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의 비밀(1)

by leo


궁전에서 내려다보는 그라나다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의 우거진 숲에서는 새들이 앞다퉈 신나게 노래를 불렀고, 장정들이 땔감을 마련하려고 도끼로 나무를 쿵쿵 찍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가가호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어린이들은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재잘거리며 뛰어놀았다.


그라나다의 지배자인 아벤 하부즈 왕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는 평생 기독교 군대에 맞서 전쟁을 벌여왔다. 때로는 적군의 심장부까지 쳐들어가 혼을 내기도 했고, 거꾸로 그라나다 중심부를 습격당해 피살당할 뻔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제 나는 늙었어. 전쟁은 그만 하고 편안히 쉬면서 노후를 보내고 싶구나.'


아벤 하부즈는 백성들의 한가로운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저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꿈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자신이 평화를 원한다고 해서 기독교 군대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너무 오랫동안 적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죽고 죽이는 악순환을 거듭해 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잊고 전쟁을 그치자고 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그들이 아니었다.


침략 전쟁을 중단하고 그라나다에서 방어만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첨탑을 만들고 수많은 병사들을 보초로 세운다 하더라도 기독교 군대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쳐들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노후를 꿈꾸던 아벤 하부즈에게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아라비아의 유명한 도사가 이베리아반도를 여행하던 중 그라나다 인근을 지난다는 이야기였다.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들은 그는 당장 도사를 궁전으로 모셔오라고 지시했다.


도사의 이름은 이브라힘 이븐 아부 아유브였다. 그는 이슬람의 선지자 마호메트의 친구인 아부 아유브의 아들이었다. 나이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수백 살 이상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는 수행원 하나 없이 오직 지팡이에만 의지한 채 아랍은 물론 스페인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기적을 펼쳐 보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아랍은 물론 스페인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아벤 하부즈 앞에 나타난 이브라힘은 첫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옷은 다 떨어져 남루했지만, 몸 전체에서 신비로운 기운이 흘러넘쳤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됐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지팡이에서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이색적인 향기가 배어나왔다. 아벤 하부즈는 이브라힘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슬람 군대가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저는 그곳에 남아 선교를 하면서 그들의 종교도 공부했습니다. 어느 날 한 사제가 피라미드를 가리키면서 ‘저곳 깊은 곳에 고대 왕의 미라가 있다. 미라 옆에 마법 등 방대하고 놀라운 지식을 담은 책이 있다. 아담이 처음 책을 갖고 있었지만 이후 대를 거쳐 솔로몬 왕에게까지 이어졌고, 지금은 피라미드에 묻혔다. 이스라엘에 있던 그 책이 어떻게 이집트로 건너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제는 ‘우리가 당신에게 가르칠 수 있는 지식이라는 것은 그 책의 내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저는 군인들을 동원해 피라미드를 바닥에서부터 파들어 갔습니다. 미로 같은 내부를 헤맨 끝에 마침내 미라에 접근하게 됐고, 책도 발견했습니다. 저는 책으로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마침내 우주의 신비와 인간의 비밀을 알게 됐습니다.”


아벤 하부즈가 이브라힘의 말에 얼마나 깊숙이 빠져들었던지 입은 벼락 맞아 두 쪽으로 갈라진 고목처럼 벌어졌고, 두 손은 늙어 기력이 쇠한 노인의 몸처럼 덜덜 떨렸고, 바지 엉덩이 부분은 볼일을 본 것처럼 땀에 흥건히 젖어 축축해진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브라힘이 긴 연설을 마치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아벤 하부즈는 깊고도 짙은 미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바랐던 평화로운 노후의 꿈을 이룰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브라힘에게 물었다.


“기독교 군대들은 하시라도 그라나다를 노리고 있습니다. 야밤에 급습해 큰 피해를 주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밤중에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도사께서 저의 고민을 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집트 보르사의 한 산 꼭대기에 구리로 만든 양과 닭 인형이 설치돼 있습니다. 회전판 위에서 360도 돌 수 있는 인형들입니다. 적들이 보르사에 쳐들어갈 경우 닭 인형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양 인형은 침입 방향으로 몸을 돌립니다. 그러면 보르사 사람들은 적이 침입해 오는 쪽에 매복해 있다가 손쉽게 물리칩니다. 그런 장치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브라힘은 다음날부터 작업에 들어가 아벤 하부즈의 왕궁 가장 높은 곳에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가져온 돌로 큰 탑을 세웠다. 탑 맨 꼭대기 층에는 사방 360도를 다 볼 수 있도록 많은 창문들이 달린 원형 홀을 만들었다. 각 창문 앞에는 탁자를 설치했고, 탁자에는 사각형 나무판을 놓았다. 나무판 위에는 말과 병사들은 물론 장군 인형을 올려 두었다. 원형 홀은 청동문을 달아 굳게 닫아 놓았다.


