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스페인 마드리드 북서쪽 살라망카에 여행을 좋아하는 돈 빈센트라는 대학생이 있었다. 그는 틈만 나면 기타 하나를 메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는 게 취미였다. 거리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 다른 관광객들로부터 적선을 받아 방값을 내고 밥을 사 먹는, 이른바 무전여행이었다.
어느 해 초여름 여행길에 나선 빈센트는 세비야와 코르도바를 거쳐 산후안 축제 전날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산후안 축제는 스페인에서 매년 6월에 여는 축제다. 그는 코르도바에서 만난 다른 대학생이 소개해 준 주소를 들고 호스텔을 찾고 있었다. 주인이 아주 선량한 사람이라서 돈이 없는 대학생에게는 거의 공짜 같은 가격에 방을 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가 든 종이에 적힌 주소는 누오보광장 인근 골목길이었다.
빈센트는 골목길에서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고개를 푹 숙인 채 길바닥에 앉은 이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전쟁 시기도 아닌데 갑옷을 입고 창을 든 군인이었다. 빈센트는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발동해 군인 옆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아…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그다지 춥지 않아서 다…다행이네요.”
언제 깎았는지 알 수 없는 긴 턱수염을 기른 군인은 고개를 들어 빈센트의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빈센트는 인사를 건넨 게 실수는 아니었는지 후회하면서도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옮길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군인의 강력한 눈빛이 그의 발걸음을 땅에 딱 붙여놓은 것 같았다. 군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툴툴 털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라나다의 마지막 이슬람 왕 보압딜의 보물을 지키는 군인이라네. 300년 전 이슬람 왕국이 망할 때 이슬람 마법사가 나에게 보물을 영원히 지키게 하려고 마법을 걸었지. 기독교 병사들이 못 가져가게 하려고 말이야. 나는 보물이 있는 곳에서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네. 다만 마법사는 내게 100년에 단 하루만 보물이 숨겨진 장소에서 빠져나와 바람을 쐴 수 있게 했어.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빈센트는 군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미친 사람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대망상증 환자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군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 했다. 어차피 시간도 많은 데다 그대로 홱 지나쳐버리는 것은 너무 인정머리가 없을 것 같아 인사치레로 다시 한 번 더 말을 꺼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빈센트가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자 군인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의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던 얼굴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빈센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자네가 나를 도와서 마법을 풀게 해 준다면 내가 지키고 있는 보물을 주겠네.”
빈센트는 슬슬 장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잘하면 오늘밤 정말 재미있는 경험을 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날씨가 그렇게 춥지도 않으니 잠은 밖에서 청해도 된다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만에 하나 군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뜻밖의 행운 덕분에 부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빈센트는 속으로는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군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먼저 단식 중인 신부와 젊은 기독교도 여자를 찾아서 내게 데려오도록 하게. 그 둘이 있어야 나의 묵은 마법을 풀 수 있다네.”
빈센트는 순간 난감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한 번 장난을 쳐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누에바광장으로 나가 길을 지나가는 어린 여학생을 붙잡았다. 그녀에게 푼돈을 건네주며 잠시만 도와달라고 했다.
그는 이어 신부를 찾으러 나섰다. 주변에 있는 교회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자신의 말을 믿는 신부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한참을 헤맨 끝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조그만 교회에서 혼자 졸던 신부를 찾아냈다. 그 신부는 먹는 일을 일생의 낙으로 여기는 뚱뚱한 사람이었다. 신부는 빈센트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청년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싶었다. 그러다 그는 마음을 바꿔 먹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도 안 오는 교회에 있어 봐야 돈을 벌기도 틀렸잖아.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큰돈을 벌 수 있겠지.’
신부는 저녁을 굶은 채 빈센트, 소녀와 함께 마법에 걸린 군인에게로 갔다. 군인은 세 사람을 보고 정말 기뻐했다. 그는 그들에게 마법을 푸는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지금 당장 알람브라궁전으로 올라가시오. 그곳에는 오늘 밤에만 보이는 탑이 하나 있을 거요. 먼저 탑의 동쪽 부분 아래에서 위로 20번째 줄에 글자가 새겨진 벽돌을 찾아 꺼내시오. 그러면 탑의 문이 열릴 거요. 그 안에는 보물이 가득 들어 있을 것이오. 소녀야, 문이 열리면 너는 내가 종이에 적어 놓은 주문을 외도록 해라. 그리고 신부 양반은 옆에서 찬송가를 힘껏 부르도록 하시오. 내가 시키는 대로 10분만 주문을 외고 노래를 부르면 모든 것은 끝날 거요. 그러면 내 마법은 풀리고, 보물은 당신들의 것이 될 거요. 단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보물에 손을 대거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거요. 내 말을 명심하시오.”
