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에 밤의 평화가 찾아온 지 1년쯤 된 어느 날 밤. 마법의 탑에 있던 기사 인형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이상한 것은, 기사의 창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땅으로 거꾸로 매달린 데다 회전판 위에서 360도 빙빙 돌기만 했다는 점이었다. 적이 쳐들어온 사실을 알리는 것은 분명한데, 어디로 어떻게 오는지는 종전과 달리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형 병사들도 서로 싸우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아벤 하부즈는 병사들을 보내 그라나다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을 샅샅이 뒤지라고 했다. 병사들은 밤새 수색 작업을 벌였지만 적군의 흔적이라고는 화살 끝부분에 붙은 깃털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적군이 어디로 쳐들어온다는 거야? 이제 마법의 탑의 효력도 끝난 건가?”
병사들은 불평을 터뜨리며 그라나다로 돌아가기로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하던 그들은 세비야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로 인근 연못가에서 잠을 자던 기독교 순례자들을 발견했다. 그 중에 너무 아름다워 눈부실 정도인 고트족 처녀가 한 명 있었다. 병사들은 ‘이슬람 군대에 피살당한 기독교 왕의 딸’이라는 고트족 처녀를 왕에게 데려갔다.
아벤 하부즈는 고트족 처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여자로구나!”
그는 고트족 처녀를 후궁으로 삼아 정사는 뒤로 미룬 채 하루 종일 궁전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적은 쳐들어오지 않았지만, 왕이 국정을 돌보지 않으니 백성들은 점점 더 살기 어려워졌다.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그라나다 곳곳에 돌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브라힘은 궁전으로 달려갔다.
“왕이시여, 이슬람 기사가 창을 아래로 내리고 회전판에서 빙빙 돈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에 등장하는 적은 외부에 아니라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저 고트족 처녀입니다. 왕께서 앞으로도 평화로운 밤을 이어가려면 저 처녀에게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녀를 저에게 보내시면 모든 게 해결될 것입니다.”
이브라힘의 말을 들은 아벤 하부즈는 깜짝 놀랐다. 그는 모든 게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단호하게 이브라힘의 말을 끊었다.
“도사께는 이미 무희 다섯 명을 보내드리지 않았습니까?”
“노래를 잘 부르는 미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 처녀라면 거기에 딱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세상 어느 남자에게도 질 수 없습니다.”
과거와 달라진 아벤 하부즈의 얼굴을 본 이브라힘은 더 이상 두말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 궁전에서 나갔다. 그가 궁전 출입문을 넘어서면서 잠시 주문을 중얼거린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브라힘은 무희의 춤을 즐기며 편안하게 지내던 동굴에서 나와 다른 암자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마법의 탑에 있는 이슬람 기사 인형은 더 이상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무리 적군이 쳐들어 와도, 반란이 일어나 궁전이 포위당해도 기사 인형은 그라나다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느긋한 미소만 지었다.
도저히 견디다 못한 아벤 하부즈는 이브라힘이 틀어박힌 암자로 달려갔다.
“도사님,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이대로는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습니다. 종전처럼 기사 인형이 위험을 미리 알려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시오.”
“모든 일의 근원은 고트족 처녀입니다. 지금 당장 버리십시오.”
“도사님, 저는 그라나다 국왕이면서 한편으로는 사랑에 빠진 평범한 남자입니다. 영예도, 권력도, 재산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그 여자만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을 말씀하시면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그라나다 왕국 절반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이브라힘은 사랑의 힘에 사로잡혀 앞뒤를 구분할 수도 없게 된 아벤 하부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던지 아벤 하부즈는 쑥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제야 이브라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이슬람 전설에 나오는 ‘이렘의 정원’을 만들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신비로운 곳입니다. 저는 100년 전 사막을 헤매다 가본 적이 있습니다. 정원을 다 만들면 다시 왕은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보상은 ‘짐을 가득 싣고 이렘 정원의 정문을 지나는 첫 번째 짐승과 그 소유물’입니다. 왕이시여, 약속을 지키소서.”
이미 심장 깊숙이 에로스의 화살이 박힌 아벤 하부즈에게는 이브라힘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분간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다시 편안한 삶’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 ‘짐을 가득 실은 첫 번째 짐승과 그 소유물’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를 담은 것인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브라힘은 아벤 하부즈의 약속을 받아낸 뒤 바로 공사를 시작했다. 원래 대형 정원을 짓는 공사라고 하면 건축가 여러 명과 인부 수백 명을 동원해 수년이 걸리게 마련이지만,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솔로몬왕의 마법 책을 훔쳐 공부한 도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무도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한 뒤 한밤중에 몰래 산에 올라가 밤새도록 주문을 웅얼웅얼 외우더니 불과 며칠 만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었다.
“왕이시여, 저의 수고는 모두 끝났습니다. 지금 저와 함께 산 정상 쪽으로 올라가면 지금까지 사람이 만든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정원이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된 홀, 황홀한 정원, 기적 같은 분수, 눈부신 향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목욕탕을 갖춘 신비의 정원입니다.”