열쇠는 하나뿐이었다. 탑 꼭대기에는 360도 회전판에 청동으로 만든 대형 기사 인형을 설치했다. 한쪽 팔에는 방패를, 다른 쪽 팔에는 긴 창을 든 모양이었다. 기사의 얼굴은 그라나다 시내를 향했다. 공사를 마친 이브라힘은 아벤 하부즈를 탑으로 데려가 설명했다.


“적이 쳐들어오면 기사의 창이 하늘로 높이 치솟으면서 소리를 내게 됩니다. 그리고 적이 쳐들어오는 방향으로 몸을 틀게 될 겁니다. 굳이 병사를 보내 적을 막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적이 나타나면 탑에 있는 모형 군대의 병사들이 마법의 전투를 벌일 겁니다. 쳐들어오던 적들은 마법에 걸려 모형 병사를 따라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게 됩니다.”


이브라힘의 말을 들은 아벤 하부즈는 얼마나 기뻤던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탑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거나, 탑 주변을 빙 돌았다 먼 산을 바라봤다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어서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독교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정말 마법의 탑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라나다에 마법의 탑이 만들어진 사실을 알지 못한 기독교 군대가 그날 밤 로페 협곡 쪽으로 몰래 숨어 들어왔다. 그들은 평소에 하던 것처럼 숲속에 난 좁은 길을 따라 그라나다 궁전을 향해 조용히 전진했다.


그때 마법의 탑에 있는 기사 인형이 창을 들어 올리면서 울음소리를 내더니 로페 협곡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 소리를 신호로 원형 홀의 탁자에 있던 모형 병사들이 서로 마주보고 서서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이브라힘의 말처럼 신기하게도 협곡에 숨어서 오던 기독교 군대 병사들은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이 자신들끼리 칼을 휘두르고 화살을 쏘아댔다. 그렇게 밤새 싸운 기독교 군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쫓기듯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아벤 하부즈는 그날 밤부터 아무런 걱정 없이 갑옷을 벗어던지고 마치 촌로처럼 속옷만 걸친 채 궁전의 침실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백성들도 낮처럼 대문을 열어젖히고 마음 편히 밤을 보내게 됐다. 그는 이브라힘에게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말하라고 했다.


“평생 수련만 하며 살아온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냥 동굴 하나를 마련해서 ‘신의 사색’을 즐기면서 거처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꾸며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벤 하부즈는 옆에 있던 신하에게 이브라힘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마련해주라고 지시했다.


이브라힘은 곧바로 사크로몬테의 한 동굴로 올라갔다. 그는 신하에게 동굴을 더 파내서 바닥 면적을 넓혀 방을 여러 개 만들라고 했다. 각 방에는 은과 크리스탈로 만든 등잔을 달게 하고, 아랍에서 만든 각종 양탄자, 보석 등을 장식하라고 했다. 각종 향수와 아로마 오일이 흘러넘치는 목욕탕도 설치하게 했다. 이브라힘이 얼마나 많은 요구를 했던지 왕궁의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였지만, 아벤 하부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브라힘이 거처할 동굴 공사가 마무리됐다는 소식을 들은 아벤 하부즈는 직접 동굴로 찾아가 더 필요한 게 없느냐고 물었다.


“제가 '‘의 사색’에 빠져 있을 동안 곁에서 도와줄 추한 무희 다섯 명만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라나다의 신하들 중에서 도대체 도를 수련하는 일에 무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벤 하부즈는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당장 왕궁의 무희들 중에서 가장 미모가 뛰어난 다섯 명을 골라 동굴로 보냈다. 이후 이브라힘은 사크로몬테 산의 ‘단출한 동굴에서 매일 밤 추한 무희 5명의 매혹적인 춤을 즐기며 자신의 표현대로 ‘신의 사색]을 즐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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