빈센트와 소녀, 신부는 마법의 군인이 알려준 대로 알람브라궁전으로 올라갔다. 정말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탑이 궁전 바깥에 하나 서 있었다. 군인의 말대로 탑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빈센트가 옆으로 밀어보려고 애썼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방향을 곰곰이 생각한 뒤 탑의 동쪽 부분으로 갔다. 그곳에서 20번째 줄을 쭉 살펴보니 정말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하나 있었다. 그가 벽돌을 끄집어내자 그렇게 굳게 닫혀 있던 탑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우~와!”
빈센트와 소녀, 신부는 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탄성부터 내질렀다. 그곳에는 정말 화려하고 값져 보이는 보물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그중에서 한 두 개만 꺼내 가져가도 금세 부자가 될 정도로 엄청난 보물이었다. 세 사람은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얘…얘야, 뭐하니? 어서 주문을 외…외도록 해라. 그…그리고, 신…신부님은 찬송가를 부르세요.”
소녀는 빈센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군인이 준 종이에 적힌 대로 마법을 푸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신부도 큰 목소리로 찬송가를 따라 불렀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그들은 엄청난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 꼭 하지 말라는 일은 하게 되는 법이고, 일어나지 말라는 일은 발생하게 되는 법이다.
그리스 최고의 가수 오르페우스가 저승세계에 내려가 하데스에게 빌고 빈 끝에 아내 에우리디케를 부활시켜 데리고 나올 때, 하데스는 그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세상에 나갈 때까지 에우리디케가 오는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
언제나 호기심, 조바심, 의심에 속을 태우는 인간에 불과했던 오르페우스는 세상을 1m 앞두고 뒤를 돌아보고야 말았다. 그는 결국 에우리디케를 영원히 잃고 말았다.
빈센트와 소녀, 신부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소녀가 주문을 두세 번 반복해서 외고, 신부가 찬송가를 한 두 곡 불렀을 무렵이었다.
신부는 얼마나 목청껏 노래를 불렀던지 갑자기 엄청나게 배가 고파졌다. 그는 ‘단식하는 목’'라는 조건을 맞추려고 그날 저녁도 굶은 터였다. 세 번째 노래를 부르려던 신부는 군인의 경고를 잊은 채 갑자기 음식 바구니로 달려가 빵과 과일, 음료수를 마구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곁에 서 있던 빈센트가 깜짝 놀라 그를 말리려고 손을 내뻗었지만, 이미 음식은 신부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이후였다.
그때 갑자기 탑 안에서 엄청난 광풍이 일어났다. 광풍은 빈센트와 소녀, 신부를 휘감아 올리더니 탑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리고 탑의 문은 쿵 하고 닫혀 버렸다. 이윽고 탑에서 기기묘묘한 향기가 흘러나오더니 탑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땅바닥에 넘어져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 사람 앞으로 “안 돼~”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사라지는 탑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군인의 망연자실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빈센트와 소녀, 신부가 엄청난 보물을 손에 넣기 직전에 놓치고 말았다는 소문은 불과 며칠 사이에 그라나다 곳곳은 물론 스페인 전역에 퍼져 나갔다. 그 이야기를 믿는 사람도 있었고,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일축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다시 군인의 마법을 풀고 알람브라궁전에서 보물을 찾아내려면 앞으로 10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 누구든지 6월에 그라나다로 여행을 간다면 밤에 누오보광장 인근 골목길 구석에 수백 년 전 이슬람 병사 옷을 입은 군인이 쪼그려 앉아 있는지 한번 유심히 살펴보고 대화를 나눠 보기 바란다. 누가 아는가. 그 사람이 “보물에 관심이 있으신가요”라고 물어볼지….