아벤 하부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고 이브라힘에게 달려가 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앞으로 모든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면서 전설 같은 이렘의 정원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남은 인생을 즐길 것을 생각하니 체면이고 뭐고 따질 여지가 없었다.
아벤 하부즈는 고트족 처녀와 시종 여러 명만 데리고 궁전을 나섰다. 많은 보석이 치렁치렁 매달린 드레스를 입은 고트족 처녀는 조그마한 흰색 조랑말을 타도록 했다.
이브라힘은 뒤에 누가 따라오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묵묵히 산 정상에 있는 이렘의 정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벤 하부즈는 앞서가는 이브라힘의 뒷모습을 한 번 쳐다봤다가 뒤에서 따라오는 고트족 처녀를 한 번 쳐다봤다가 하며 신나게 콧노래를 불렀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이브라힘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신비하게 생긴 탑 모양 출입문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신기한 모양의 손과 열쇠가 새겨진 아치형 문이었다. 문은 굳게 닫혀 그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 손과 열쇠는 천국으로 이어지는 출입문을 지키는 부적입니다. 왕께서 먼저 열쇠를 끌어내려 마법의 주문에 걸린 문을 열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정원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벤 하부즈는 손을 뻗어 올려 열쇠를 붙잡았다. 얼마나 기뻤던지 벌린 입을 계속 다물지 못한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집어넣어 돌려 문을 열었다. 순간 아벤 하부즈가 말릴 사이도 없이 뒤에서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문 안쪽을 바라보던 고트족 처녀가 당나귀에 탄 채 먼저 문을 지나가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아벤 하부즈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왕이시여, 보소서. 당신이 저에게 약속했던 선물이 방금 문을 지나갔습니다. 짐을 가득 싣고 이렘 정원의 정문을 지나는 첫 번째 짐승과 그 소유물입니다.”
고트족 처녀가 문을 통과하는 순간 이브라힘은 아주 밝은 표정으로 아벤 하부즈의 얼굴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벤 하부즈는 그때까지도 이브라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브라힘이 즐거운 표정을 계속 짓는 모습을 보고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아니, 도사님,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짐을 가득 싣고 이렘 정원의 정문을 지나는 첫 번째 짐승과 그 소유물이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고요? 말이라면 저 조랑말보다 더 크고 힘센 말이 마구간에 지천으로 널렸으니 가져갈 만큼 가져가십시오. 아름다운 여자라면 궁전 후원에 흘러넘치니 그 또한 마음대로 챙기셔도 됩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여자만큼은 절대로 안 됩니다.”
고트족 처녀는 아벤 하부즈가 처절한 목소리로 울부짖는 모습과 얼마나 좋은지 입을 다물 줄 모르는 늙은 도사의 얼굴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가진 것이라고는 예쁜 얼굴 하나밖에 없는 여자 하나를 두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을 향해 조소하는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화가 난 아벤 하부즈는 이브라힘을 죽이겠다고 달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사막에서 건너온 이 엉터리 도사야. 네가 마법의 지배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의 지배자다. 감히 왕을 농락한 너를 가만 두지 않겠다.”
아벤 하부즈가 소리를 지르건 말건, 달려오건 말건 이브라힘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껄껄 웃으면서 대꾸했다.
“왕이시여, 이제 작별을 고할 시간입니다. 당신은 작은 왕국이나마 열심히 다스리도록 하시오. 바보들의 천국을 즐기도록 하시오. 나는 철학의 천국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환하게 웃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이브라힘은 조랑말에서 고트족 처녀를 끌어내려 품에 안았다. 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더니 지팡이로 땅바닥을 세게 쳤다. 멀쩡하던 땅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갑자기 쩍 갈라졌다. 이브라힘은 주변에 짙은 먼지를 날리면서 고트족 처녀와 함께 땅 밑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이 모습을 감추자 땅은 벌렸던 입을 다물 듯 다시 달라붙었다.
아벤 하부즈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처럼 멍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는 병사 수천 명을 동원해 그라나다 곳곳을 뒤져 이브라힘과 고트족 처녀를 찾으라고 했다. 하지만 마법의 힘을 입어 땅 밑으로 꺼진 두 사람을 병사들이라고 해서 찾을 도리는 없었다.
이브라힘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인근 기독교 왕국들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부터 그라나다는 이전보다 더 자주 기독교 군대들의 야습에 시달려야 했다. ‘전쟁놀이’를 그만 두고 평화롭게 노후를 보내려고 했던 아벤 하부즈는 과거보다 더 힘들게 살아남기 위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아벤 하부즈는 세상을 떠나 이렘의 정원 인근에 묻혔다. 이후 세월이 더 흘러 그곳에는 새로운 궁전이 만들어졌다. 바로 알람브라 궁전이다. 아벤 하부즈가 열쇠를 잡았던 정원의 출입문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알람브라 궁전 입구에 있는 ‘정의의 탑’이 바로 그것이다. 현지 사람들은 이 탑을 지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탑 아래 깊은 곳에 이브라힘이 비밀의 궁전을 만들어 고트족 처녀의 노래를 들으면서 ‘신의 사색’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