있었다. 그들은 아랍어를 할 줄 몰라 신하들의 큰 목소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무함마드 8세는 진노했다.
“저 무례한 기독교 기사 놈들의 목을 당장 베어 버려라.”
마차를 타고 무함마드 8세의 뒤를 이어 오던 세 공주는 아버지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내밀어 앞쪽을 바라다보았다. 아! 이게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그들의 눈앞에 며칠 전 보았던 기독교 기사 세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병사들이 큰 칼을 들고 기사들을 향해 달려가자 깜짝 놀란 세 공주는 일제히 마차에서 내려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바마마, 오늘은 저희들이 오랜만에 알람브라 궁전으로 돌아가는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저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큰 자비를 베푸셔서 오늘의 경사를 영원히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세 공주의 간곡한 요청을 들은 무함마드 8세는 그제야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손을 들어 병사들을 멈추게 한 뒤 다시 명령을 내렸다.
“저놈들에게 자비를 베풀겠다. 대신 벌은 받아야 한다. 저들을 버밀론탑에 가둔 뒤 강제노동을 시키도록 해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